무엇이 코르셋인가?
- 필자는 애매한 경우 코르셋이냐 아니냐를 구분할 때 다음의 기준을 적용한다.
(논란이 되는 행위에 대해) 이는 내가 온전히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행위인가?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행위라면 코르셋이 아니지만, 자발적으로 할 수 없다면 코르셋이 맞다.
이 때, 본 글에서 제시하는 '자발적으로 할 수 있다'는 내가 문제의 행위를 하기로 선택하는 데 있어 외부적 압력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외부적 압력이 존재하는지를 판단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특정 행위를 하지 않았을 때 외부의 시선을 살펴보는 것이다.
(쉽게 말해,"만약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가 없으면 어떻게 될까?"라고 가정해 보는 것이다.)
한 예로, 더치페이를 들어보겠다. 한국에서 남자친구를 사귀는 많은 여성들은 더치페이를 한다. 그리고 대부분 자신이 자발적으로 데이트 비용을 지불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들에게 더치페이를 하지 않는 상황- 외국처럼 남성이 모든 비용을 부담하는 것-을 가정해보라고 하면, 대체로 [무개념이다/김치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부담을 주냐] 라는 반응이 나온다.
또한 실제로 많은 남성들이 더치페이를 하지 않는 여성을 포함하여 자신보다 높은 소비수준의 여성들을 김치녀라고 비난하고 조롱한다.
즉, 더치페이란 연인 사이에서 지극히 당연한 규범으로 굳어진 것이고 이를 거부하면 사회적인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같은 여성에게까지 말이다.
따라서, 더치페이란 행위를 선택하는 것은 외부적인 압력이 존재하므로 자발적인 행위가 아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무개념녀,김치녀가 되지 않기 위해 학습한 관습적 규범일 뿐이며, 더치페이는 코르셋이다.
또다른 예시를 들어 보겠다. 상당히 도발적인 문제제기인데, '효도'와 '애국' 역시 코르셋이라 할 수 있다.
우선 효도 코르셋부터 논의해 보겠다. 대한민국에서 딸은 가정에서 어떤 존재로 여겨지는가? 남자 형제가 없는 집이라면 잘 느끼지 못할 수도 있으나, 딸은 기본적으로 "더 순종적이며, 노후에 더 부양해줄 것 같은" 존재로 간주된다. 동시에 "모부, 특히 엄마를 더 이해해줄 것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순종, 감정 노동, 높은 공감능력, 도덕성> 이런 것들은 사회에서 흔히 여성에게 요구하는 여성성 규범들이며 모부가 페미니즘을 공부하지 않은 한, 이러한 규범은 그대로 딸에게 자식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된다. 아들의 경우에는 오히려 철없고 반항적인 이미지가 연상되기 때문에 이런 규범들이 상대적으로 덜 강요된다.
실제로, 딸들은 어버이날에 실용적이고 좋은 선물을 해도 아들의 선물보다(그게 흔한 꽃바구니라 해도) 평가절하되는 경향이 있다. 가사노동에 대한 이중잣대는 말할 것도 없으며, '가족들을 더 잘 챙겨야 한다'고 요구받는다. 남자형제가 없는 내 경우, 엄마는 '가족을 더 잘 챙기는' 여동생과 비교하며 나를 이기적이라느니 사회성이 모자라다며 20년이 넘도록 가스라이팅해 왔다.
또한 딸들은 자신이 지독한 성차별을 당하고,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으로 쓰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강요당하는 입장이기도 하다. 내면화된 코르셋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도 피해자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도 가족들을 위해 일했으니까", "내가 용서하기만 하면 행복해질 거야"라고 말한다. 동시에 만약 용서하지 않고 연을 끊는다던가 하면 '비정한 패륜아'고 '이기적인 썅년'이 되리라 협박한다. TV에서 보여주는 화목한 가정만이 정상이라고 말하며 나를 부적응자로 만든다.
애국 코르셋은 어떤가. 나라를 지킨 여성 독립운동가, 여성 문인, 과학자, 예술가 등등 수많은 여성들은 역사 가운데 지워지고 평가절하당해 왔다. 그러나 많은 남성들은 바람둥이거나 심한 성차별적인 발언을 해도 그 이론이 인정받고, 업적이 인정받고, 이런 것에 문제제기해봤자 옥의 티로 취급하든가 듣지를 않는다.
여성의 역사는 지워졌고 남자들이 일으킨 전쟁에서, 그 잘난 남자들이 나라를 지키지 못했는데 항상 더 착취당해 왔다. 전쟁에서 여성은 전리품이었고 성착취 대상이었으며 공로를 남겨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점들을 비꼬면서 "여자들에게는 국경도 나라도 없어" 라며 내 진짜 국적은 어디라고 말하거든 그건 또 나라에 기여한 것도 없으면서 감사할 줄 모르는 썅년이 된다.
즉 정리하자면, 코르셋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여성혐오에 기반한)사회적인 압력, 비난을 받지 않는 자발적 선택이 가능한가?" 에 달렸다. YES면 코르셋이 아니며, NO는 코르셋이다.
코르셋, 어떻게 해야 하지?
자유주의자와 급진주의자의 대립구도
- '역코르셋'과 '가부장제 재생산'
그러면 이 코르셋을 어떻게 다뤄야 할 것인가?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관점이 있다. 바로 자유주의자들과 급진주의자들의 관점이다. 자유주의자들의 경우에는 주로 <나쁜 페미니스트>를 근거로 들며 우리가 완벽할 수는 없으며 가부장제의 영향을 받은 것들 모두를 거부할 수 없다는 논리를 구사한다. 또한 이 코르셋 역시도 개인의 주체적인 행위 실천이 될 수 있다고까지 한다.(ex: 화장, 로리타 클리셰들) 주로 급진주의자들을 공격할 때 쓰는 프레임은 "여성의 자유에 대한 검열", "역코르셋"이다.
여기에 반기를 든 급진주의자들의 관점은 그러한 코르셋은 가부장제 하에서 남성들이 여성들에게'만' 강요하였던 선택이므로 가부장제에 대항하기 위해서 코르셋들을 거부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들은 코르셋을 벗기 어렵다는 사실과 자신 역시 완벽한 페미니스트가 아님을 인정하지만, 적어도 코르셋을 '개인의 자율적 선택'차원으로 해석하는 시도를 그만두고 구조를 보라고 요구한다. 자유주의자들을 공격할 때 사용하는 용어는 "가부장제의 부역자", "흉자"이다.
우리는 이미 "여성의 로리타룩 소비"를 가지고 개인의 주체적 선택의 문제로 볼 것인가, 혹은 구조의 문제로 볼 것인가로 싸운 적이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비단 로리문화에 한정되지 않고, 더 넓게는 모든 코르셋을 가지고 입씨름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나는 여기서 입장을 미리 분명하게 정하려고 한다.
- 래디컬 페미니스트로서 나의 입장:
코르셋, 발견하고 경계하라
앞서 코르셋은 여성을 억압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사용되는 규범이라고 정의하였다. 즉, 코르셋은 기존의 여성혐오적인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
가장 심한 코르셋 중 하나인 외모 코르셋은 여성에게 특정한 얼굴,몸매,화장, 패션 등을 강요함으로써 사회에서 요구하는 여성상 ( 여리여리하고 순종적인, 어려보이는 이미지)에 맞추도록 요구한다. 기존의 틀에 맞지 않는 여성들은 손쉽게 후려치기를 당하고 고나리질의 대상이 된다. 동시에 외모 규범은 여성들에게 "예쁜 외모가 권력이다"라고 세뇌시키면서 많은 남성들에게 선택받고 예쁘다는 칭찬을 받는 일이 여성으로 누리는 최고의 행복이라고 속삭인다. "못생겼다, 살 좀 빼라"라는 비난과, "예쁘시네요"라는 칭찬은 둘 다 외모 품평이며, 여성을 평가받는 상품으로 대상화한다.
결혼-출산을 강요하는 프레임은 또 어떤가. 결혼하지 않는 여성은 노처녀 히스테리라는 수식어가 붙고 하자가 있는 것으로 치부되며, "여자라면 아이를 낳아야지"라는 말은 비혼,비출산주의 여성과 불임 여성을 여성 집단으로부터 배제한다. '취집'이라는 표현 역시 결혼을 디폴트로 여기는 사고방식에서 비롯되었다. 아이를 원하지 않는 여성, 커리어를 중시하는 여성들의 존재는 지워진다. 웃기게도 여자들끼리의 동성 결혼은 비정상으로 취급한다는 점에서 결국 결혼-출산 프레임은 여성을 남성에게 종속시키고 아이를 낳는 존재로 규정한다.
이 외에도 여러 코르셋들이 있으나, 대표적인 것들만 예시로 들어 보았다. 이러한 코르셋은 페미니스트 개개인이 끊임없이 발견하고 거부해야 하며, 개인의 주체적인 선택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그 이유로는 첫째,
당신은 이미 욕망을 체화해 왔기 때문이다. 여성혐오는 인류가 모계 사회에서 부계 사회로 이동한 이후 가부장제와 뿌리를 나란히 하여 유지되어 온 것이다. 또한 앞서 포스팅에서 밝혔듯이 우리 개개인은 상대적으로 자주 노출되는 것을 욕망하게 된다. 우리는 자주 들은 음악에 꽂히고, 자주 본 것을 기억하지, 아예 모르는 것에 이끌리지는 않는다. 당연히 미디어에서 지속적으로 생산하는 미의 기준에 맞추는 것이 편하지, 그에 반대되는 선택을 하는 건 비정상적인 것 같다. 너도나도 성형하고 다이어트하니까, 다들 예쁘게 꾸미고 화장하니까 따라가기 쉬운데, 사실 페미니스트들은 이게 주입된 욕망이란 걸 알고 있잖아. 정확히는, 우리 대부분은 페미로 정체화하고 나서 알게 된 것들이잖아. 과연 내가 가진 욕망들은, 가부장제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둘째, 새로운 선택지를 알아도 실천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흔히들 페미니즘은 여성들에게 선택지를 넓혀 주었다고들 말한다. 화장, 제모, 다이어트, 성형과 같이 기존에 너무 당연하게 여겼던 규범들이 사실은 '당연하지 않았다'라는 걸 일깨워 준다고 말한다.
거기까지는 좋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긴다면 뭐가 달라질까. 늘어난 선택지와 기존의 선택지. 얼핏 보면 그냥 별 차이가 없겠지만 두 갈래 길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히 다르다. 늘어난 선택지가 아닌 기존의 선택지, 즉 남성중심사회의 미적 기준에 맞추는 걸 선택한다면 그건 '변화'도 '해방'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 행동은 페미니즘에 관심없는 여자들이 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뿐더러, 변화나 해방은 억압 때문에 기존에 내가 하지 못했던 것, 할 수 없었던 것을 시도하게 될 때 쓸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아니, 엄연히 저 흉자들과는 마인드가 다른데 어떻게 똑같은 취급을 할 수가 있냐"고? 일제 식민지 시대 때 독립의 필요성을 느낀 건 비단 독립운동가들뿐이었을까? 제국주의 권력에 착취당하는 일반 민중들 중에서도 분명 있었다. 그러면 그 사람들도 같이 역사에 남아야 하는데 왜 그렇지 못했을까. 한마디로 '차원이 달라서', 머리로 아는거랑 실천하는 거랑은 차원이 달라서 그렇다. 전자는 힘을 가질 수 없지만, 후자는 힘을 가지고 주변 사람들의 변화를 함께 이끌어낸다.
- <나쁜 페미니스트>를 사유하며
<나쁜 페미니스트>의 저자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말의 배경에는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극심한 검열이 있었다. 도덕적이어야 하고, 가부장제의 산물은 무조건 멀리해야 하며 결단코 타협해서는 안 되는 근본주의와 뿌리를 같이하는 면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어쩔 수 없이 현실과 타협해야 하는 지점이 있음을 알고 있다. 코르셋인 줄 알면서도 면접을 보기 위해 화장을 하고, 내가 하는 일이 여성에게만 부여되는 돌봄 노동, 감정 노동인 줄을 알면서도 '여성성'을 수행한다. 그렇지 않으면, 짤릴 테니까.
또한 가부장제라는 체제 하에 어디까지 나의 욕망과 취향이 자유로운지 선뜻 구분해내기는 어렵다. 우리는 프레임에 갇힌 사람들을 코르셋이라고 부르며 이들을 계몽의 대상쯤으로 여기지만, 사실 우리 역시 코르셋을 풀어가는 단계 어딘가에 있다. 갓치-코르셋-흉자(명자)의 삼분법은 구분이 명확하지 않으며, 코르셋을 하나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코르셋으로 분류된다면, 갓치는 '완벽한 페미니스트' 라는 존재로 성녀화될 뿐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나쁜 페미니스트'는 의미를 갖는다. 페미니스트들이 지독한 자기검열과 비타협적인 태도, 그리고 도덕성을 요구받으며 고통받았기 때문에 "완벽하지 않아도 페미니스트야"라는 말은 큰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말은 가부장제 문화에 대한 비판적인 검열을 멈추라는 뜻이 아니다. 스스로 완벽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네가 페미니스트네 아니네 타인을 함부로 재단하지 말라는 뜻이지, 당신이 향유하는 문화, 취향과 같은 것이 코르셋이라도 전혀 문제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는 완벽주의의 압력에 지친 사람들을 위한 위안이지, "그러니까 지금 이 상태에 머물러"라고 안주하는 상태를 정당화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완벽하지 못하다고 해서 타인을 설득할 자격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 논리대로라면, 유치원 교사는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하면 안 돼'라고 가르칠 수 없거든. 도덕적으로 완벽한 교사만 도덕을 가르칠 수 있나? 그거 아니잖아. 완벽하지 않은데도 우리가 교사의 자질 운운하지 않는 건, 교육을 통해 '무엇이 바람직한지'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코르셋을 다 못 벗었어도 이 글을 쓸 수 있는 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억압에 대한 저항이니까. 그 가치를 우리가 공유하고 있으니까 그렇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러나 거기에 멈춰 있지는 말기를. 완벽하지 않다고 해서, 우리가 코르셋을 거부하는 행동 자체가 무의미한 것도 아니고, 그게 어떤 의미인지도 알잖아. 당장 다 벗으라는 말은 하지 않지만, 하나씩은 천천히 시도해 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