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제도가 어떻게 가부장제를 지탱하는지에 대한 수많은 분석을 바탕으로, 현재 4B(비혼-비출산-비연애-비섹스)는 여성주의 실천의 기본 중의 기본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여성주의자들은 4B담론에서 이성애 관계만을 비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최근에는 '레즈연애도 혐애'라면서 레즈비언 관계까지 비판을 확장하였고, 이에 따라 반-성애자antisexual 대 레즈비언 간 치열한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구도에서 양측이 간과하기 쉬운 지점이 있는데, 바로 비연애주의자 레즈비언의 존재다.
참고로 필자는 여성에 대한 연애감정은 경험했으나 성욕은 누구에게도 느껴 본 적이 없어 플라토닉 레즈비언 혹은 무성애자 레즈비언이라는 말로 자신을 소개해 왔다. (섹스 안하는게 뭐 그리 유별난 일이라고 굳이 부연설명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만) 연애관계에 대한 환멸을 느껴 몇 달 전부터 어플도 지우고 살다가, 최근에는 아예 비연애주의자 선언을 했다.
순차적인 생각의 흐름을 통해 나는 비연애주의에 도달했다. 그중 첫번째 단계는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바람직한 연애관계의 범주를 좁히고자 시도한 것이고, 두 번째 단계는 연애 자체가 문제적이라 생각하여 적극적으로 비연애를 결단한 것이다.
1. 이상적 연애관계를 설정하기
과거 서구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들은 폭력적인 이성애 관계를 거부하고, 여성들 간의 자매애를 장려하고자 여성 동성애를 정치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들이 레즈비언 자체를 숭배하고 모든 형태의 레즈비언 관계를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이 이성애를 거부한 근본적인 이유는 여성이 차별대우를 받고 착취당하는 것을 문제삼았기 때문이므로 그 연장선에서 레즈비언 관계에서 권력차가 성애화되고 이성애가부장제를 강화하는 지점들을 비판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부치/팸 역할놀이와 BDSM이다. 나는 래디컬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로서 이 분석을 받아들였고, 부치/팸 단어나 BDSM을 반대하는 것은 물론 그 외에 권력차를 성애화하는 양식, 가부장제에서 내면화한 욕망들이 없는지 탐구하였다. 그 중 내가 발견한 것들은 다음과 같다.
무조건 연상 혹은 연하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다. 직종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연령의 차이는 일반적으로 사회경력 차와 연결되며, 자연히 경제력, 사회적 지위의 차이도 따라온다. 그리고 나이차가 심하게 날수록 이러한 차이는 더욱 벌어진다. 더구나 한국이 나이주의가 심하고 같은 연령이 아니면 친구가 되기도 어렵다는 점을 감안할 때,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는 상관없이 '일단' 연상의 여성 혹은 연하의 여성과 만나고자 하는 태도는 권력차를 성애화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연상/연하를 선호하는 심리의 기저에는 나이가 많은/적은 사람에 대한 고정관념이 자리하고 있다. 예를 들면 연상의 여성에게는 관계를 ‘리드’하고 조언,봉사해주길 바라거나, 연하의 여성에게는 ‘애교’를 부리고 의지하길 바라는 식이다. 이런 고정관념을 가지고 연애하는 것이 부치팸 단어만 안 붙였다 뿐이지 나이주의에 기반한 역할놀이가 아니면 뭘까. 그리고 실제로 나이차를 이용해 어린 여성에게 폭력을 저지르는 일들도 발생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무조건적으로 연상/연하를 찾는 태도는 분명히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이 부분은 부치/팸 관계와 마찬가지로 여성성/남성성 역할수행에 포함된다. 애교는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권을 중심으로 하는 특수한 언어문화로 이성애 관계에서 주로 ‘여성에게’ 더 많이 요구된다.여성은 미숙한 어린아이의 특성을 따라함으로써 자신을 무해한 존재로 성애화하고, 남성은 애교를 즐기며 자신의 남성성을 확인받는다. 여성들 간의 애교라 해도 여성이 자신을 무해한 존재, 보호받을 존재로 성애화한다는 점,그리고 일반적으로 권력관계(대표적으로 나이 차, 지위)를 수반한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애정표현에 필수적인 요소도 아니고, 약자의 언어인 ‘애교’는 지양해야 한다.
또한 키차이에 대한 선망도 문제적이다.큰 키, 좋은 체구와 같이 남성성으로 분류되는 신체적 특성에 끌리는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반드시 질문해야 한다. 나는 왜 하필 큰 키의 여성에게 끌리는가?올려다보는 느낌이 좋거나,의지가 된다거나 따위의 대답들은 으레 이성애자 여성들이 키큰 남자를 선호하는 이유와도 겹친다. 이들이 키큰 남자를 선호하는 이유는 그게 전형적인 남성 신체의 특성이고, 자신을 보호해줄 것 같은 듬직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그 심리적 기저에는 여성은 남성보다 신체적으로 열등하며, 따라서 보호받는 대상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즉 키큰 여성을 선호하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보호받을 대상으로 상정하는 일이다. 또한 이는 이성애 관계에 대한 모방심리일 수도 있다. 실제로 전형적인 부치-팸 관계를 수행하는 레즈비언들, 이성애 관계로 패싱하고 싶은 레즈비언들은 키 차이가 나는 상대를 선호했다. 키는 생물학적 성차와 관련되는 것으로 멀리서도 상대방의 성별을 짐작하는 데 유용한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더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찌됐든 하나하나 찾아가던 중에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따지다 보면 이상적인 연애관계가 있긴 한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왜 연애를 해야 하지, 나는 뭣 때문에 연애를 하고 싶은 거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의 흐름 끝에 나는 비연애라는 종착지에 도달하게 되었다.
2. 비연애주의에 도달하다
"가부장제의 잔재를 몰아내는 게 목적이라면, 래디컬 페미니스트끼리 만나는 거 괜찮지 않아?"
많은 래디컬 레즈비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나 역시 그랬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괜찮지 않다. 그나마 각성했다 치더라도 우리 역시 가부장제에서 살아온 시간만큼 그 문화에 찌들어 있고, 친구관계도 권력차가 존재하는데 하물며 연애관계쯤이야. 래디컬 페미라 해서 인간성이 좋다는 보장이 없으며, 특히 에로스적 사랑은 그 권력차를 낭만화하여 우리의 판단력을 흐려놓기 때문에 더욱 경계해야 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레즈비언 혐오 조장이나 아웃팅 문제 때문에 쉬쉬했을 뿐 여성 간에도 사랑이란 이름으로 가스라이팅과 성폭력이 발생한다.
연애는 본질적으로 우리가 스스로를 상품화하게 만든다. 만남어플, 연애를 목적으로 하는 커뮤니티가 형성되면서 동성애 관계는 이성애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연애시장을 구성하였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공간은 주로 어플과 이쪽 커뮤, 바, 클럽 등으로 한정된다. 어플과 커뮤에서는 대개 프로필을 적고 자기소개와 상대의 조건을 적어놓는다. '너도 래디컬페미면, 너도 탈코했으면' 역시 내가 상대를 고르는 조건이다. 내가 상대방에게 원하는 기준을 세우고, 나 역시 상대방의 기준에 맞추며 짝을 찾는 과정에서 우리는 온전히 자유로운 한 개인일 수 없다. 물론 친구를 찾는 과정에서도 서로 마음이 맞아야 한다지만, 친구를 사귀는 과정에서 우리는 연애처럼 상대방에게 구속력을 행사하거나 은연중에 외모를 평가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성적 요구를 하지 않고 이로 인해 불편해지지 않는다. 세상에는 섹스 외에도 재밌는 게 많은데
그리고 정말 20년씩 길게 사랑을 지속하는 경우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부럽다고 느끼는 것 아닌가. 현실적으로 사람 감정이란 변하는 것이니 헤어졌을 때도 생각해야 한다. 만약 둘 다 페미니스트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면 좁은 판이므로 시위나 강연, 스터디 등에서 마주치기도 쉽다. 서로 어색한 상황이 만들어지는 건 둘째치고, 연애 사실을 자랑삼아 말하고 다녔다면, 헤어지고 나서 남들의 안줏거리쯤으로 소비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CC나 사내커플의 단점이 그대로 적용된다는 뜻이다.
물론 남들이 바라는 정말 이상적인 연애를 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델을 따라 연애를 하는 분위기가 주류가 될 수는 없다. 이는 결국 이성애자 여성들이 갖는 연애에 대한 환상과 크게 다를 것이 없으며, 연애상대를 찾고 만나는 과정에서 경제적, 심리적 자원과 시간을 투자한 만큼 실제 연애관계가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서로를 발전시키고 힘이 되는 관계가 굳이 연애라는 방식일 필요는 없다. 소울메이트, 혹은 멘토-멘티와 같이 서로를 구속하지 않으면서도 친밀한 관계들을 상상함으로써 우리는 여성 간 친밀성에 대한 지평을 넓힐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외로워서 연애를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말한다. 왜 외로움을 느끼는지 스스로 질문해 보아라. 외로움을 느끼는 이유로는 "남들은 다 하니까" 연애하지 않으면 소외되는 느낌을 받는 것도 주된 이유가 되겠지만, 애정결핍과 관계중독 등의 심리적인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심리적인 문제는 차치하고, 전자의 경우만 이야기해 보겠다. 이는 사회에서 비혼 여성을 후려치는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 비혼 여성은 동물을 키우거나 친구와 동거하는 선택을 해도, 남자와 함께 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외롭지 않니?"라는 물음이 항상 따라다닌다. 탈혼 후 재혼하지 않는 여성에게도 사람들은 똑같은 질문을 한다. 여자들끼리 동거하거나 반려동물을 키운다고 해도 이성애중심적인 사회는 남자가 필요없는 우리의 욕망을 간단히 무시하면서 레즈비언과 무성애자 여성을 함께 지워버린다. 비혼을 결심하는 여성에게는 "그러면 외롭지 않겠니?"라고 질문한다. 남자 없이 생활하면 외로움을 느끼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우리는 강제로 외로움을 '주입당했다'.
남들이 당신을 미쳤다고 가스라이팅할 때, 당신은 스스로의 정신상태를 의심해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연애하지 않는 여성에 대해 자꾸 외롭고 경쟁에서 탈락한 이미지를 부여할 때, 당신도 비연애주의란 선택을 부정적으로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주입된 감정을 진짜 내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없다. 이미 연애를 해본 사람들이라면 365일 24시간 내내 함께 있지 않으므로, 연애 자체만으로 외로움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을 알 것이다. 그럴진대, 외로움을 해소하는 수단으로 사람을 만나기보다 혼자 있는 시간에 가치를 부여하는 새로운 시도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
최근에 그런 질문을 받았다. '여자랑 연애도 안 하고, 섹스도 안 할거면 대체 왜 레즈비언이란 이름을 쓰냐, 가시화에 방해된다'는 것이었다.
확실히 비연애주의 레즈비언들이 레즈비언 가시화에 별로 도움은 되지 않는다. 물론 우리도 여성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스킨십도 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이성애중심 사회가 위협적으로 느끼는 '동성애'를 재현하지 않기 때문이다. 4B를 실천하면서 여성끼리 동거하거나 혼자 사는 건 이성애중심 사회를 확실히 위협하고, 많은 레즈비언들도 애인과 함께 살기를 바라지만, 그런 생활방식이 레즈비언의 삶으로 독해되지는 않는다. 여자끼리 손 잡고 다녀도, 이성애커플의 인기 데이트장소를 찾아도 그냥 친한 친구관계로 읽힐 뿐 레즈비언이라 이해하지 않는 분위기이므로, '비연애주의' 레즈비언이 뜬금없게 들릴 수 있겠다.
그러나 가시화 차원에서 도움이 안 되는 것과 별개로, 여러 레즈비언 군상 중 하나로 비연애주의 레즈비언은 존재한다고 말하고 싶다. 가시화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비난받아야 한다면, 커밍아웃하지 못하는 레즈비언들도 비난받아야 하는가. 그리고 커뮤니티나 어플이 늘 연애/섹스상대를 구하는 글로 넘쳐난다는 점을 생각할 때, 지극히 소수인 비연애주의자들의 존재는 다른 레즈비언들의 존재를 지우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다.
또한 레즈비언이 여성과 연애/섹스하리란 기대를 받는 건 사실이지만, 단순히 수행여부로 정의되는 정체성은 아니다. 이성애자로 패싱하고자 여성과의 연애를 철저히 숨기거나 사귀지 않는 벽장 레즈비언은 레즈비언이 아닌가? 영화에서 레즈비언 섹스를 연기하는 여성은 반드시 레즈비언인가? 과거 여성과 연애하다가 어느 순간 아이고 다 부질없다 현타가 와서 연애를 그만두는 여성이 있다. 그러면 이 여성은 더 이상 레즈비언이 아닌가? 노화의 결과로 성욕은 감퇴하고 새로운 관계를 맺고자 하는 열정도 줄어드는데, 그러면 죽을 때는 레즈비언이 아니게 되는 것일까. 심지어 망혼해 커뮤니티를 떠나는 이들도 우리는 이성애가부장제에 순응한 '레즈비언'이라 이해하지, 이들을 이성애자가 되었다고 설명하지는 않는다. (이와 같은 설명은 정치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성애중심주의라는 사회적 압력을 무시한 채 이성결혼 수행만으로 이성애자가 되었다고 인정해버리면, 탈반을 조장하는 기독교 혐오세력의 손을 들어주는 꼴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레즈비언은 단순히 비연애를 실천하는 것만으로 레즈비언이 아니게 되지는 않는다. 사람마다 레즈비언 범주에 대한 이해는 다르겠지만, 레즈비언 경험을 공유하며 스스로 여성을 사랑하는 여성이라는 의식이 있는 한, 비연애주의 레즈비언은 레즈비언이다.
비연애주의자 레즈비언은 커뮤니티에 남아 있기도 하지만, 커뮤니티에서 자신의 자리가 별로 없다고 느끼고 커뮤니티를 점차 멀리할 수 있다. 일단 이쪽 커뮤니티는 다양한 화젯거리를 이야기하기보다, 연애/섹스상대를 찾는 게 주목적인 사람들이 많고, 연애/섹스 관련글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친구로서 만나면 되지 않느냐 반문할 수도 있는데, 내 대답은 ‘글쎄’다. 애초에 우정과 연애감정의 경계가 그렇게 확실하게 나누어지는 건가? 역사적으로 연애하는 것처럼 로맨틱한 표현을 쓰며 우정을 나누던 여성들도 있고(블루스타킹) , 처음에는 그냥 친구로 지내다가 사귀게 될 수도 있다. 수많은 이성애자들이 여성과 남성은 친구로 지낼 수 없다고 믿듯이, 우리도 (잠재적으로) 그런 관계가 될 수 있음을 가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누구와도 연애를 하고 싶지 않은데, 친구로 만나고 싶은 여성이 자신을 (잠재적) 연애상대로 본다고 생각하면 아무래도 부담스럽지 않겠나. 그래서 이들은 자신을 보통의 레즈비언들과 이해관계가 다르다 생각하고 커뮤니티를 떠나고 일부는 아예 다른 지향성으로 재정체화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레즈비언 커뮤니티를 떠난 이 여성들은 어디로 가는가?이들은 비연애,비섹스를 지향하는 공간을 찾게 되는데 대개는 여성주의 기반의 일반 여성 커뮤니티로 유입된다. 그 이유는 첫째로, 여성 커뮤니티는 레즈비언 커뮤니티와 함께 폐쇄성을 공유하며, 레즈커뮤와 마찬가지로 여성전용공간이기 때문에 이들에게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다. 또한 지겹도록 연애글을 보다가 연애전시가 금지된 공간에 오면 자신을 포용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반면 무성애자 커뮤니티로는 잘 가지 않는데, 여성들이 독자적으로 분리주의 커뮤를 만들어 나오지 않는 한, 기본적으로 여성전용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최초의 무성애자 정의는 자위도 안 하는 무성욕자와 사실상 동의어로 쓰였으나, 지금은 섹스를 하지 않을 뿐 연애하는 사람들마저도 스펙트럼에 포함시켰기에 내부에서 동질감보다 차이를 더 많이 경험하는 것도 다른 한 가지 이유다.
이들이 커뮤니티를 떠나고, 재정체화하는 일은 레즈비언 집단에서 보면 소실이지만, 여성주의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성애를 엮거나 여성을 버리고 다른 무엇으로 정체화하지 않는 한 크게 부정적인 현상이라고 생각지 않는다.지금껏 크게 조명된 바 없는 래디컬 페미니스트 안의 무성애자들은 동성애를 탈이성애의 대안으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남성을 거부함으로써 레즈비언들과 함께 저항해 왔다. 또한 커뮤니티를 떠나는 것 자체가 곧 레즈들 일에 아예 관심 끊겠다는 뜻도 아니다. '나랑 외않자조'라면서 레즈비언에게 TERF 낙인을 찍는 트랜스젠더에게, 레즈비언 전용공간의 소실에, 여자 갈아먹는 남성중심 퀴어판에 분노한 건 비단 레즈들뿐만이 아니었다. 레즈비언 가시화의 날을 축하하던 사람들, 생활동반자법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레즈들뿐만이 아니었다. 조금 더 자신의 이해와 일치하는 공간과 언어를 찾아나선 이들을 납작한 시선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커뮤니티 안/밖을 이원화하는 편가르기는 단절을 심화시킬 뿐이다. 우리는 이해를 달리하면서도, 차이를 넘어 또다시 만날 것이다.
p.s. 분명히 나는 비연애를 지향하고 더 많은 여성들이 연애 강박에서 벗어나길 바라지만, 페미니즘은 레즈비언과 관계가 없다거나, 레즈비언이 미개하다 혹은 동성애를 강요한다 식의 혐오발언까지 용납할 생각은 없다. 물론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을 여성과 연애하라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도 포함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