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저는 트위터에 한번 정치적 레즈비어니즘 개념에 대한 정리 트윗을 타래로 엮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동시대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인 아드리안 리치의 개념과 함께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아래는 아드리안 리치의 강제적 이성애와 레즈비언 연속체 개념을 중심으로 정리한 카드뉴스로 개인 인스타그램에 우선 정리한 것들입니다. 내가 카드뉴스 다시 만드나 봐라

1부: 강제적 이성애 개념

2부:레즈비언 연속체 개념

3부에선 정치적 레즈비언으로 산다는 실제적 의미가 무엇인지, 레즈비언 집단과 이성애가부장제 사회와 함께 엮어서 다뤄 보았습니다.

 4부...까지 나오지 않길 바라나 만약 쓴다면 앞서 언급된 것들 외에 질문으로 구성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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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혜리(Hyeri Nam)

6B radical feminist,lesbian,liberal right-winger, atheist,contents 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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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Julia Penelope(줄리아 페넬로페)


역자: 남혜리 

원제: Heteropatriarchal Semantics and Lesbian Identity: The Ways a Lesbian Can Be

Julia Penelope, <Call Me Lesbian: Lesbian Lives, Lesbian Theory> (Crossing Press, 1992) 부분번역

원문 링크



서문

  지난 20년 동안 레즈비언 커뮤니티를 방해하고 망친 ‘이슈들’ 중 특히 한 가지, ‘여성성’은 레즈비언을 집결시키고 레즈비언의 입장에서 레즈비언 운동을 창조하려는 우리 노력을 무산시킬 가능성이 있다. 여성성을 수용하기 위해 되풀이되는 정당화 논리는 분노와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는데, 이성애 가부장제에서 레즈비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다. 레즈비언이란 ‘여성’이 되는 노력을 거부하는 사람, 그의 가능성을 제한할 남자들의 설명과 규정에 도전하는 사람, 이성애 가부장제 현실의 바로 그 기반을 거부하는 사람이다. 레즈비언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은 위기에 봉착했다.

  '립스틱 레즈비언', '삐쭉머리의 다이크' , 혹은 '팸'[각주:1], 그들을 뭐라고 부르든 이들은 우리 커뮤니티에 등장했으며 우리의 운동은 다양한 모습들 가운데 있다. 이들은 외모와 행동에 대한 우리의 지지와 승인을 요구하며, 주체적으로 메이크업을 하고, 하이힐을 신고, 가터벨트를 하고, 남자에게 박히고, 착취하고, 이용하고, 레즈비언들을 학대할 권리를 주장한다. 나같은 레즈비언이 그들의 주장에 반대하면, 이들은 우리를 욕하고 우리 삶을 폄하하며, 우리를 ‘억압자’라고 부른다. 간단히 말해, 이들의 아젠다는 레즈비언의 정치적 운동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피해자' 역할을 하고, 괴롭히고, 거짓말하고, 애교를 떨고, 조종하고, 명백히 멍청한 짓을 함으로써 말이다.

  나는 왜 어떤 레즈비언들이 레즈비언 '여성성' 미덕을 극찬하고 레즈비언 '남성성'을 공격할 때 정당하다고 스스로 확신하는지 이해를 못하겠다. '여성성'과 '남성성'을 레즈비언의 관점에서 의미있는 것처럼 사용하는 레즈비언에게 동의하기 어렵다. 여성성과 남성성은 이성애 가부장제(HP)의 단어이기 때문이다. 이성애 가부장제는 '수용가능한' '허락할 수 있는' 여성의 외모와 행동의 경계를 정하고, 그 여성에는 레즈비언도 포함된다. 이성애 가부장제의 의미체계(HS)는 생물학적 성별에 따라 행동과 성격이 결정된다는 듯이 여성성과 여성됨을, 남성성과 남성됨을 등치시킨다. 이 등식을 바탕으로 이성애 가부장제는 여성의 여성성과 남성의 남성성에 가치를 둔다. 이 체계에서 여성적인 여성만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지지만, '남성성'으로 불리는 것을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드는 것처럼 보인다. 결과적으로, 이성애 가부장제가 강요한 여성성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여성은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여성성을 답습하는 행동양식과 사고방식을 학습한 여성적인 여성은, 정의에 따르면 '인간'에 미치지 못한다. 대조적으로 '남성성'은 남자들의 문화적 경계를 설정할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는 이런 행동을 금지하고 동경하지 못하게 한다. '남자같이' 행동하는 여자들이 비정상적이고 '나쁘기' 때문에 여성성은 매력적인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여성성의 부속물이 본질적으로 자신을 이등시민의 지위로 제한할지라도, 여자들은 이를 기꺼이 몸에 익힌다. 이성애 가부장제의 언어에서 이는 그저 '바람직한' 선택지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체계에서 남성 헤게모니가 강요한 한계에 저항함으로써 평가절하당하는 것보다는 이등 시민의 지위를 받아들이는 편이 분명히 더 보상을 받는다.

  안타깝게도, 여성성을 적극 수용하고 극찬하는 이들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레즈비언들은 '억압자'라 공격당하고, '남자를 흉내낸다'고 조롱당하며, '파시스트'와 '네오나치'라는 낙인이 찍힌다. 이성애 가부장제의 이분법을 중요하게 받아들이는 레즈비언들은 우리가 거부하는 흑백논리에 갇혀 있다. 개인적인 것과 사회 변화를 위해 헌신하는 레즈비언들은 이성애 가부장제의 이분법과, 여성성에 가치를 두는 여성혐오로부터 우리 스스로 벗어나길 원한다. 뿐만 아니라 여성적, 남성적 같은 말로 강요당한 한계를 넘어서 사고하는 법을 배우고, 여성적이지도 남성적이지도 않으면 어떨지 상상하길 원한다. 

  이 작업을 시작하기 위해 먼저 질문을 해야겠다. “레즈비언의 관점에서 레즈비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내 생각에, 레즈비언이 어떻게 이성애자, 양성애자, 남게이와 다른지 확인하고 우리가 당하는 억압이 이런 차이에 기반한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에서 논의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흑인들이 그들 자신의 정체성을 백인 지배자와 완전히 다른 것으로 확립했던 것처럼,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자기 문화를 말살한 백인들이 정의내린 그 정체성을 거부했던 것처럼, 레즈비언들도 반드시 차이를 정체성의 핵심으로 삼아 남자들이 만들어낸 우리 정체성을 인정하는 자들에게 저항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고유하게 레즈비언으로 만드는 특징들로 정체화해야 할 것이다. 이는 어찌되었든 우리가 따돌림당하는 이유이다. 우리가 이성애 가부장제에서 태어나지 않고, 자라지 않았고, 살지 않은 체를 할 수 없듯이 이성애 가부장제나 그것의 가치를 무시할 수 없다. 우리의 사상과 가정의 기원이 이성애 가부장제란 사실 또한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확실히 이런 가치와 가정들을 잊어버릴 수 있으며, 그 첫 단계는 여성성과, 여성성이 우리에게 ‘좋다’는 사고를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가 여전히 '무엇이'에 대한 남자들의 설명을 타당하다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오늘날 레즈비언들은 여성성과 남성성 양극의 사이에서 여러 모로 고민하면서 이성애 가부장제의 이분법으로 분할된 상태이다. 다수의 레즈비언들은 심지어 우리가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를 상상하지 못했고, 이성애 가부장제 경계 바깥에 있는 선택지를 추구할 상상조차 못했다. 그들은 여전히 이성애 가부장제의 맥락에서 더(그리고 덜) 편하게 살아남을 방법에 사로잡혀 있다. 그리고 이 맥락은 이성애 가부장제의 언어로 설명된 세계를 진짜라 받아들이라고 요구한다.

 '여성적'이 될 것이냐, '남성적'이 될 것이냐에 대한 논쟁이 아니다. 레즈비언이란 존재가 뭘 의미하느냐에 대한 것이다. 레즈비언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레즈비언의 관점에서 레즈비언이 되고, 레즈비언으로 살고, 레즈비언처럼 생각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이성애자 여성, 양성애자들과 어떻게 다른지 확인함으로써 시작해야 하며, 우리의 일탈을 정체성의 핵심으로 삼아야 한다. 레즈비언은 남자랑 떡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남자를 삶의 중심에 놓는 걸 거부한 유일한 집단이다. 우리는 바로 여성에게 초점을 맞춘 삶을 사는 유일한 집단이다. 

  하지만 우리는 단일한 집단도 아니다. 레즈비언 정체성의 기반을 확립하기 위한 노력으로, 우리는 우리가 레즈비언 공동체에 가져온 생애사가 얼마나 복잡하고 상호작용에 혼란을 빚는지 끊임없이 직면하고 있다.  우리 개개인이 다른 경험과 배경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필히 레즈비언의 맥락에 끌어온 이성애 가부장제의 가정과 그 체제의 가치들을 명명하고 인식해야만 한다. [각주:2]서로를 갈라놓은 이성애 가부장제의 요소들로부터 벗어나게 되기 이전에 이 작업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여전히 내재된 이성애 가부장제의 태도에 대해서도 잊어버리기 전에 인지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두 가지를 해낼 수 있다. 인종차별주의를 버리는 백인 레즈비언들이 이 과정의 좋은 예이다. 나이주의적 태도를 버리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나로서는 여성성이 레즈비언의 상황에서 바람직한 가치가 될 수 있다고 생각지 않으며, 왜 여성성을 거부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레즈비언 운동인지 설명하고자 한다.



문제 확인하기

  레즈비언들은 우리가 타당하며 정확하다고 인정한 ‘세상의’ 설명으로 서로 분할되어 있다. 우리는 이성애 가부장제의 사고와 행동방식에 물들지 않은 상태로 레즈비언의 삶을 시작하거나 레즈비언 공동체에 들어가지 않았다. 우리끼리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많은 부분들은 남자들이 우리에게 소개한 현실 버전을 얼마나 온전히 신뢰하는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어떤 레즈비언들이 이성애 가부장제의 현실 서술이 본질적으로 정확하다고 믿는 반면, 다른 레즈비언들은 이 설명이 완전히 틀렸다고 믿는다. 어떤 레즈비언들은 이성애 가부장제의 현실 일부를 받아들이며 다른 레즈비언들은 이를 거부한다. 우리가 이성애 가부장제의 전제를 뒷받침한다는 사실은  영어를 사용하는 방식에도 반영되어 있다.


  우리가 제1언어를 획득하는 경험은 하나의 현실이 있다고 믿게끔 우리를 기만하고, 그 현실은 제1언어로 부호화되어 우리에게 전해진다. 많은 미국 레즈비언들이 영어를 제1언어로 배웠고 미국판 현실을 영어로 배웠다. 다른 여느 언어와 마찬가지로, 영어는 사회의 화자들 다수가 선호하는 형태의 현실을 설명하며, 그 화자들끼리 동의한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우리에게 강요한다. 미국은 이성애 가부장제 사회, 즉 이성애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전제하며 여성이 종속되는 것이 '당연한' 문화를 가진 사회이다. 영어는 이러한 전제들이 논의할 여지가 없는 사실인 것처럼 설명하는 수단을 화자에게 제공한다. 남성적, 여성적이라는 단어는 오로지 이성애 가부장제 현실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개념들을 설명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단어들이 존재하고 지속적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이 이 용어가 '현실' 혹은 실제적인 것을 의미한다는 뜻은 아니다.


  영어는 사회가 그 화자들의 경험과 인식을 부여한 체계, 개념적인 틀이다. 체계를 극복하는 방법, 이런 문화에서 인정받지 못한 가치와 인식을 표현하는 방법들이 있다 . 그러나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고 쓰는 데 투자하지 않을 일과 사상을 가져가는 것이다. 레즈비언이 이성애 가부장제 문화가 인정, 지지하고 수용하는  단어를 사용하는 한, 그는 영어가 설명하는 제한된 현실 속에서 이해, 해석될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우리가 영어를 사용하면서 완벽히 이성애 가부장제의 전제를 피할 수 있다는 생각이 레즈비언에게는 특히 위험한 망상이다. 

레즈비언 화자들에겐 ‘의미상의 문제’가 있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혼자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이는 우리가 영어로 사고하고 말하기를 배울 때 강요당한 것이다. (사투리도 별다를 바 없다고 본다.) 일부 레즈비언들은 아마도 우리 문제가 의미론적이라는 내 주장에 반발할지도 모르겠다. 이성애 가부장제에서 역기능적인 대화는 의미론이 상관없거나 '명백하다고' 생각하는 논점을 흐리는 이유인 양 “그건 단순히 의미상의 문제야” “그냥 의미에 대한 질문이네” “나랑 말장난하지 말자” 같은 표현과 함께 러그 밑으로 쓸려나간 말이기 때문이다. 나는 의미론의 중요성과, 우리가 더 면밀한 주의를 기울여야 함을 말하고자 한다. 우리는 의미체계가 자명하다는 이성애 가부장제의 주장이 사용되도록 받아들일 수 없으며, 의미체계가 우리 사이에 오해를 만드는 방식을 계속 무시할 수 없다.


  의미체계의 문제는 대개 우리가 수용하는 다양한 양상의 현실로부터 비롯되며, 같은 단어를 쓰는 것이 같은 것을 이야기한다는 의미라고 가정할 때 우리는 곤경에 빠진다. Linda Strega(린다 스트레가)의 <불티나게 팔리는 것- 레즈비언 여성성The Big Sell-Out: Lesbian Femininity>이 실린 <레즈비언 윤리학 Lesbian Ethics> 1985년 가을호와 Paula Mariedaughter(파울라 마리에도우터)와 Mary Crane(메리 크레인)이 그 분석에 응답한 1986년 봄호 사이에서 발생한 일이 의미 혼동의 좋은 예이다.[각주:3] 스트레가는 자신의 논문에서 레즈비언 사이의 차이를 언급하고자 부치와 팸을 사용하였는데, 이런 분류를 쓰는 게 레즈비언들의 관습이었으며 레즈비언 대중에게 의미있었기 때문이다. 스트레가는 부치란 단어를 기존의 뜻, 일부 레즈비언들이 사용하던 뜻과 다르게 사용하였다. 그 과정에서 그는 부치와 레즈비언을 섞어 쓰는 듯 보이면서 부치란 단어에 정치적 본질을 부여하였다. 하지만 부치와 팸은 우리 레즈비언 역사[herstory]로부터 의미체계의 방해물을 가져왔다. 과거 이 단어들의 의미와 마리에도터와 크레인이 사용한 방식은 스트레가가 원했던 방식은 아니었다.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 이들의 방식은 이들이 레즈비언 삶의 동일한 양상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스트레가가 가장 중요하게 다룬 한 가지는 레즈비언들 대부분이 남성적인 레즈비언들보다 여성적인 레즈비언을 훨씬 더 높게 쳐준다는 것이었다. 레즈비언 커뮤니티는 일반적으로 (평생) 남성적인 레즈비언들을 불신하고, 피하기까지 하는데 이는 우리가 (19세기 성과학자들이 선전했던) 20세기 ‘진짜 레즈비언’ 고정관념에 맞추려 하기 때문이다. 반면, 커뮤니티는 대조적으로 여성적인 레즈비언들에겐 귀를 기울이고 환영하는데, 이들이 이성애 가부장제의 ‘여성스러운 여성’의 전형을 충족하기 때문이다.[각주:4]

내가 볼 때, 우리 사이에서 남성성으로 여기는 것보다 여성성에 더 가치를 부여하는 일은 의심할 여지 없이  지독한 방식의 레즈비언 혐오를 반영한다. 왜 남자들의 이상에 순응하는 것이 여성적인 레즈비언들에 대한 더 깊은 신뢰로 이어지는가? 이는 계속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혼란을 이해하고 해결에 접근하기 위해, 우리는 영어의 이성애가부장적 의미체계 요소들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



성애가부장적 의미체계


  왜 레즈비언들은 이성애자들을 따라 여성적인 여성을 가치있게 여기고 '남자 같은' 여성을 폄하하는가? 그 해답은 영어의 의미론에 있다. 다이어그램 1은 '합의된 현실Consensus reality'이라 불리는 이성애중심적 가부장제의 의미체계에서 중요한 한 부분을 나타낸다. 합의된 현실이란 다수의 사람들이 참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진실인 양 행동하는 현실을 의미한다. 다이어그램은 어떻게 이 의미론적 '영역'이 우리의 장기기억에 저장되었는지를 시각화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이성애중심적 가부장제를 강요당한 우리의 경험을 나타낸 표이다.

  다이어그램 1의 대조표는 이성애 가부장제 버전의 ‘인간이란’ 무엇인지 나타낸다. 대조표에 의미를 부여하는이분법은 ‘우리’ 종의 많이들 아는 성별이형성sexual dimorphism을 바탕으로 한다. 즉, 호모 사피엔스에는 1,2차 성징에서 다른 특성을 나타내는 두 성별이 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상식선에서 이해하는 세상에 대한 부분적인 설명일 뿐이다. 예를 들어, 그 단어 자체는 성별 이분법에 기반한 합성어(헤르메스[+남성]와 아프로디테[-남성])지만 양성구유자는 세상을 설명하는 이 대조표가 불충분함을 드러낸다. 이런 설명은 모순되는 증거에도 불구하고 이성애가부장적 의미체계를 수호하려는 서투른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건 현실에 대한 설명이 정확하지 않으며, 단순히 그 성별이분법을 다시 가져오는 것으로는 현실의 양상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성별이형성은 이성애중심적 가부장제의 의미론, 정치학, 그리고 성격의 토대이다. 성격은 이성애중심적 가부장제에 따르면 생물학적 성별에 기반하고 있다. 생물학은 행동, 매너리즘, 외모, 감성 스타일, 그리고 개인의 사고방식을 결정한다. 이는 단일원인론적 이데올로기다. 성별이형성은 수많은 종이 사용하는 번식방법이나, 꼭 필요하지도 않고 거부할 수 없는 것도 아니며,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다른 번식방법보다 생물학적으로 우월하지도 않다. 우리 인간종을 포함해 많은 종은 단성생식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면 도마뱀, 물고기, 갈매기, 일부 식물종) 그러나 오직 인간만이 그 방법을 발명하고 완성한 것처럼 번식능력에 집착하는 것처럼 보인다.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생물학적 성이나 번식가능성이 성격의 기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전혀 당연하지 않다. 키,몸무게 내지는 점성술처럼 출생시각의 지구에 대한 천체의 위치로 성격을 분석하는 편이 차라리 낫다. (전통적인 점성술은 성별이형성을 성격유형에 대한 설명과 섞어버린다.)


  이성애는 다이어그램 1에서 명백히 나타나지 않는데, 이는 세상의 이성애 가부장제의 설명과 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성애 가부장제의 논리는 이성애가 필연적으로 ‘구멍 안 막대기 행동이론’ 혹은 “기능은 형태를 따른다”로 표현되는 성별이형성에 뒤따른다는 점을 가정한다.


1) 남자는 자지를,여자는 보지를 가지고 있다.


2) 자지는 보지 안에 쑤셔넣을 수 있다.


그러므로 자지가 존재하기 때문에 보지가 존재한다.


  특정 성기는 필히 정해진 방식으로 써야 한다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기능이 형태를 따르며 이것이 ‘자연스럽다’는  가정은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이성애자뿐만 아니라 레즈비언들도 이를 믿는 것은 놀랍지 않다. 이미 전제로 굳어져 바꾸기 어렵다. 우리 레즈비언들은 추방된 신분이므로 이성애에 문제제기하기 어렵다.  세상의 이분법적 시각에서 우리는 안티테제다. 



  이성애중심적 가부장제에서 이성애의 사고방식과 그 '자연스러움'은 논쟁거리가 될 수 없다. 그 체제는 여러분이나 내가 던지는 류의 '질문을 허용하지 않으며' 도전받아선 안 되는 것이다. 이를 의심한다면 차(혹은 자전거나 보드)에 "낙태가 범죄면, 떡치는 건 중죄다" 범퍼스티커를 붙여라. 여성이 임신중절 수술을 할 권리는 논쟁거리가 된다. 하지만 이성애 성교의 '필요성'은 그렇지 않다. 다른 문화들은 성별이형성을 다른 방식으로 취급하며, 이는 그 문화권의 언어에 반영된다. 나는 여기서 미 대륙에 영향을 준 문화에만 관심있다. 여성적이라서 얻는 특권을 부정하는 어떤 레즈비언들은 '문화상대주의'와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권으로 행동이나 의복양식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흥미를 갖는다. (Lesbian Connection 9, 1 [July/August 1986], p. 17) 나는 사리,[각주:5] 무무,[각주:6] 스코틀랜드 지방의 킬트를 입는 남자들에 대해 말하려는 게 아니고, 20세기 미국에서 치마, 드레스, 하이힐, 메이크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성애중심적 가부장제는 필연적인 가정인 이성애와 함께 성별이형성을 기저로 한다. 한 종을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는 것은 첫 단계일 뿐이다. 만약 개인이 생물학적 성별이 중요한 특성이라고 생각한다면, 개인은 그런 구분이 +남성/+여성 인식체계를 만들었다고 가정할 수 있다. 하지만 영어는 이 경우가 아니다. 그 대신 성별 이형성은 +남성/-남성으로 부호화된다. 영어의 인식체계에서 여성이 -남성이라는 것이 독자 여러분에게는 곧장 명백하게 와닿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설명한다.


  영어에서 남성은 규범, 표준의 위치를 차지하며, 여성은 비남성('타자')이다. 단어 쌍의 활용은 여성의 관점에서 명시적으로 수정되지 않는 한, 어떻게 남성됨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지를 보여주는 친숙한 예이다. 의사, 변호사, 예술가, 작가, 엔지니어, 외과의사, 조각가, 시장, 기수 등등은 남자일 것이라 생각한다. ‘여’의사, ‘여자’ 변호사, ‘여류’ 작가, ‘여자’ 조각가라고 라벨이 붙지 않는 한은 말이다. 이는 모든 유망 직종에서 성립한다. 대조적으로, 여성이라 여기는 직업에 그 종사자가 남성일 경우 분명한 수식어가 붙는다. 비서, 창기, 간호사. 이 직업들은 사회적 지위도 낮고 저임금이다. 남성이 이 직업군에 속하면 그는 남비서, 남창, 남간호사라 불린다. ‘모든 것의 척도인’ 남자에 대한 준일반pseudo-generic 남자, 대명사 he를 사용할 때도 마치 여성을 참조로 아우르는 것인 양 남성이 일반적이고 여성이 비정상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영어에서 모든 ‘사람들’은 특별한 조건이 없는 한 남성이라고 여겨진다. (우리가 스스로를 남성의 언어, 예를 들면 동성애자와 게이, 에 포함시킬 때 레즈비언들은 지워진다.)


  다이어그램 1의 가장 왼쪽 열은 이성애가부장적 의미체계의 ‘공간’을 생물학적, 기능적, 행동적이라는 세 개의 구체적인 수준으로 나눈다. 이런 순서로 배열한 이유는 이성애가부장적 의미체계에 내재된 논리가 각 수준 사이의 함의관계를 가정하기 때문이다. 개인이 (대개) ‘남성’ 혹은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을 고려하면, (프랑스어 femalle에서 비롯된 여성female은 남성male에서 파생된 것처럼 보이게끔 14세기에 어원적으로 재정의되었다.) 이는 개인이 남자 혹은 여자 구실(아버지 또는 어머니)을 한다는 생물학적 특성에서 귀결된 것이며, 이 역할 설명으로부터, 이성애 가부장제의 언어로 ‘남성적’ 또는 ‘여성적’인 개인의 행동은 필히 개인의 역할과 생물학-에 문화적으로 적합하다고 귀결된다. 개인이 여성으로 태어나면, 개인은 또한 본질적으로 여자고, 이성애가부장적 문화에서 여성이 된다는 건 필연적으로 '여성적'이고 '여자 같다'는 소리다. 이러한 함의관계는 ‘여성스러워지다’가 ‘여성이 되다’를 뜻하는 것처럼 사용될 때 두 단어를 영어에서 동의어로 만든다. 미국에서 여성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여성스러워진다는 뜻이다. 여성스럽지 않은 여성은 이성애 가부장제의 언어에서 수용될 수 없는 모순이다.


  대부분의 이성애자들, 그리고 레즈비언들은 영어의 의미체계가 서술한 현실의 설명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이들은 영어의 서술의 한계, 사실상 현실의 한계를 당연시한다. 개인은 남자거나 남자가 아니다. 남자는 비교의 척도다. 여성을 주로 공략하는 잡지 Savvy의 TV광고도 이런 전제를 보여주었다. " 직장에서 성공하기 위해 남자처럼 될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은 여성이 되기로 할 수 있어요." 이성애자들이 일부 레즈비언들을 계속 '선생님sir'이라 부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우리가 레스토랑, 주유소, 우체국, 그 외 다른 공공장소에 모습을 드러내면 우리를 대하는 누구든 체구, 몸무게, 키, 목소리, 몸짓, 옷차림, 머리길이 등의 '관련된 모습'을 스캔한다. 이러한 정보는 복합적인 성별분석을 제공하고, 사람들에겐 오직 +남성과 -남성이란 두개의 범주밖에 없기 때문에  +남성의 종합적 특성을 지닌 레즈비언들은 '선생님'이라 불리운다. 사람들은 우리를 레즈비언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그들은 개념지도에 신체를 대응시킨다. 1960년대 로큰롤은 이 작용하는 전제를 나타내었다.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만 있지" 마찬가지로,  다른 레즈비언을 '남자 같다', '남성적이다', '남자나 할 법하다'고 설명하는 레즈비언들은 이성애 가부장제의 현실을 정당화하고 다른 레즈비언들을 부정함으로써 그 체제의 가치를 우선시한다.


  행동적 수준(III)에서는 각 성별에 해당된다고 여기는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가장 많이 사용하는 형용사를 나열하였다. +남성/-남성 이분법의 중요성과, 이성애가부장제가 반드시 유지해야 할 경직성은 다이어그램 1에 두 가지로 분명히 드러난다. 첫째, '진짜 남자'와 '진짜 여자'를 포함시켰는데 이는 '거짓된' 남성과 여성이 있음을 전제한다. 즉, 퀴어들은 그 가능성이다. 이는 우리가 이성애 우월성을 강화하는 전제조건과 같이 의미론적으로 실현 가능한 한 가지 방법이다. 양 측의 표현은 수준 I, II,  III 사이에서 논리적 함의의 정확성을 가정한다. 만약 개인이 여성이면, 그는 반드시 이성애자이고 2세를 생산하고, 적절한, '여성스러운' 행동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징적으로 재현하지(그리고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으면 수준 II 나 III의 논리적 함의의 어떤 방식에서 그는 '진짜 여자'가 아니다. 그는 이성애 가부장제 체계의 논리와 상충되기 때문에 ‘다른 무언가’이다. 그는 무엇인가. 그는 자신을 여성 로봇으로 만드는[각주:7] 모든 시도를 거부하는 레즈비언이다! 어떤 이들은 이 레즈비언을 ‘부치’라고 잘못 부른다. (비록 과거 여성화에 저항한 많은 레즈비언들이 자신들을 ‘부치’라고 불렀지만)


  둘째, 마지막 한 쌍의 단어, ‘여자 같은/남자 같은’은이러한 의미론적 형태에 결부된 중요성을 보여준다. 두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이 체계를 부정 혹은 ‘침해’한다는 신호를 보낸다. ‘여자 같은’ 남자는 어떤 면에서 ‘여자처럼’ 행동한다고 여겨진다. 그는 화날 때, 좌절할 때, 혼란스러울 때, 몹시 슬플 때 아마 울 수도 있다. 그는 다리를 꼬고 앉을지도 모른다. 그는 땅에서 뭔가를 주울 때 허리를 구부릴 수도 있다. 뭐가 되었든 간에, 그는 이성애가부장적 의미체계에서 '부적절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남자 같은' 여성은 '선을 횡단함으로써' 이분법의 형태를 부정해 왔다. 그는 공격적이고, 금욕적이거나, 소극적일 수도 있다. 그는 머리를 '너무' 짧게 할 수도 있다. 그는 '너무' 키가 크거나, '너무 많이' 몸무게가 나갈 수도 있다. 그는 좁은 보폭 대신 넓은 보폭으로 걸을 수도 있다. 여성 범주를 부정한다고 독해되는 행동이 무엇이든 간에, '남자 같다는' 말은 "'너무 멀리' 가지 마", "너는 퇴출이야"라고 여성을 모욕하고 경고를 주는 목적으로 사용된다. 의미체계의 침해는 의미체계의 배제로 이어지고, 의미체계의 배제는 사회적 추방으로 이어진다.


  이성애가부장적 의미체계의 영역이 굳건히 유지되었기 때문에, 지난 10년간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양성성' 도입 시도는 실패가 예정된 것이었다. 첫째로, 이 단어는 그들이 대체하고자 한 '남성적/여성적' 이란 심리학적 이분법을 입증한다. 만약 두 개별적인 행동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하나는 남성의 자리고, 다른 하나는 여성의 몫이며, 결합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이미 존재하는 구별 없이 통합은 필요치 않으며 가능하지도 않다. 둘째로, 페미니스트들이 제안한 양성성은 수준 3, 행동적 수준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 그들은 이성애가부장적 의미체계가 서술한 것 같이 성격 특성, 행동 습관에 대해서만 말했다. 이 대체용어는 수준 간의 함의조건을 교란하거나 문제삼지 않으며, 확실히 성별이형성이라는 기반을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둔다. 끝으로 ‘체제 안에서' 변화를 장려하는 노력은 페미니스트들이 수준 1에서 시작하고 수준 간의 함의조건을 입증함으로써 수준 3에 침투할 때에만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하지만 이 전략 또한 '여자 같은/남자 같은' 형용사 쌍에 막혔다. 이 단어들의 탈락은 '남성적/여성적' 쌍이 수반하는 경계를 허물려는 시도를 가로막는다.


<레즈비언 분리주의: 분리주의 정치학의 언어학적, 사회적 근거들 Lesbian Separatism: The Linguistic and Social Sources of Separatist Politics>(1978)에서 나는 랜덤하우스 사전(1967)[각주:8] 초판에 등재된 womanly, mannish, manly, feminine, masculine의 정의를 나열하였다. 또한 나는 그 정의를 기술하고 어떻게 이 단어들이 나타내고 영속시키는 문화적 가치만으로 단어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는지 분석하였다. (단어는, 해당 언어의 발화자가 더 이상 그 단어가 설명하는 사상이나 대상을에 대해 말하려 하지 않을 때 쓸모없게 된다.) 거듭 말하겠다.  아래의 정의를 읽고, 여성성은 레즈비언들이 ‘개량’해야 할 무언가인지 답을 구해보길 요청한다. 이 사전적 정의들과 문화적 의의에 대한 내 분석이 다른 레즈비언들로 하여금 우리가 바라는 의미대로 단어가 사용되진 않는다(험프티 덤프티처럼)는 걸 깨닫는 데 자극이 되길 바란다.[각주:9] 문화의 핵심적인 가치와 태도를 반영하고 새기기 때문에 단어는 존재하고 만들어진다. 단어는 쓸모없어지면 쇠퇴한다. 레즈비언이 이성애 가부장제의 가정을 전달하는 단어를  쓸 때마다, 그는 단어의 수명을 늘리는 셈이다. 예상가능한 대로, 각 단어의 '실제 의미'는 그 반의어의 정의에서 밝혀진다.  


여자다운 – 여자 같거나 여자에게 어울리는; 여성적인; 남성적이지 않은/소녀 같은. 여자답다는 것은 여성에게 적절하고 어울리는 면에서 유사함을 암시한다. 예) 여자다운 단정함, 겸손함


남자다운 – 남자에게 바람직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예) 강한, 용감한, 명예로운, 단호한, 박력 있는. 남자답다는 것은 존엄성, 정직함, 솔직함과 같이 남성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가치있거나 바람직한 속성을 소유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비굴함, 불성실함, 부정직함 등등과 반대되는 것. 또한 힘, 용기, 꿋꿋함을 암시한다;


여성적인- 성인 여성이나 소녀에게 따라다니는 것: 여성적인 아름다움, 여성적인 드레스. 여자같은; 연약한; 친절한


남성적인- 남자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남자다운; 박력있는; 강한; 도전적인; 남성적인 목소리. 남자(들)에게 따라다니는 것이거나 남자(들)의 특성: 남성적인 의상


남자 같은- 남자를 따라하는 것에 적용한다: 여성에게 쓰인다. 이 단어는 경멸적이며, 남성적인 특징을 가진 변종임을 암시한다(중요)


  남자다운, 남성적인 아래에 나열된 속성들(강한, 용감한, 결단력 있는, 정직한, 위엄있는 등등..)은 개인이 추구할 만한 '좋은' 것들임을 알아챘을 것이다. 남성됨maleness에서 주로 기인하는 여러 부정적인 속성들 중 어느 한 가지도 열거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공격적인, 폭력적인, 속이 좁은, 자기중심적인, 방어적인, 자주 위험에 처하는, 고압적인, 자지에 집착하는, 오지랖 넓은, 약탈적인, 미숙한, 의존적인, 기빨리게 하는, 텃세부리는, 이기적인, 전쟁광 같은 특성들은 어디로 갔나? 도대체 어느 사전에서 남성성의 그러한 속성들이 나열된 걸 찾아볼 수 있단 말인가?


  대조적으로, '여자 같은, 여성적인'이란 형용사는 제대로 정의되지 않았다. 부디 읽어 보시길, 당신이 거기서 뭔가를 발견하리란 기대는 하지 말고. 돌고 도는 '여자다운'의 유사 정의와 비교하며 '남자다운'의 정의에 길게 나열된 특징들을 꼼꼼히 살펴보아라. "여자 같거나 여자에게 어울리는" 그건 정의가 아니다. '여자 다운'의 제대로 된 정의는 '남자다운 특성'의 '반대항'으로서 ‘노예 근성, 불성실함, 비밀스러운 등등’임을 암시한다. ‘여성적인’ 아래서 형용사 두 개, 연약한과 친절한을 끄집어냈다. 그거다. 주로 여성과 관련된 긍정적인 속성들, 예를 들면 보살피는, 친절한, 다정한 같은 것들은 생략되었다. 그런형용사들은 사전에 기록되지 않았다.  말할 것도 없이 성별 이형성과 그 가정을 드러내는 형용사는 성격이론처럼  누구든 강하고 친절할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이 두 가지와 다른 특성들은 ‘반의관계’가 아니며, 따라서 상호배타적이지도 않다. 이성애 가부장제의 현실 설명만이 그렇게 보이게 한다. 

  
  레즈비언들은 '여성성'을 옹호할 필요가 없고, 온화하고 친절하다 느낄 필요가 없고, 직물에 관심있거나, 여성 혹은 '팸'과 관련있는 어떤 성격을 갖추려 할 필요가 없다. 이성애가부장적 이분법을 지지하지 않고서도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뭐든지 할 수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레즈비언들은 자전거타기, 소프트볼, 자동차 수리, 오토바이 타기, 건축업에 종사하는 것을 즐길 수 있다. 스스로를 '남성적'이라 하거나 '부치'로 칭하지 않고도 남자들에게 적대적일 수 있다. 이상형을 설명하려고 그런 라벨을 받아들이는 건 함정에 빠지는 일이며, 이성애 가부장제의 이데올로기가 레즈비언의 입장에 들어맞는 것처럼 영속시킨다.

   '남자 같은'의 정의는 우리에게 결정타를 날린다. "남성적인 특징을 가진 변종" 정직한/강한/당당한/ 솔직한/용감한 여성은 돌연변이인 것처럼 기술했다. 남자들은 자기들을 위해 바람직한 속성을 기록해 두었다. 반면 여성은 연약하고, 온화하고,  불성실하고, 노예 근성이 있고, 비밀스러운 게 어울린다. 정직한,솔직한,당당한, 용감한 혹은 단호한 여성은 '변종'이다. 즉, 남자 같다. 이성애가부장적 의미체계의 논리는 여성으로 태어나 체제의 이분법을 거부하는 여성, 여성적으로 행동하길 거부하는 여성을 의미론적인 기본값에 따라 '남성적'이란 라벨을 붙여 '적절한' 방식으로 기술하게 한다. 분명하게 -남성이 아닌 사람들은 +남성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론적 속임수는 이성애가부장적 의미체계가 행동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나, 그 체제가 하는 일이란 레즈비언의 본래 상태를 희생시켜서라도 이성애 가부장제의 합의된 현실을 지탱하는 것이다. 레즈비언들은 이성애가부장제의 언어를 의미있는 것인 양 그만 사용하는 게 너무 늦었다. 여성성을 옹호하고 다른 레즈비언을 '남성적'이라며 남자랑 비교하는 레즈비언은 죄다 이성애가부장제의 '합의된 현실'을 지지한다.




레즈비언이 존재할 수 있는 방식

의미론적 체계의 목적은 의미를 생성하는 것이다. 의미론적 체계 없이 의미는 존재할 수 없다. 레즈비언은 이성애가부장적 의미체계에서 '무의미한' 존재이므로, 우리는 우리 존재가 중요해지는 의미체계를 구성해야 할 것이다. 미국에서 우리는 규범으로 알고 있는 유일한 의미체계, 이성애가부장적 의미체계에 종속된다. 내가 커밍아웃한 1950년대 게이 커뮤니티에서도 레즈비언들이 '부치'와 '팸'으로 깔끔하게 나눠지지 않는다는 암묵적 인식이 있었다. 우리는 나아왔기 때문에 화해해야만 하고, 극단을 정의하고자 한 결과로 단어 연속체에 이성애가부장적 이분법을 사용해도 여전히 행동의 범위는 인식되고 꼬리표가 붙여진다.  다이어그램 2는 이 행동에 관한 연속체를 나타낸다.

[각주:10]

 

  다이어그램 2에서는 1950-60년대에 내가 아는 레즈비언들끼리 쓰는 행동에 관한 라벨을 보여준다. 이 라벨들은 어떻게 우리가 연속체에 대한 인식을 표현하는지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이 용어들 중 상당수가 여전히 오늘날까지 쓰이고 있다. 우리는 우리 존재를 지우는 이성애가부장적 언어에서 의미를 가지게끔 의미체계를 구성했다. 이는 우리를 ‘레즈비언’이라 정의하는 이성애가부장적 의미체계의 생물학적 수준과 기능적 수준 간의 함의관계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이성애가부장적 의미체계가 정의한 대로 성별 행동특성의 타당성이라 받아들였으며 스스로 어딘가에 '맞추고자' 했다. 다이어그램 2는 레즈비언들 사이에서 인식된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일관적이고 뜻이 분명한 의미체계를 구성하고자 하는 하나의 시도를 나타낸다. 우리가 다양한 행동을 인식했고, (전혀 과장하지 않고) 이를 구분하는 경계가 흐릿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성격 설명서인 이성애가부장적 의미체계의 기초적인 이분법에 묶여 있었다. 우리는 부치와 팸이라는 가장 일반적인 단어를 의미있는 것처럼 사용했다. 우리는 사회적 맥락에서 중요해 보이는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그 단어로 자신을 설명했다. 


  하지만 과거와 현재 레즈비언들 사이의 역할 논의에서 전천ki-ki은 무시되었다. 이 사람들은 그 라벨과 함께 사라졌는데, 가장 최근의 논의들은 개인이 필연적으로 둘 중 하나인 것처럼 양 극단에만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정확하지 않고, 현재도 공평하지 않다.[각주:11] 나는 이 부분에 주목하는데, 이 단어는 내가 말할 수 있는 한 거의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제 2물결  페미니즘이 레즈비언 해안을 강타했을 때 전천은 사라졌는데, 페미니스트가 된 레즈비언들 사이에서 일시적으로 무의미해졌기 때문이다.(페미니스트가 아닌 레즈비언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사용할지도 모르겠다.)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들은 이성애 역할, 남성의 억압, 성차별주의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분석을 수용했고 부치/팸 역할, 레즈비언들 사이의 ‘성 역할’에 적용하여 ‘정치적으로 타당하지 않게’ 만들었다. 존 네슬이 지적했듯[각주:12] 우리는 과거와 정체성, 전통의 많은 부분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과거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과거에 정직한 것은 지금도 그 전제들이 실행가능하거나 실행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나는 스스로 부치도 팸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레즈비언들을 부르는 말이라서 전천이란 단어를 포함시켰다. 그들이 선택한 '역할' 은 섹스하는 상대에 따라 달라진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들을 고를 사람들에게 역할이 유효해진다고 단언했는데, 스스로 선택하는 건 거부했다. 그들은 '제약당하기' 싫어했으며, 일부는 '역할을 맡은' 레즈비언들이 나쁜 선택을 했다고 여겼다.

개인은 ‘예전에’(겨우 한 20년 전에), 다이크와 불다이크(흑인들 사이에선 불대거bulldagger)가 레즈비언 하위문화 안팎에서 전적으로 멸칭으로 사용될 때  ‘전천’일 수 있었다. 레즈비언이 외모나 옷차림, 행동에서 대놓고 ‘남자 같을수록’ 이성애자와 레즈비언들을 더 부정적인 꼬리표를 그에게 달았다. 자기 스스로 ‘부치’라 하는 것은 옷차림을 포함해 개인의 신체적 외모와 관련지을 수 있으나 항상 그렇지는 않다. 나는 매우 ‘여성적’으로 보이고 여성적인  ‘부치들’ 을 많이 알고 있고, 우리는 그들을 ‘넬리 부치nelly butches’라고 불렀다. ‘부치’는 외모가 아니라 성행위를 기준으로 이름붙여진다. 내가 아는 자칭 부치는 대단히 여성적이었다. 사실 그는 헤녀het[각주:13]뿐만 아니라 콜걸, 부잣집 마님으로도 통할 수 있었다.

  지금의 논의로부터 상당히 동떨어진, 내가 분명히 기억하는 또다른 1950-60년대의 레즈비언들은 스스로를 무엇으로도 명명하지 않았다. 그 당시에도 부치/팸/전천으로 자신을 설명하지 않는 레즈비언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든 역할을 거부했다. 더 나아가, 이들은 역할놀이를 하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았고 대놓고 그런다고 말했다. 과거 그 당시에 레즈비언 하위문화에서 이들은 주류였을지도 모른다. 혹은 절반을 차지했을지도, 아니면 역할극을 하는 레즈비언들이 주류였을지도 모른다. 내 기억력으로는 수량화할 수 없다. (아마 개인이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인 바에 따라 다를 것이다. 혹은 개인이 바에 오는지의 여부에 따라서도 달라질 것이다. 나는 자주 바를 찾는 소수의 레즈비언들을 아는데 이들은 역할 고정관념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60년대 말, 여성 중심적인 정치적 분석과 함께 레즈비언 사이의 역할극은 '퇴출'되고, 역할에 따른 행동구분을 버리는 풍조가 '들어왔다'. 그러나 나와 당신,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처음부터 다른 레즈비언들 사이에서 페미니즘과 그 분석의 영향력을 거부하는 레즈비언들의 숫자는 어마어마했다. 본래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대로 행복하고, 바뀔 생각이 없고 변화를 원하지 않아. 그리고 당신들(=레즈비언 페미니스트들)은 우리를 변화시킬 수 없어. 끝." 이런 대화는 레즈비언 '커뮤니티'에서 오직 한줌인 우리끼리만 전달하고 여전히 그러고 있다. 대부분은 침묵하는데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거나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삶의 정치적 의미에 대한 레즈비언의 자기인식이 향상되면서 , 과거 멸칭으로 사용되던 단어들을 교정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 중에 다이크도 있었는데, 이 단어가 대단히 경멸적인 낙인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이 연속체 끝 '남성적인'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건 이성애 가부장제 버전 현실 탓이지,  다이크가 되는 데 타고난 조건 따위는 없다. 주어진 이성애 가부장제 이분법에서 여성성 '개량'은 적절하지 않은데, 여성성이 이성애 가부장제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만약 레즈비언들이 이성애 가부장제 범주가 '자연스럽지' 않다고 부정한다면, 그리고 우리 일탈을 긍정한다면, 여성성 선택은 전혀 말이 안된다. 지금까지 다이크란 용어를 긍정적으로 사용한 우리의 노력은 자주 '높은 정치적 의식화'와 등치되며 아직 대다수의 레즈비언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른 레즈비언들은 팸부치 역할을 '개량'한다고 말하는 반면, 앞서 말했지만 전천은 쓸모없게 되었다. 우리는 아직 불대거와 불다이크를 재전유하지 못했다. 우리가 분명히 말하지는 못했으나 좋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레즈비언 정체성의 위치란?


  의도는 좋았는데, 어떻게 레즈비언들은 완전히 상반되는 맥락에서 지속적으로 쓰고 독해할까? 예를 들어, 왜 사브리나 소저너(Sabrina Sojourner)가 여성성을 '개량'하는(Sojourner, 2월, 1991) 동안 왜 잰 브라운(Jan Brown)은 부치였을 때 경험한 여성혐오를 폭로했나?(Out/Look 7:30-34) 이때까지 나는 정치적 의식화와 오픈리 레즈[각주:14]~벽장[각주:15]의 연속체라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를 아직 언급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레즈비언들이 페미니스트냐 아니냐에 따라 이성애 가부장제, 더 정확히는 우리의 가치체계에 통합시킨 페미니즘 브랜드와 충돌하는 상상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상상을 '정치적 의식화'라 부른다. 

  일부(대다수라고 하고 싶다만) 레즈비언들은 이성애 가부장제에 순응하여 살고 있으며 이 사회를 그렇게 명명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그들 자신이 이성애자와 별로 다르지 않으며, 자기들의 불편함을 설명하기 위해 그저 가장 기초적인 분석을 할 뿐이다. 다른 레즈비언들은 스스로를 이성애 가부장제 경계 바깥에 있는 존재, 이성애자들과는 꽤 다른 존재로 생각하고 이성애가부장적 사회를 흉내내거나 비추는 어떤 사고나 행동양상도 대단히 불신한다. 레즈비언들은 '합의된 현실'을 공유하지 않는다. 그 말인즉슨, 아직까지 우리가 결정하고 조건을 평가하는 체계에 대해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성애가부장제 하에서 레즈비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스스로 만들어낸 설명이 없으며, 그 결과로 특정한 행동유형에 대해 다양한 가치판단이 존재한다.  레즈비언으로서 자신이 이성애 가부장제 사회에 대해 생각하는 면에 따라 이성애가부장적 서술에 대한 자발적인 도전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많은 이들이 시도했으나, 어떤 레즈비언도 이성애 가부장제를 무시하거나 없는 취급을 할 수 없다. 우리 중 누구도 우리의 삶이나 우리의 사고방식에 미치는 체제의 영향력을 부정할 수 없다. 이성애 가부장제를 부정하거나 어찌됐든 우리가 이를 비껴나간 사고를 했다고 주장하는 건 레즈비언인 우리에게 이성애 가부장제가 입힌 피해를 사소한 것처럼 만든다. 이러한 자아개념들은 서로 충돌하며, 조화될 수 없다. 타협하고 싶어도, 이런 의견 차이에 타협할 수 있는 '중간 지대'는 없다.

  논의를 위해 이성애가부장제 사회를 원이라고 생각해 보자. 계발과 인식의 여러 단계에서, 이성애가부장제에 대해 레즈비언인 그의 위치는 레즈비언의 삶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를 기반으로 정해진다. 다이어그램 3은 이성애 가부장제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레즈비언이 취할 수 있는 6가지 입장을 나타낸다. 보수주의자, 전통주의자, 휴머니스트, 페미니스트, 래디컬 페미니스트, 그리고 분리주의자. 이 연속체에 찍힌 각각의 점들은 개략적으로 나타낼 뿐 완전히 구분된 정치적 입장은 아니다. (독자들이 이해하기 좋게 이 전문용어들을 사용했다.)

  보수주의자 레즈비언들은 이성애가부장제의 현실에 대한 설명을 정확하고 모두 포괄하고 있다 여기며, 그들은 이성애가부장제가 정해놓은 것들이 불변하는 사실인 것처럼 살아간다. 이런 레즈비언들은 대개 백인이며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대도시 근교에서 산다. 그들의 사고방식에 대해 말하자면 가까운 이성애자들과 거의 구분이 불가능하다. 이들은 스스로를 ‘레즈비언’이라 생각지 않으며, 대부분의 친구들은 아마 이성애자일 것이다. 수많은 보수주의자 레즈비언들은 이성애자로 살았던 적이 전혀 없고 또 그래야 하며, 삶의 어떤 부분에서는 본질적인 이성애 가부장제의 가정을 거부하지만, 이런 사실은 이들에게 전혀 정치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뼈레즈never-het[각주:16]’거나 벽장이다. 그들은 ‘세상’이 있는 그대로 좋다고 믿는다. 이들에게 필요하거나 바람직하다 느끼는 사회적, 개인적 변화란 없다.

  전통주의자 레즈비언들은 스스로를 '게이'나 '레즈비언'으로 부른다는 점에서만 보수주의자들과 다르다. 이들의 교우관계는 이성애자에 더해 죽이 잘 맞는 레즈비언,남게이, 그리고 적극적인 활동 대신 게이들에게 후원할만한 여유가 있는 일부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뼈레즈거나 구 헤녀였을 것이나, 이들은 동성애 혹은 '게이 정체성'을 숨긴다.

  휴머니스트 레즈비언들은 "우리는 모두 인간"이며, 이성애가부장제가 여러 측면에서 억압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레즈비언으로 사는 것은 이성애자로 사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고 믿는다. 이들은 “이성애자들이 레즈비언과 자기들이 ‘그저 똑같은’ 존재임을 알아차릴 때 레즈비언들이 겪는 억압도 끝나리라”고 이성애가부장제의 강압성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 휴머니스트 레즈비언들의 정치 의식은 소비자중심주의, 반전쟁, 반핵 운동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 그들은 열대우림, 돌고래, 판다,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들을 구하기 위해 헌신한다. 그들은 에이즈 위기전화 혹은 미국 자선단체 United Way를 위해 자원봉사자로 일할 수도 있는데 이는 이성애 가부장제와 자신들이 결부된 것처럼 정치적 사안의 결과와 이해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전통주의자 레즈비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어떤 경제적 계층에도 속할 수 있다. 이들은 구 헤녀였거나 뼈레즈일 수 있으며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을 하거나 벽장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의 삶이든 이들에겐 정치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이들의 동성애는 정체성의 본질적인 요소는 아니다. 휴머니스트 레즈비언들은 이성애 가부장제에 결함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가장 중요한 가정들에는 문제제기하지 않은 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회구조를 개조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페미니스트 레즈비언들은 여성억압으로 스스로 정체화했으며 그들은 정치적 행동에서 여성문제에 초점을 맞췄다. 예를 들자면 이들은 강간위기전화, 매맞는 여성 쉼터, 낙태클리닉에서 일하거나 여성학을 가르칠 것이다. 그들은 여성이 이 사회에서 억압받는다는 사실을 정확히 발견하고, 자기들이 이해한 대로 억압에 저항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일한다. 이를테면 오직 일부만 남자들이 적이라 생각하고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이들은 레즈비언으로 겪는 억압을 여성이라는 이유에서 찾는다. 이들은 여러 수준에서 이성애 가부장제의 구조를 바꾸기 위해 헌신한다. 이들은 이성애 가부장제의 본질적인 가치와 범주들 중 몇 가지에 문제제기한다. 그러나 이들에게 있어 이성애는 의심할 바 없이 주어진 것으로 유지된다.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의식은 구 헤녀, 뼈레즈, 벽장, 오픈리 레즈들에게 가능하다.

스스로 래디컬 페미니스트라고 하는 레즈비언들은 페미니스트와, 이성애가부장제가 설명하는 현실의 극한인 분리주의자 레즈비언 사이의 어딘가에 자신을 둔다. 이들은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경험하는 억압을 레즈비언의 특수한 억압이 아닌 여성억압이라 밝히고, 다른 한편으로 남자들이 모든 여성의 적이라 믿고 어떻게 이성애 가부장제 사회가 자체적으로 유지되는지에 대한 최고의 분석들을 발굴하며, ‘가부장제’를 파괴할 다양한 방법들을 제안해 왔다. 이들이 레즈비언으로 먼저 정체화하지 않긴 했지만, 이들은 레즈비언들이 이성애 가부장제에 가하는 위협을 이해한다. 이들은 ‘가부장제’를 이성애 가부장제라 밝히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분리주의자 레즈비언들은 우리 스스로를 이성애가부장제 사회의 외부에 산다고 생각한다. (실제와 거리가 먼 이야기지만) 이성애 가부장제의 설명이 레즈비언들을 버린다고 이해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성애 가부장제와 대립하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고, 우리 자신을 완전히 레즈비언으로 인식하는 건 분리주의자들이다. 뼈레즈든 구 헤녀였든 분리주의자들은 레즈비언을 우선 정치적으로 분석한다. 분리주의 정치학의 정수는 이성애가부장적 구조에 필수적인 모든 것들을 거부하는 것이며, 이는 체계의 모든 가정에 문제제기와 검토를 필요로 한다. 휴머니스트/페미니스트 레즈비언들이 자기들이 느끼는 감정에 호소하면 행동과 태도를 정당화할 수 있다고 보는 반면, 분리주의자들(그리고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이 '감정'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고 싶어한다. 우리는 어떻게 느끼는지에 대한 분석을 그만둘 생각이 없는데, 감정에 호소하는 건 변화를 반대하는 하나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스스로를 바꾸고 이성애 가부장제 버전의 현실을 잊어버리려 한다면 우리는 우리 감정을 면밀히 살펴보고 왜 우리가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밝혀내는 데 전념할 것이다.


레즈비언 중심적 의미체계를 향하여


  레즈비언들이 다양한 배경과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같은 단어를 다른 의미와 가치로 사용하는 한 우리 사이의 의사소통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논쟁을 멈춰서는 안 된다. 논쟁과 토론을 계속하는 동안에도 우리는 다른 방식의 말하기를 필요로 하고, 최소한 우리가 쓰는 의미가 많은 부분에서 다르다는 인식을 표출한다. 우리는 아직 영어로 문제해결을 시작하지 않았다. 레즈비언 사이에서 여성성에 대한 논쟁과 그 효과가 설명하듯이, 우리는 '합의된 현실'이 없으며, 레즈비언 윤리를 세우려는 어떠한 시도도 이성애 가부장제가 설명한 현실의 논쟁에 자주 부딪혀 그 현실로 돌아간다. 왜 레즈비언들은 레즈비언 분석에 그렇게 빨리 반발하고 이성애 가부장제의 분류를 수호하는가? 왜 수많은 레즈비언들은 이성애 가부장제의 분류에 순응하는 걸 변호하면서 자기들이 조롱삼아 말하는 '레즈비언 순응성Lesbian conformity'에 반대하나? 어디서 이런 전도(顚倒)가 발생했고 누가 그걸 제공하나? 레즈비언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성애 가부장제 바깥이나 경계에 살고자 하는 레즈비언들에게 있어, 그들에 대한 우리 태도나 그런 행동에 결부시킨 가치들은 상당히 변해왔지만, 레즈비언 내에서 볼 수 있는 행동의 다양성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어떻게 불일치를 넘어 의사소통해야 할까? 나는 레즈비언이 취할 수 있는 네 가지 선택지를 찾아냈다. (높은 확률로 더 있을 것이다.)


1.  우리는 어떤 레즈비언들이 그러하듯 이성애 가부장제가 정해놓은 남성적/여성적 이분법에 따른 가치를 받아들일 수 있고, 우리 삶에 지속적으로 그 단어들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2. 우리는 여성성을 '긍정적인' 것으로 '개선'할 수 있다는 레즈비언들처럼 이성애 가부장제가 만들어 놓은 가치를 역전시킬 수 있다.

3. 우리는 지금처럼 아무 목적 없이 지낼 수 있다. 때로는 '남성적인' 행동에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때로는 여성적인 행동에, 때로는 동의하면서. 

4. 우리는 이성애가부장적 의미체계 전체를 거부할 수 있다. 이성애가부장적 의미체계의 경계와 언어 바깥으로 멀리 나가서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의 의미체계를 구성할 수 있다. 


  처음 세 개의 선택지는 이미 레즈비언들이 선택한 길이다.  개인이 남성적 행동/외모에 가치를 두든 여성적 행동/외모에 가치를 두든, 혹은 둘 다 아니든 그는 분명히 다이어그램 3의 연속체 위에  자신을 두게 된다. 그 논리를 받아들이면 이건 '말이 된다'. 많은 레즈비언들은 이성애가부장적 의미체계가 만들고 정당화한 용어를 바탕으로 정체성을 구성해 왔다. 이들은 그 정체성에 집중했고 어떤 분석이든 그 정체성을 문제시하는 것은 혐의가 있다.

  만약 이성애가부장적 의미체계, 우리 존재를 유효하게 만들기 위해 어떻게 우리가 구조를 바꿔 왔는지에 대한 내 분석이 정확하다면,  나처럼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은 4번: 우리가 누구인지 설명하는 새로운 의미체계를 만드는 것을 실천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을 것이다. 이는 4가지 중 가장 힘든 선택지이다. 이는 우리를 혐오하는 세상 가운데 레즈비언인 우리는 누구인가?에 대해 달리 생각해야 함을 뜻한다. (타당한 이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레즈비언은 이성애가부장제의 합의된 현실이 자의적임을 폭로한다. 우리는 실재함으로써 개념체계를 금가게 하고 그 체계가 그래봤자 불완전하다는 걸 보여준다.) 

  시작하는 이들에게 제안한다. 이성애가부장적 의미체계와,  '남성적인', '부치/팸'을 포함해 그 체계에서 파생된 라벨까지 내던져버려라. 말은 쉬우나 행동은 어렵다. 수많은 레즈비언들이 '여성성'은 '여성'으로서 타고난 특성이며 여성성이 성공할 수 있는 레즈비언의 생존방식이라 주장하기 때문에,  우리가 여성적이란 라벨을 무시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이들은 여전히 이성애 가부장제가 설명한 현실에 집중하고 있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이상 사회에선 레즈비언이 드레스를 입든 청바지를 입든, 하이힐을 신든 부츠를 신든, 치장하든 말든,  머리가 길든 짧든, 손톱을 기르든 말든 상관없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아니다. 이성애 가부장제에서 '여성성' 딱지가 붙은 행동과 외모 양상은 우리에게 해롭다. 우리는 여전히 이성애 가부장제 하에서 살고 있고 남성이 만들어낸 여성의 행동규범을 자신의 삶에 적용한 레즈비언들은 이성애 가부장제 버전의 현실을 받아들였다는 신호를 보낸다. 더 나아가, 그들은 계속해서 레즈비언들, 정체성을 고수하기 위해 이성애 가부장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들을 희생시키며 차별대우를 받아들일 것이다. 
 
  레즈비언들은 크고 적대적인 이성애 가부장제 사회의 맥락에서 우리 스스로를 지키는 하위문화이다. 우리가가 뭘 입으려 '선택'하든, 어떻게 보이길 선택하든, 우리를 전혀 모르는 누군가가 이성애가부장적 의미체계에서 그런 선택들을 해석할 것이다.우리는 어떻게든 이성애가부장적 범주의 존재와 그 영향을 알아야 하고, 알면서 그런 분류가 유효해지고 '참'으로 인정받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잊어버리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레즈비언 여성성이 정치적 의미를 잃어버렸으며 지위를 손상시킨다고 보는데, 여성성에 가치를 두는 레즈비언들이 '남자 같다', '남자처럼 행동한다' 소리를 듣는 레즈비언들을 옆으로 밀어내고, 소외시키고, 버렸기 때문이다.

  어떻게 우리 사이의 상당한 차이, 관찰가능한 다양한 행동을 이성애 가부장제의 전제를 수용하지 않고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 과거에 부치, 팸, 전천이란 라벨은 우리 내부의 행동양식의 차이를 인지하고 이에 대해 말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이었다. 그리고 레즈비언 하위문화의 어떤 부분에선 여전히 그 목적을 달성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를 이성애가부장적 의미체계의 전제가 아닌 언어로 새롭게 정의하고 싶은 사람들은 분명히 스스로를 설명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며, 그 방법은 때때로 이성애가부장적 의미체계와 그 체계의 가치를 피하기 위해 길어질 수 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세상'에 대한 완전히 다른 설명, 레즈비언의 경험과 인식에 기반한 설명을 시작할 필요가 있다. 레즈비언들이 아직 '합의된 현실'에 도달하지 못했으므로, 우선 정치적으로 활동하는 레즈비언들 사이에서만 이런 대화가 이루어진다는 점을 이해하도록 하자. 레즈비언의 입장에서 서로 이야기하는 방법을 찾아보자. (이는 우리보다 남성을 선호하는 이성애자들만큼 레즈비언을 혐오하고 여성혐오적인 보수주의자 레즈비언들과 뼈레즈들을 무시할 수 있게 한다.)

  린다 스트레가가 제안했듯이, 자신을 여성적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거부한/하는 레즈비언들을 가치있게 여김으로써 우리는 뜻 깊은 출발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이성애 가부장제의 현실로부터 이탈한 것에 자긍심을 가지고, 이성애 가부장제의 설명과 가치에 순응하는 레즈비언 여성성을 긍정하지 않으며, 여성적이지 않은 레즈비언들을 긍정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다양한 수준의 이성애가부장적 훈육을 거부한다.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으며 정도를 달리할 뿐이다. 이성애 가부장제는 각색된 현실에 순응하는 사람들에게 보상한다. 이제 이성애 가부장제에 순응하는 사람들에게 특혜를 주지 말고, 저항하는 레즈비언 자매들에게 보상하자.

  스트레가는 이성애가부장제 프로그래밍에 대한 우리의 저항을 레즈비언들이 반드시 긍정해야 하며, 체제에 순응하는 레즈비언들에게 그만 보상해야 한다고 단언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반드시 이성애 가부장제의 현실 밖에서 결단하여 우리 입장을 고수해야 하며, 우리를 흡수하고 인식의 급진적인 힘을 희석시키려는 시도에 저항해야 한다.  이성애자로 '패싱하는' 레즈비언들이 그런 시도를 하는데, 레즈비언임을 드러낸 채 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의 선택은 레즈비언 정체성보다 이성애 가부장제의 승인에 가치를 둔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이는 이성애자로 패싱되지 않거나, 패싱하지 않는 레즈비언들을 피하고 소외시키는 것으로 귀결된다. [각주:17]그리고 나는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매체에서 여성스러운 레즈비언들을 올려치도록 강력히 권하는 행태에 질렸다. 많은 레즈비언들이 이성애 가부장제에서 생존을 위해 패싱하려는 걸 인식했지만, 그런 사실을 인지했다는 것이 누구든지 기만을 긍정해야 한다거나, 그들에게 우리 공동체에서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문제의 요지는 패싱하는 레즈비언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더 잘 살아남기 위해 그런다는 점이다.

  이성애자로 패싱할 수 있는 레즈비언들은 여성 동성애를 숨길 수 있기 때문에 특정한 사회적 특권을 획득한다는 걸 반드시 이해하고 인정해야 한다. 돈과 사회적 승인 외에 여성성의 특권과 보상은 거짓된 가치와 가짜 자존감이다. 이는 위선과 겉치레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성성에 가치를 두는 레즈비언들은  ‘티나는’ 레즈비언들보다 우월하다거나 차이를 성애화한다고 여긴다. 레즈비언의 입장에서, 여성성=이성애=벽장=특권=레즈비언혐오 이다. 만약 이성애자로 패싱하는 레즈비언들이 다이크한테 원하는 대로 그들의 선택을 눈감아주길 기대한다면, 이들은 상호존중이란 쌍방향임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여성스럽지 않은 레즈비언들을 ‘남자 같다’고 부정적인 투로 이야기하거나, ‘남자같이 행동한다’고 우리를 비난하는 건 무례하고, 체면을 손상시키며, 모욕적이다.  다이크들은 이성애자들이 으레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걸 들어 왔다. 우리는 다른 레즈비언들한테서 그런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 이는 우리 존재를 깎아내리고, 우리와 연을 끊는 일이다. 사실 우리는 레즈비언으로 패싱되는 두려움과 불신을 이해하지만, 그런 감정들은 우리를 이해하는 데 거의 혹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레즈비언의 여성성은 실재하는 이성애 특권을 누릴 수 있게 한다. 그런 사람들은 더 좋은 직장을 얻고, 사회적 명성과 돈이 따라온다. 다이크들은 여성성에 대해 전부 알고 있다. 여성성이 무엇이고, 어떤 걸 의미하며, 그게 뭘 제공하는지 알고 있다. 남자들이 여성의 여성성에 높은 가치를 매기기 때문에, 여성성은 레즈비언의 입장에서 여성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


  




  1. 내가 여기서 사용하는 어떤 표현도 여성해방운동 수십 년 전의 팸 레즈비언을 회고적으로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지 말라. [본문으로]
  2. 예를 들어, 레즈비언들 사이의 가장 중대한 그리고 가장 무시하고 싶은 차이 중 하나는, 계속 레즈비언으로 살아온 사람들과 삶에서 장기간 이성애자로 살고 행동했던 사람들 간의 차이점이다. 욕망에 따라 행동하고 살기를 선택하느냐, 남자와 살고/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선택하느냐의 한 가지 차이로 우리느 레즈비언으로서 어떻게 행동하고 스스로를 이해할지에 대해 완전히 분기하게 되었다. 한 가지 말하면, 그 선택은 빈번하게 계급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뼈레즈, 평생 레즈비언인 사람들은 고소득 직장에 갈 수 없기 때문에 상류층으로 올라갈 수 없고, 가난한 상태로 노동자 계급에 머무른다. [본문으로]
  3. 이 간단한 요약본으론 <불티나게 팔리는 것>의 린다 스트레가의 분석을 제대로 다룰 수 없고, 스트레가에 대한 파울라 마리에도우터와 메리 크레인의 답변도 마찬가지다. 나는 독자 여러분이 세 작품이 실린 <레즈비언 윤리학> 호를 찾아보기를 권하는 바이다. 특히 스트레가는 그가 잊어버리고 있는 이성애가부장적 태도의 구체적인 예시들을 잊어버리려는 이유에 대한 분석과 함께 제시한다. [본문으로]
  4. 예를 들어, 여성스럽지 않은 맥신 펠드맨(Maxine Feldman)을 생각해 보자. 그는 이성애자로 패싱하려 한 적이 없고, 이성애가부장적인 언어로 ‘예쁘지’ 않으며, 올리비아 레코드의 ‘대중 음악가들’과 대조적이며, 완고하게 음악산업의 ‘주류’로 진입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이성애자로 패싱하려고 하고, 이성애자로 보이려고 한다. 실제로, 그들 중 대부분은 무대에서 L워드를 쓰지 않으려 한다. 관중의 대다수가 레즈비언인 행사에서조차도 말이다. 그런 음악가들은 레즈비언으로 앞에서 커밍아웃한 우리를 배신할뿐만 아니라, 세상을 비웃는 방식의 레즈비언 음악에 대한 갈망을 이용한다. 이들은 '더 많은' 관중들(즉, 이성애자들)에게 어필함으로써 획득하려는 경제적 이득의 수단으로 우리의 돈과 충성을 이용한다. 잔인한 모순은, 홀리 니어(Holly Near)를 제외하면(만약 여전히 그가 스스로를 '레즈비언'으로 부를 만하다고 본다면) 이들 중 주류로 진입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본문으로]
  5. (역주)인도·네팔·스리랑카·방글라데시·파키스탄 등지에서 성인 여성들이 입는 전통의상. [본문으로]
  6. (역주) 하와이 여성의 민속의상. [본문으로]
  7. (역주) 즉, 물화시키는 [본문으로]
  8. 사전은 1987년에 2판이 나왔다. 그러나 이 단어들의 정의는 사실상 그대로 유지되었다. [본문으로]
  9. 예를 들어, <레즈비언 연결성Lesbian Connection>의 1985년 9/10월호를 보아라. 거기에는 남자랑 자면서 '레즈비언'이라고 하는 한 레즈비언 커플이 나온다! 그중 한 명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레즈비언이 무엇인가에 대한 내 정의를 확장시켰다" 당연히 그가 '확장시킨다'라고 한 건 단어가 좁은 의미로 쓰이는 걸 반대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서술을 긍정하게끔 하기 위함이다. (사람의 허리라인이나 엉덩이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지 않는 한) 좁은 의미는 이성애가부장적 의미체계에서 부정적인 함의를 갖는다. 이런 식의 '확장'은 유해하고, 위선적이고, 이기적이며, 그야말로 불가능하다. 섹스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레즈비언은 여자랑 섹스하지 남자랑 하지 않는다. 이성애자나 양성애자 여성들이 남자랑 섹스한다. 그게 단어의 의미다. 나는 이성애를 삶의 방식으로서 '개량'할 마음이 전혀 없고, 스스로를 레즈비언으로 칭하지 않는 여성들을 개심시킬 생각도 없다. 나는 '레즈비언'이란 단어에 개인적으로 집중하고 단어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레즈비언이란 용어를 훔치거나 흐리게 하지 않을 것이다. 확장을 위한 다른 용어는 더 이상 없다. [본문으로]
  10. [역주] 1950-60년대 미국의 레즈비언 문화에서 사용되던 용어들이 어떤 의미인지 독자들이 쉽게 이해하게끔 만든 비교짤.다이크보다 더 남성적이라 여겨지는 불다이크도 한국에서는 '강부치'로 통용되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11. <일반적인 삶/레즈비언의 삶Common Lives/Lesbian Lives>9호(가을, 1983), 39-45에 실린 메릴 머쉬룸(Merril Mushroom)의 주목할 만한 예외 [본문으로]
  12. 그의 논문, "부치-팸 관계들: 1950년대의 성적인 도전Butch-Fem Relationships:Sexual Courage in the 1950's", <이단들: #12 섹스 이슈Heresies: The Sex Issue 12>, 3:21-24 [본문으로]
  13. 동성애자에게 이성애자를 경멸조로 칭할 때 사용하는 말로 heterosexual(이성애자)의 준말. 한국에서는 정확히 대응되는 말이 없고, 특히 이성애자 여성을 지칭할 경우 레즈들끼리 '헤녀'라는 말을 쓴다. [본문으로]
  14. (역주) 벽장 레즈비언의 반대 개념.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숨기지 않는 레즈비언. [본문으로]
  15. (역주) 오픈리 레즈비언의 반대 개념. 주로 인간관계의 단절을 비롯한 사회적 불이익을 받을 것을 우려해 아직 커밍아웃하지 않은 레즈비언을 의미한다. 이들은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이성애자로 패싱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본문으로]
  16. (역주)레즈비언 은어. 레즈비언으로 정체화하기 이전에 한 번도 남자와 연애/섹스/결혼 따위의 관계를 맺지 않은 레즈비언. [본문으로]
  17. (역주) 레즈비언 커뮤니티 내에서 소위 ‘일스’가 ‘티부’를 피하는 분위기를 떠올려 보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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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혜리(Hyeri Nam)

6B radical feminist,lesbian,liberal right-winger, atheist,contents 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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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프로필 소개부터 시작하여 한국의 레즈비언 인권운동이 어땠는지(특히 어떤식으로 거부당했고, 남성 게이들과 왜 분리해야 했는지), 레즈비어니즘이란 무엇이고, 레즈비언 내 부치팸 이분법과 위계구조 및 현재 티부/일스 용어의 문제점, 트랜스젠더리즘이 왜 문제인지 잘 들을 수 있는 강의였습니다.

 뒷풀이때는 30명 넘는 사람들이 모였는데 래디컬 페미들끼리만 할 수 있는 생산적인 이야기, 전략논의가 많이 나와서 매우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다음번에도 또 이렇게 속시원한 강의를 들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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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혜리(Hyeri Nam)

6B radical feminist,lesbian,liberal right-winger, atheist,contents 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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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온라인에서는 게이의 여성혐오 및 트랜스젠더리즘에 대한 비판이 나오면서 퀴어 정치학에 대한 담론이 활발하게 형성되고 있으며, 남성들의 저열함과 이성애규범성(heteronormativity)을 인식함에 따라 자신의 성적지향을 고민하거나 남성과 사귀지 않는 삶을 동경/추구하는 여성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런 시점이기에, 그동안 여성 안에서도, 성소수자 내에서도 잊혀져 왔던 '레즈비언'이 새롭게 화두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성소수자 안에서 레즈비언은  동성애자 내에서 항상 게이 남성들에게 가려져 온 존재였고, 여성혐오의 대상이었으나 실제로 발언하지 못했던 사람들, 그리고 현재 트랜스젠더리즘의 영향으로 ftm 혹은 젠더퀴어란 이름을 사용하면서 사라져가는 사람들입니다.  동시에 페미니즘을 접한 이성애자 여성들에게는 남자랑 연애하지도, 섹스하지도 않으므로 모종의 선망의 대상(?)으로 여겨집니다. '지금까진 당연하다는 듯이 남자랑만 사귀었는데, 나는 여성을 사랑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레즈비언들과 접하기도 하지요. 


 따라서 우리는 지금 레즈비언이 누구이며, 어떠한 위치에 있는 존재이고, 페미니스트와 레즈비언이란 어떻게 만나는지를 이야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울러 지금까지의 레즈비언 운동이 어땠으며, 현재의 주류 퀴어정치학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도 함께 나누어 보면 참 좋을 것 같죠? 


그런 의미에서 강연 하나를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레즈비언은 누구인가


여성 동성애자를 뜻하는 '레즈비언' 그 이름은 어디서 유래했으며, 여성혐오적인 사회, 그리고 이성애중심주의적인 사회에서 레즈비언들은 정치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가? 또한 이중적인 위치로서 레즈비언들은 어떤 운동을 해왔으며 누구와 함께 연대할 것인가



래디컬 페미니즘, 그리고 레즈비어니즘


페미니즘이 이론이라면 레즈비어니즘은 실천이다 

Ti-Grace Atkinson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이란 무엇이며 왜 '래디컬 페미니즘에서' 나왔는가? 우리 개개인의 성적지향은 정말로 타고난 것이며 '개인적'문제이기만 할까? 


퀴어정치학


현대의 퀴어정치학은 레즈비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퀴어진영 내에서 레즈비언을 읽어내기


일시 / 장소


부산 11.18일(토). 오후3시 / 모퉁이극장

서울 12.16일(토) 낮 12시 / 서울시NPO지원센터 교육장


강연자&사회자


강연자: 랑랑 | 전 한국여성성적소수자 인권모임 <끼리끼리> 대외정책부장, 전 부산여성성적소수자인권센터  운영위원

사회자: 국지혜 |래디컬 페미니스트, <대한민국 페미니스트의 고백> 공저자

 

주관&주최


주최 온라인페미니스트네트워크 뿌리


주관 반성착취 여성행동, 전국대학생페미니스트연합회, 페미니스트플랫폼 페이지터너


신청 안내


참여를 원하시는 분은 구글폼 입력: 신청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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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혜리(Hyeri Nam)

6B radical feminist,lesbian,liberal right-winger, atheist,contents 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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