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적 의미의 코르셋은 미용 목적으로 멀쩡한 여성의 신체를 구속/ 변형한다. 우리가 쓰는 '코르셋'은 바로 이 지점에 맞춰 의미를 확장시킨 것이다. 화장,브라,하이힐,치마,교정,성형 등은 미용 목적으로 이상적인 여성의 모습에 부합하게끔 여성의 신체를 변형하고 구속한다. 무엇이 코르셋이고 무엇이 아닌지는 사실상 거의 명확하다. 뭐가 코르셋인지 정의한 이상 '탈'코르셋도 손쉽게 정의할 수 있다. 


    그런데 주체적 화장/성형/다이어트 따위가 탈코르셋이라는 도둑들이 있다. 자기가 하는 게 페미니즘이라 믿겠지만, 당신들은 여성주의자들의 언어를 빼앗는 도둑이고 백래시다. 스스로 언어를 훔친다는 자각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이 도적들은 뻔뻔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어서 언어의 주인인 여성주의자들의 눈치조차 안 보고 '역코르셋 씌운다'며 주인에게 호통을 치고 있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답답한 옷을 벗는다는데 거꾸로 옷을 입는다고 말하니 얼마나 웃긴 문법인지.


    지금은 다 억압인 줄 알지만, 전족이 발을 기형으로 만들고 코르셋이 장기의 위치를 바꿔놓아도 그 당시에 많은 여자들이 순응하고 스스로 신고 입었다. 그리고 당신들도 똑같아. 오히려 여성주의자들 언어를 빼앗아서 쓰니 더 해로워. 정신 좀 차리고 족쇄 안 벗을거면 최소한 도둑질이나 하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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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혜리(Hyeri Nam)

6B radical feminist,lesbian,liberal right-winger, atheist,contents 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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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두기: 코르셋이란?
여성을 억압하는 모든 사회적 규범을 뜻합니다. 보통은 외모에 한정해 쓰는 경우가 가장 많지만 실제로는 애국, 효도, 종교에도 코르셋을 붙여서 사용합니다. 좁게 외모에만 한정할 때는 꾸밈노동으로, 보다 넓은 의미에서 사용될 때는 프레임frame으로 치환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특별히 외모와 관련된 의미로 한정하여 다루겠습니다. 

1. 꾸밈욕구 자체가 나쁜 건가요?


A. 아니요.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꾸미고 싶어하는 심리는 인정합니다. 이 부분 역시 많은 분들이 '래디컬 페미들은 욕망을 억압한다'고 오해하는 지점입니다. 꾸미고 싶은 욕구를 무조건 부정하고 누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대신에 '운동의 차원에서' 다른 여성들의 코르셋을 조이지 않는 방식으로 욕구를 채우거나 혹은 다른 욕구로 대체할 수도 있겠지요. 꾸미는 걸 좋아한다면, 그 대상을 바꿔보는 거 어떨까요. 지금까지 꾸미는 대상이 '나'라는 여성의 몸이었다면 그걸 다른 걸로 바꿔보자는 이야기예요. 한 예로, 집에 소품을 놓고 가구를 바꿔 보는 건 '집'을 꾸미는 게 되겠지요.  페미스티커를 모아 노트북에 붙이는 것도 욕구를 해소하는 하나의 방법이겠고요. 제 경우에는 블로그 스킨을 디자인하는 방식으로 욕구를 해소하고 있습니다. 여담인데 나중에 웹디자인을 좀더 전문적으로 배워보고 싶네요 (웃음) 이런 방식의 꾸미기는 내 욕구를 채우면서도 억압을 재생산하지 않기 때문에 탈코르셋을 지향하면서도 충분히 할 수 있어요. 문제가 되는 건 욕망이 아니라 그걸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각자 자신의 운동방향과 충돌하지 않으면서 내 필요를 채워줄 방법을 고민해 보면 좋겠어요. 

2. 우리가 바라는 건 꾸미든 안 꾸미든 상관없는 세상이 아닌가요? 왜 코르셋을 벗어야 하죠?

A. 맞아요. 결과적으로 내가 꾸밈노동을 하든 안 하든 그로 인해 내가 어떤 사회적 불이익을 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야겠지요. 그런데, 이미 우리는 코르셋을 학습했잖아요. 이미 꾸미지 않는 것보다 꾸미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사람들도 사회의 미적 기준을 따르는 여성에게 관심을 주고 이를 바람직한 것으로 여긴다고요. 기울어진 운동장의 은유 아시죠.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차별받는 사회적 약자이며, 그렇기 때문에  "여혐 남혐 모두 나빠요"로 대표되는 기계적 중립이 사실 중립이 아닌 거. 코르셋-탈코르셋도 마찬가지예요. 수평을 맞추기 위해서는 '코르셋도 억압인데 탈코르셋도 억압이에요' 가 아니라 코르셋을 벗는 걸 더 강조해야 합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의 은유]



3. 특정한 스타일을 강요함으로써 역코르셋을 입히고/검열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A. 역코르셋은 역차별과 같은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성차별이 디폴트인 세상에서 남성도 역차별당한다고 주장하는 게 말이 안 되듯이, 코르셋이 디폴트가 된 사회에서 이를 거부하자는 게 다른 억압이 될 수는 없습니다. 탈코르셋을 지향하는 여성들은 코르셋을 입는 여성들의 삶 하나하나를 검열하지 않습니다. 앞서 질문에서도 답했지만 우리는 코르셋을 입는 여성이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페미대법관 행세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코르셋을 입지 않는 여성의 경우에는 분명히 개인의 삶 가운데서 사회적 불이익을 감수해야 합니다. 역코르셋 혹은 검열이라고까지 주장하는 데는, 변화에 대한 거부감이 심리적 기저에 깔려 있지 않은가요?

  또한 특정한 스타일을 강요한다고 하는데, 뒤집어서 말하면, 꾸밈노동을 할 필요가 없는 남자들은 죄다 획일화된 패션이라는 거네요? 물론 와꾸와 성기 사이즈는 획일화   머리도 삭발을 할 수도 있는데 투블럭이나 숏컷으로도 다양하게 스타일링이 가능하고, 굳이 절바지가 아니어도 트레이닝 팬츠, 통바지 등 편한 바지를 고를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는 꼴빼미 페이지에 사진으로 잘 나와 있으니 첨부합니다. 

사진 출처: 페이스북 꼴빼미 페이지

4. 코르셋을 입는 사람은 페미니스트가 아닌가요?


허수아비 패기는 그만합시다. 우리는 코르셋 자체는 페미니즘 실천이 될 수 없다고 말했지, 코르셋을 입는 여성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고 한 적 없습니다. 페미니스트 개인과 페미니즘 실천은 명백히 다르고요. 페미니스트도 여성혐오를 할 수 있다는 말은 무엇을 시사할까요. 우리 페미니스트 개인이 하는 모든 행동이 페미니즘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페미니스트 개개인은 가부장제로부터 비롯된 사고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여성억압적인 규범을 실천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코르셋을 입는게 여성억압에 순응하는 거라고 하니, 자신의 신념(페미니스트)와 행동(코르셋을 입음)이 불일치한다는 생각이 들어 이 말을 하신 거겠죠? 축하합니다, 인지부조화 단계까지 잘 오셨습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 신념과 행동을 일치시키도록 합시다.  


5. 결과적으로 코르셋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없다는 뜻 아닌가요? 무슨 자격으로 코르셋을 벗으라고 하는지?


 A.  맞아요. 사실 아직 내가 벗지 못한 코르셋이 남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코르셋을 벗을 수 없다고 하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 논리를 그대로 적용했을 때, 누구나 살면서 거짓말을 한 번쯤 하고, 따라서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람이 없으니 아무도 도덕을 가르칠 수 없다는 말도 성립하거든요. 그러나 우리는 왜 도덕을  가르치냐고 묻지는 않아요. 평소 행실이 심각하게 부도덕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굳이 교사의 자질 운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도덕은 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규범이기 때문입니다. 

  코르셋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코르셋을 다 벗지 못했습니다. 알면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벗지 못하는 코르셋이 있고, 몰라서 그냥 받아들이고 있는 코르셋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는 건 페미니스트로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목표는 여성해방입니다. 가부장제 하에서 당연하다는 듯이 여성에게만 주어지던 역할과 관습을 거부하는 일입니다. 당신은 아마도 변화에 대한 거부감으로 이 질문을 했겠지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습관을 바꾸는 사람이 성공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우리가 내면화한 취향과 습관을 바꾸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코르셋이 본질적으로 여성억압적이며, 페미니즘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이해한다면 이게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는 점에 동의하시겠지요. 처음부터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사소한 것에서부터 실천해 나가는 게 어떨까요? 


6. 자기만족으로 꾸밈노동을 할 수도 있잖아요.


꾸밈노동이 단순 자기만족이라면, 꾸밈노동을 하는 사람 못지않게 꾸밈노동을 하지 않고 만족하는 사람들도 많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꾸밈노동을 하는 사람이 절대적으로 많지요. 이는 그 자기만족이 단순히 개인의 취향만을 반영한 것이 아님을 시사합니다.

자기만족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심리적 방어기제입니다. 우리는 사실 꾸밈노동이 대단히 귀찮은 일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화장을 예로 들어 볼까요? 우리는 적어도 출근하기 전 30분은 화장하는 데 시간을 따로 써야 하고, 먹을 때도 조심해야 하며, 자주 화장실에 가서 화장을 수정해야 하고, 너무 자주 해도 피부가 상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전에 또 클렌징 용품으로 지워야 하는 번거로운 일이라는 것도. 하지만 동시에 꾸밈노동을 하지 않았을 때 불이익을 받는다는 점도 잘 알고 있어요. 취업할 때에도 (단순 알바일 뿐인데도) 필요하며, 꾸미지 않으면 연애/결혼시장에서 불리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꾸미지 않으면 학생이거나 기혼 여성이라는 이분법에 구겨넣어지고, 왜 꾸미지 않느냐는 오지랖을 주변 사람들로부터 들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사회의 기대에 맞춰 자신을 꾸미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스스로 꾸미면서 예쁘다고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의 기준은 어디에서 왔나요? 정확히 사회에서 정한 기준이 아니던가요. 우리는 눈썹, 코, 눈 크기, 쌍꺼풀 여부, 입술 색, 피부톤, 얼굴 크기, 턱선, 치아 배열, 팔뚝과 허벅지 굵기, 가슴 모양, 뱃살, 그리고 성기까지 사회의 특정 미적 기준에 맞추도록 강요받고 이것이 아름다운 모양이며 여성으로서 당연히 추구해야 할 것이라고 배웁니다. 얼굴을 작게 만드는 기술인 쉐이딩은 있지만 얼굴을 커 보이게 하는 화장법은 없어요. 특수 분장이 아니고서야 대개는 여드름과 흉터를 가리기 위해 화장을 한다. 피부톤을 고르게 하려고 CC크림을 바릅니다. 당신은 아름다운 모습에 만족할 뿐이라 하지만,아름다움의 기준은 사회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요?

그래서 우리는 자기만족을 위해 꾸밈노동을 하는 사람에게 묻습니다. 너 무인도 가서도 화장하고 힐 신고 다닐거냐고. 이 때 무인도는 꾸밈노동에 대한 평가나 미의 기준이 전혀 없는 공간을 상징합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이 없을 때 과연 굳이 뼈를 깎는 성형을 하고 몸에 해로운 화장을 할까? 결론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움과 함께 짝을 이루는 개념은 추함이에요. 아름다움은 추함이 있을 때 비로소 상대적인 가치를 지닙니다. 사람 두 명만 있어도 우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누가 더 낫다며 외모를 품평하고, 더 높은 평가를 받는 사람이 '아름답고' 그렇지 않으면 '못생긴' 게 됩니다. 그런데 무인도에 자신과 비교할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꾸미기 전의 자신과 꾸며놓은 자신의 모습을 놓고 비교할 뿐이거든요. 아름답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주체는 오직 자기 자신이고 꾸미지 않는다고 아무도 고나리질하지 않아요. 이 때, 꾸밈노동을 과연 얼마나 오래 유지할 수 있을까요?

꾸밈노동은 자기만족이 될 수 없습니다. 이는 어찌되었든 여성에게만 일종의 '예의'로서 요구되는 억압이며 불편하고 귀찮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직장에서 요구하기 때문에, 연애/결혼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혹은 단순히 인정받고 싶어서 이를 수행하며 사회를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해서 자기만족이란 이름을 붙였을 뿐입니다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처럼, 꾸준히 화장품과 머리와 옷에 돈을 써가면서 예뻐지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당연히 치르는 비용이라고 안도하는 것이겠지요.

7. 코르셋을 저항적 의미로 전복할 수 있지 않나요?


7-1. 남자들이 싫어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꾸미는 경우
   전복한다는 말을 들어보면, 전복의 근거로 남자들이 싫어하고 피한다는 점을 항상 내세운다. 이를테면 쎈 화장은 남자들이 싫어하므로 전복이라는 식입니다. 그러나 이 주장의 한계는 여전히 남성을 평가의 주체로, 여성을 평가의 객체로 둔다는 점입니다. '남자가 싫어하니까' 혹은 '사회적 시선이 안 좋으니까'라는 말은 여전히 남성 혹은 가부장적인 사회의 시선에 신경쓴다는 말 아닌가요? 기존의 꾸밈노동에서 여성은 평가의 객체이며 남성은(그리고 때로는 다른 여성들도) 평가의 주체가 된다. 기존의 권력관계를 뒤집지 못하면서 코르셋을 전복했다는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정말로 전복을 하고 싶거든, 여성이 남성의 시선을 신경쓰는 게 아니라 남성이 여성의 눈치를 보게끔 만들어야 합니다. 그동안 여성은 얼굴형, 눈썹, 눈매, 쌍꺼풀 여부, 콧대, 치열, 입술 두께, 턱 모양, 피부, 가슴의 모양, 손/발톱, 뱃살, 허리굵기, 다리굵기, 체모, 엉덩이, 심지어 성기 모양까지 나노단위로 쪼개져 품평을 당해 왔습니다. 그 기준은 곧 여성들을 옭아매는 코르셋이 되었고요. 따라서 코르셋을 전복한다는 건, 남성이 평가의 객체가 되고 여성이 평가의 주체가 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여성은 특정한 미적 기준을 만들어 자르셋을 씌우고, 남성은 그 자르셋을 써야 한다고요.

7-2. 특정한 연령대의 여성은 꾸밈노동을 하지 못하게 억압당합니다. 학생이거나 나이가 중년 이상인 경우요. 


A.  좋은 지적입니다. 맞아요. 특정 연령대의 여성은 꾸미면 본분에 충실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되거나(학생) 주책이라는(중년) 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동일하게 코르셋은 여성억압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화장품은 연령과 상관없이 피부에 유해합니다. 연령과 상관없이 성형은 항상 부작용의 위험이 있고 돈을 들여 자신의 뼈와 살을 깎아내는 일입니다. 치마를 입으면 바지를 입을 때보다 분명히 '더' 행동에 신경쓰게 되고요. 나이가 어리거나 혹은 많으면 하이힐과 브래지어가 불편하지 않게 되나요?

  만약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미 몸이 거기에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매일같이 하이힐을 신고 출근하면 불편한 감각은 점점 무뎌지겠지만, 그러다 어느 날 단화를 신으면 감각이 다르다는 걸 느끼잖아요. 한동안 단화를 신다가 다시 힐을 신으면 발을 꼭 조이는 그 느낌이 낯설게 와닿잖아요. 그런 겁니다. 그 불편함 자체가 이미 여성에게만 요구되는 규범이며, 이미 강요당하는 여성들이 있다는 걸 생각해 주세요. 예쁘게 꾸며진 상품으로, 인형으로 취급당하는 여성들을 생각해 주세요. 꾸밈노동은 어떠한 권력이 아닙니다.


8. 현실적으로 코르셋을 벗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지 않나요?


A. 알고 있습니다. 뷰티, 패션, 연예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겐 본인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니까요. 그러나 동시에 이 산업은 분명히 사회적 미의 기준을 재생산하고 다른 여성들에게 이를 권장합니다. 기획사에선 연예인들에게 특정한 옷을 입히고 성형을 요구하며 '대중적으로 잘 팔릴 법한' 상품으로 만들고, 연예인 역시 다이어트 비법이나 화장법 등을 공유하며 사람들이 잘 소비할 법한 외모로 성형함으로써 여성들이 이를 모방하도록 합니다. 화장품 회사에서는 광고비를 지불하고 연예인에게 특정 상품을 광고하도록 하고, 여성들을 후려쳐 가며 '자존감을 높이고 완벽해지기 위해' 자기 회사의 제품을 쓰라고 합니다. 성형 산업도 마찬가지고요. 패션몰에서는 대개 날씬하고 예쁜 모델을 내세워 옷을 입히고 다른 여성들이 이 옷을 입으면 모델처럼 섹시한/청순한/귀여운.. 이미지를 만들 수 있을 것처럼 광고합니다. 따라서 이 산업에 종사하는 분들은 코르셋을 강요받기도 하지만 다른 여성들의 코르셋을 조이는 일에 동참하는 셈이지요.

  그 분들께는 세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과감하게 코르셋을 조장하는 이 일을 버리고 다른 직종으로 갈아타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생계를 위해 타협하되 내부자이기 때문에 참여할 수 있는 선에서 연대하는 것입니다. 그 일에 종사하면서 여성이 어떻게 상품으로 다뤄지고 착취당하는지 익명으로 고발하고 공론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SNS상에선 페미니스트 계정과 업무용 계정을 분리하여 적어도 페미판 안에서는 코르셋을 조장하지 않도록 할 수 있습니다. 여성이 아닌 남성만을 대상으로 자르셋을 씌우는 일도 고민해 볼 수 있겠습니다. 세번째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고 자신이 하는 일이 페미니즘 실천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래디컬 페미니스트인 제 입장에서는 첫번째를 가장 바람직하게 생각하지만, 이는 상당한 결단을 필요로 하며 우리가 생계마저 책임질 수 없으므로 두번째 선까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앞에서 누누이 여성억압적이라고 말했잖아요. 여성인 내가 좋아서 하면 다 페미니즘 실천입니까? 내가 주체적으로 하면 다 페미니즘이에요? 그건 아니잖아요. 자신의 행동을 페미니즘에 끼워맞추지만 마시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선에 대해 꾸준히 고민하고 답을 찾으시길. 


9. 화장품 회사나 성형외과 앞에서 시위나 하지, 개인을 왜 공격하는가?



A. 첫째로, 그렇다면 역으로 래디컬 페미니스트에 대한 비판 역시 성립할 수 없습니다. 본인은 비판받아선 안 되지만, 우리는 비판받아도 되는 존재입니까? 또한 개인의 취향 혹은 습관을 비판하는 것이 개인의 인격을 공격하는 건 아닙니다. 애인, 덕질하는 연예인이나 캐릭터, 지지하는 정치인을 비난하면 당신을 공격하는 게 되나요? 취향이나 습관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마세요. 코르셋이 여성을 억압한다고 말했지 당신이 그 자체로 여성을 억압한다고 말한 적 없습니다.(단, 다른 여성에게 6너는 여자가 되어갖구 왜 안 꾸미니9 6성형 좀 해라9라는 식으로 코르셋 씌우면 여성혐오 맞습니다)


 또한 뷰티-성형-연예 산업은 서로 맞물려 있는 거대자본이며 이들이 합법적으로 코르셋을 장려하는 걸 우리 페미니스트들이 막기는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대항할 수 있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개인 소비자로서 기업을 상대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단체로 불매하는 것입니다. 소비하지 않고, 이러한 산업이 결과적으로 여성혐오와 관련되어 있다고 주지시키는 것입니다. 수요를 줄이면 공급은 알아서 줄게 되어 있습니다.


10. 소수의 사람들이 실천한다고 세상이 바뀌진 않는다.


A. 페미니스트 왜 하냐고 묻고 싶은데요. 아니, 이건 비단 페미니즘뿐 아니라 모든 사회운동에 공통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나 혼자 해서 뭐가 바뀌냐'는 사고방식으로는 어떤 운동도 할 수 없어요. 나'만' 하면 개인적 실천이지만, 여럿이 하면 운동이 됩니다. 더구나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가 발달한 시점이므로 개인이 온라인에서 한 말은 충분히 파급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페미니즘의 부흥은 메갈리아란 온라인 커뮤니티로부터 시작되었고 거기에서 나온 수많은 띵문이 각종 커뮤니티와 SNS로 퍼져나갔습니다. 메갈리아 이전에 개념녀였던 많은 여성들이 지금은 여성혐오에 대항할 언어를 얻었습니다. 트위터에서 시작된 #XX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은 또 얼마나 많은 성폭력 사건을 공론화했는지. 탈코르셋 실천이 왜 파급력이 적을 것을 두려워합니까? '나 혼자 한다고 뭐가 바뀌겠어'가 아니라, '나부터 하면 됩니다'


11. 왜 코르셋 전시를 반대하나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로 코르셋을 SNS상에 올리는 것을 반대합니다.


1. 신뢰의 문제
학생들한테 욕하지 말라 가르치면서 혼낼 때 쌍욕하는 선생님은 신뢰할 수 없습니다. 금연을 권장하면서 흡연하는 사람을 신뢰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꾸밈노동이 여성에게 강요된 것이라 주장하면서, 취업하려고 성형하거나 화장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원하면서, 업업한 사진을 남들 다 보는 공간에 올리는  사람은 신뢰할 수 없습니다. 그게 코르셋 전시하지 말라고 하는 이유입니다. 꾸밈노동이 억압이라고 말하고 싶으면,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세요. '어쩔 수 없이' 사회생활을 위해 한다고 해도, 꾸밈노동을 정말로 억압이라 느끼고 때려치고 싶었으면 보란듯이 전시할 수는 없어요. 오히려 '내가 현실과 타협했구나...' 하면서 속으로 어금니를 깨물고 말지.

2. 관찰,모방학습 효과

모든 랟펨들이 그렇진 않습니다만, 빨간약 한번 먹었다고 안심해선 안 되듯이 코르셋을 버려도 종종 돌아가고픈 충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충동 대신 숨막힌다고 느끼기도 하고요. 이미 페미판 밖은 코르셋을 장려하는 풍조가 너무 만연하고, '이 정도는 괜찮지 않아?' 하면서 조금씩 타협하다 보면 결국 다시 원상태로 돌아올지도 모르니까요. 그래서 코르셋을 아예 전시하지 않는 공간을 원합니다.

또한 페미니스트 계정으로 새로운 페미들을 만나게 되면, 그 사람들은 당신의 계정을 관찰함으로써 꾸밈노동은 마음대로 해도 괜찮은 것이라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질문. 화장을 하는 페미들이 늘어나야 꾸밈노동이 강제되는 세상을 바꿀까요, 아니면 안 하는 페미들이 늘어나야 세상을 바꿀까요? 기존에 페미를 모르는 사람들도 하고 있던 걸 계속해봐야 코르셋이 강제되는 문화를 바꿀 순 없습니다.

앞서 제가 SNS공간의 특징에 대해 말했지요. 개인적으로 올리는 사진이라도, 나 혼자 보는 공간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함께 보고 있다는 것. 그래서 당신이 전시하는 코르셋을 보고 압박감을 느끼거나 영향을 받아 따라하고 싶은 사람들이 생긴다는 것. 그 점을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3. 스스로를 '평가받는 위치로' 대상화

올리시는 분들의 솔~찍헌 심정은 사실 이거 아닌가요?
'남들이 내 사진 보고 칭찬해 줬으면 좋겠다, 좋아요 누르고 반응해 줬으면 좋겠다 ...'
물론 칭찬 들으면 기분 좋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동안 계속 자댕이들이 사람 외모품평하는 글에 뭐라고 반응해 왔었나요? 칭찬도 평가라고 말했습니다. 니가 뭔데 날 '평가하려 드냐'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평가받는 사람은 평가자보다 낮은 위치에 있다는 걸요. 면접관과 지원자가 있을 때 눈치보는 건 지원자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몸매 사진이나 화장한 사진을 올리며 사람들의 반응을 기대할 때 나는 평가당하는 대상이 됩니다. 어떤 반응을 기대하는 것도, 그리고 그 반응에 따라 실망하는 것도 전시하는 사람이에요. 보는 사람들은 아쉽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평가당하는 위치로 대상화하지 마세요. 그리고 반응하는 사람들도 거기에 예쁘다고 반응하지 마세요. 친하다는 이유로 외모품평이 평가가 아니게 될 수는 없습니다. 사회적 미의 기준에 따라 여성의 외모를 품평하는 문화는 페미판 밖은 물론  안에서도 용인되어선 안 됩니다.


12. 저는 외모에 대한 자존감이 낮은 편이에요. 꾸미지 않은 모습에 자신이 없어요.


A.  만약 왕따를 당하거나 이 때문에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면, 전문가에게 심리치료를 받으며 회복하는 게 우선입니다. 외모 때문에 자해를 시도하거나 자살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면 이는 페미니스트들이 해결해 줄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면, 한번 꾸밈노동을 하지 않는 한남과 비교를 해 보세요.  남초 커뮤니티에 들어가면 심지어 이 정도 외모는 잘생겼다고 정신승리하기까지 합니다. 반면 주위 여자들을 보면 어디 고쳐야겠다고, 어디 살빼야겠다고, 거울을 보면서 한숨쉬는 사람들이 널렸죠. 이는 사회의 성별 이중규범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는 고기 자르듯 여성의 외모를 부위별로 나눠 등급을 매기고 '완벽하지 않다'며 후려칩니다. 반면 남성의 경우에는 '그래도 이 정도면 훈남이야'라면서 약간의 하자 정도는 넘어가줍니다. 혹시 당신도 그런 이중적인 시선으로 자신과 타인을 보고 있지는 않았나요? 왜 그남들은 저리 당당하게 못생긴 얼굴을 들고 다니는데 당신이 꾸미지 않는다고 위축되어야 하나요?

[여성과 남성이 스스로를 보는 방식의 차이]


13. 탈코르셋, 무엇부터 실천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A. 첫번째, 거울 안 보기부터 시작합시다. 매우 사소한 방법 같지만 의외로 효과가 좋습니다. 우리가 거울을 왜 보나요? 남에게 비춰지는 내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서 보잖아요. 거울 앞에서 이에 뭐 끼진 않았나, 얼굴에 뭐가 묻진 않았나, 화장이 잘 되었는지, 오늘 코디가 괜찮은지, 살이 얼마나 쪘네 빠졌네 확인하잖아요. 우리는 거울 앞에 서면 스스로의 외모를 자연스럽게 평가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울을 안 보는 건 외모 강박으로부터 벗어나는 첫 번째 걸음입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처럼, 남에게 비춰지는 내 모습을 확인하지 않으면 상대적으로 덜 신경쓰게 됩니다.

두번째, 탈코르셋 실천 일지를 쓰면서 자기평가를 하도록 합시다. 구체적인 기록 방법 및 절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목표행동 설정: 자신이 벗고자 하는 코르셋을 적어봅니다. 왜 그 코르셋을 벗고자 하는지 스스로 이유를 찾아 적어봅니다. 

2) 기초선 측정: 우리가 24시간 꾸밈노동을 하지는 않으며 각자 빈도가 다르므로, 얼마나 자주 코르셋을 쓰는가 혹은 어떨 때 그것을 하는가 적습니다. 

3) 계획 수립: 구체적으로 자신이 얼마나 빈도를 줄여나갈 것인지 적습니다. 만약 머리를 자르는 것 같이 빈도로 표현할 수 없는 행동이라면 언제 그 행동을 실행할지 적어봅니다. 이 때, 계획을 실천/실천하지 않을 경우 자신에게 어떤 상/벌을 줄 것인지도 함께 적습니다.

4) 계획 실행: 앞서 세운 계획을 실행합니다. 

5) 피드백: 주기적으로 피드백을 통해 자신이 잘 실천하고 있는지 파악하고, 잘하고 있으면 약속한 보상을 줍니다. 


세번째, 오프라인 시위나 래디컬 페미 강연, 모임 등에 참석하도록 합시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무엇보다도 눈으로 탈코르셋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확인한다면 큰 자극이 될 것입니다. 저도 오프라인 시위에 종종 참여하는데, 처음으로 시위에 참여했을 때 이 사람들이 '정말 실재하는구나'를 느끼고 큰 자극을 받았거든요. 만약 지방이나 해외에 거주하여 상황이 여의치 않은 경우, SNS 계정을 활용하여 탈코르셋 인증샷이나 혹은 해시태그 운동 등으로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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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혜리(Hyeri Nam)

6B radical feminist,lesbian,liberal right-winger, atheist,contents 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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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개개인의 경험은 당연히 전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그 다른 경험으로부터 공통된 억압기제를 찾아냈고, 이 과정에서 여성들의 경험은 더 이상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 서사가 된다. 페미니스트들은 경험을 관통하는 억압에 저항함으로써 경험을 정치화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다"란 슬로건은 바로 이런 의미다. 단순히 여성 개인으로서 겪는 경험을 서로 공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페미니스트들은 그 억압기제에 저항해 왔다. 외연을 확장하는 방식은 경험의 교차점을 찾고 그로부터 자매애를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정리하자면, 서로 다른 경험들로부터 연결되는 지점을 찾아 거기서 억압의 구조를 밝혀내고, 공유하는 공통점으로부터 여성들에게 참여와 연대를 요구하는 방식. 그리고 지금도 우리는 이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지금 한창 이슈인 코르셋을 예로 들어 보겠다. 코르셋에 대한 여성들의 경험은 전부 다르다. 누군가는 코르셋 때문에 식이장애를 경험했고, 누군가는 페미니즘을 알기 전부터 외모코르셋을 거부해왔다. 누군가는 그 의미를 알지만 생존을 위해 타협한다. 그러나 코르셋이 여성에게만 요구되는 억압이라는 점은 이 세 경험을 모두 관통해낸다. 식이장애를 경험한 사람은 여자는 날씬해야 한다는 규범에 스스로를 밀어넣은 경우이다. 외모코르셋을 거부해온 사람은 6꾸미지 않는다9고 6여자답지 못하다9고 여성성 규범을 강요당한다. 생존을 위해 타협하는 사람 역시 코르셋이 예의가 아니길 바란다. 여기서 코르셋이 억압임을 도출할 수 있다.

여성들의 서로 다른 경험에서 우리는 코르셋이란 억압을 발견해냈다. 그리고 공통의 경험을 말하면서 코르셋 없는 사회를 만들자고 여성들에게 이야기한다.


화장이 예의가 아니라면 어떨 것 같냐고.
어디 고치라는 말을 안 하게 된다면 어떨 것 같냐고
44사이즈에 맞출 필요가 없는 사회를 생각하라고.

이것이 우리의 운동 방식이다. 여성들이 현실에서 겪는 경험에 집중하고, 그 경험으로부터 억압의 구조를 밝혀 정치화하는 것. 공통된 경험으로부터 참여를, 자매애를 이끌어내는 것. 이게 래디컬의 방식이다. 이 과정은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에 불편하지만, 불편함 없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우리는 현실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누구나 자신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자주 평가절하당한다. 경험만 이야기하지 말고 공부 좀 하라고. 그러나 나는 여기서 묻고 싶다. 여성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어떻게 현실을 설명하며, 여성주의가 여성에게 진입장벽이 높아야 하냐고. 우리는 현실에 사는 사람들이다. 현실에서 내 목소리, 다른 여성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현실을 설명해내는 이론을 만들어내자.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이론을 만들어내자. 그게 우리의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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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혜리(Hyeri 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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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가는 한껏 치장한 바리데기의 모습과 머리가 하얗게 센 노장 바리데기의 모습을 위-아래 컷으로 대조하여 보여준다. 위 컷에는 바리데기 뒤에 수많은 여성들이 서 있다. 치장한 바리데기는 여성의 대표로서 부각되어 있다. 이는 사회에서 대표되는 전형적 여성성을 상징한다. 반면 아래 컷의 바리데기는 '혼자' 서 있다. 편하게 담배를 한대 피우는 노인의 모습으로. 그 모습은 사회적으로 주입된 '여성성'과는 거리가 멀다.

한편, 위 컷은 전쟁 전 동료들과 함께했던 바리데기의 모습이라면 아래는 동료를 잃은 노장(老將)의 모습으로도 읽힌다. 그러나 그 모습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보다 당당해 보인다. 고독의 시간을 버티며 자신을 지켜온 대장의 모습이 보인다. 고독의 시간을 보내며 홀로서기를 했다는 건 전후 장면을 통해 추론할 수 있다. 전쟁 가운데 죽는 사람도 있고, '진매'처럼 흔들리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동료들을 잃고 변절하는 사람이 생길 때 불리한 전쟁의 흐름을 바꾸기 위해선 당연히 자신만의 주관을 세우고 버텨야만 한다.

전쟁을 계기로 변한 그의 모습으로부터 읽는다. 첫째, 불편한 치장은 결과적으로 전쟁에서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 둘째, 그가 동료를 잃으며 홀로 견디는 시간을 겪었다는 것. 셋째, 치장을 버리고, 동료와 함께 서 있지 않은 모습이건만 오히려 훨씬 편안하고 당당해졌다는 것

​​
2.
용감한 바리데기, 효녀 바리데기, 유리천장을 부순 바리데기라는 설명을 읽어보자. 용감하다, 유리천장을 부쉈다는 말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어울린다. 그러나 효녀라는 수식어는 설화의 속성이지만 이 작품에선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다소 이질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바리데기 설화를 살펴보면, 죽음을 무릅쓰고 저승으로 갔으며, 여성의 몸으로 신의 자리에 올랐다는 점 때문에 크게 이상하지 않다. 작가는 '효녀'라는 수식어를 통해 설화의 이미지를 계승하며 '유리천장을 부쉈다'라는 말에서 바리데기라는 인물을 재해석하고 있다.


3.
이 장면도 눈여겨봐야 한다. 투항해서 남자로 태어나고 싶은 진매. 남성으로 살게 된다는 건 다른 억압당하는 여성을 두고 기존의 질서에 순응하며 가부장적 권력을 누리게 된다는 의미이다. 진매는 트랜스젠더로 정체화한 여성, 즉 TIF(trans-identified Female)으로 읽을 수도 있고, 빨간약을 먹었으나 토한 흉자로 읽을 수도 있다. 그는 여성의 위치를 거부하며, 남성의 권력을 원하지만 사회를 바꿀 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개인주의적인 해결책을 찾는 진매에게 신라는 말한다. 그거 다 개소리라고. 아직도 남자들 말을 믿냐고. 그래. 실제로 가부장제 권력에 순응한 흉자가 한남과 동등한 권력을 누리나? TIF가 남성권력을 누릴 수 있나? 아니,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개념녀가 누리는 권력은 철저히 가부장제 질서에, 남성들에게 의존함으로써 누릴 수 있는 것. TIF는 신체적 조건 때문에 남성사회에 편입되어도 그 끝자락을 차지하게 된다. 특히 한남게이들은 그를 남성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나는 종종 빨간약을 먹고 나서 너무 괴로워 그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다. 괴롭다. 공포영화 한 편을 보면서도 그 안에 있는 여적여 프레임을 발견하고, 노래 가사는 죄다 남자한테 사랑받아야만 하는 의존적인 존재로 여성을 묘사한다. 시위에 나가선 몰카를 찍혔고 트라우마가 생겼다. 실친들을 설득하다가 걔네 머릿속에 박힌 너무나 견고한 여성혐오를 발견할 때 얼마나 답답한지. 내 실명을 걸고 메밍아웃을 했을 때 얼마나 많은 한남들이 친구를 끊었던지. 종종 나를 어떻게 씹고 있을지, 머리로 상상을 한다. 왜 나만 이렇게 불편해야 하냐고, 머리가 있으면 생각들 좀 하라고 혼잣말로 욕을 골백번도 더 했었다.

그래, 정확히 진매처럼 생각할 때가 한두 번이었을까. 하지만 그럴 때마다 신라가 말을 걸어왔다. 너는 이미 얼마나 한남들이 탐욕스럽고 서열에 목매다는지 충분히 알지 않느냐고. 한남들의 사랑인 개념녀 권력이 허상이라는 거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고. 그렇게 다시금 마음을 다잡는다. 그 전으로는 결코 돌아가지 않아. 돌아갈 수 없어.

이번 화만으로는 진매가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저 장면 자체는 빨간약을 먹고 괴로움에 돌아가고 싶다고 느꼈던 사람들의 정곡을 찌른다. 아직도 남자를 믿느냐라는 말에는 정말 많은 이야기들이 함축되어 있다. 그건 우리가 ^남페미^에게 통수를 맞았던 경험이기도 하고, 우리보다 한 세기를 앞서 살았던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이용당했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해일조개론 역시 그 안에 포함되어 있고. 또한 기득권인 남성에겐 차별이 당연하기 때문에 여성들이 지랄하지 않는 한 결코 파이를 나누지 않으리라는 이해이기도 하다.

덧) 보통 중간 리뷰 잘 안쓰는데, 감상 포인트가 꽤나 많은 회차여서 길게 써봄. 다음 화에서 작가가 바리데기의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지 매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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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혜리(Hyeri 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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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은 수도 없이 이런 메시지를 보고 듣는다. 예쁘게 꾸미라고, 다이어트 하라고, 성형하라고, 얌전히 있으라고, 남자한테 잘 보여야 한다고, 좀 웃고 사근사근하게 사람 대하라고... 

"여자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그 여성성을 열심히 수행했을 때 만들어지는 건 인형의 모습이다. 보기 좋고 순종적이며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않는 인형. 그저, 남자에게 사랑받으면 그만이고 이를 위해 존재하는 인형.


이 사회는 그런 인형들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인형의 집' 안에 살고 있다. 인형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그 인형의 집에서 뛰쳐나와야 한다. 그러나 인형의 집에서 나가는 건 쉽지 않다. 인형의 주인이 붙잡고 다른 인형들이 붙잡기 때문에. 나가려면 그 손을 뿌리치고 문을 박차야 한다.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밖에 나가면 위험할거라고 주인도 경고하고 다른 인형들도 경고한다. 이미 주인은 인형의 집을 자유롭게 들락날락할 수 있지만 밖에 나가려는 인형에게는 꼭 그런 경고를 한다. 주인은 밖이 궁금하다면 시간을 정해 놓고 '함께' 동행하자고 회유하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많은 인형들이 그런 경고에 발길을 돌리고, 타협안을 받아들인다. 애써 경고와 회유를 뿌리치고 나온 인형은 사람이 되고 싶지만 바깥은 그 주인들의 세상인지라 다시 인형의 집으로 돌아가고픈 유혹에 빠진다. 그러나 자신과 같은 인형을 만나면 그 자체만으로 힘을 얻기에, 인형의 집을 나온 인형들은 모여서 자신의 존재를 집 안에 있는 인형들에게 알리기로 했다. 주인이 어떻게 인형들을 속이는지도. 인형의 집은 튼튼한 것처럼 보인다. 이 집이 언제까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밖으로 나온 인형들은 유혹과 싸우면서 인형들을 계속 빼돌리겠지. 집이 무너질 때까지

집 나온 인형은 집 안에 있는 인형에게 희망이 된다. 주인도, 타협한 인형도 온전한 자유를 가져다주지 못하며 오로지 집 나온 인형만이 희망이 된다. 코르셋을 벗은 여성, 코르셋을 거부해온 여성만이 다른 여자들의 코르셋을 풀어줄 수 있다. 

#코르셋
#알을_깨고_나와야_새가_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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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혜리(Hyeri 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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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에서 지배자와 피지배자, 서열이 높은 자와 서열이 낮은 자를 노골적으로 차별하면서도 평등법에 위반되지 않고, 따져보면 어마어마한 약자 억압임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사회적으로 지탄받지 않고 다들 그러려니 하는것이 하나 있다. 또한 워마드에서조차 아직 깨지지 않은 마지막 남은 코르셋이기도 하다. 이게 뭘까? 

 

 

 

 

 

 

 

 

 

 

 

 

 
 
정답은 '바디랭귀지'다.

 
바디랭귀지는 신체의 자유도를 의미하며, 태초부터 동물과 인간을 불문하고 강한 바디랭귀지는 우두머리들만이 누릴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특권이었고, 위축되고 스스로를 낮추는 바디랭귀지는 서열이 낮은 쩌리, 찐따들의 전유물이었다.

 
서열이 높은 사람일수록 신체의 자유도가 높다. 고릴라 무리의 우두머리 수컷, 고등학생들 무리의 일찐 남학생, 회식자리에서 부하직원에게 술을 받는 상사, 그리고 대기업 사무실 책상에 앉은 CEO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그들은 어떤 바디랭귀지를 취할까?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1)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지가 편할대로 앉으며 2) 팔과 다리를 넓게 벌려 몸을 커 보이게 하고 3) 과시적이거나 열린/적극적인 자세를 취하며 4) 최대한 많은 공간을 차지한다. 

즉, 양팔은 팔걸이에 얹고 다리는 당당하게 벌리고 느긋하게 등을 기대 앉은 거만한 자세를 연상할 수 있다. 서열이 높은 사람의 자세다.
 
반면, 서열이 낮은 사람일수록 신체의 자유도가 낮다. 고등학생들 무리에서의 빵셔틀, 조선시대의 노비, 술자리에서 쩔쩔매며 상사에게 술을 따르는 부하직원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그들은 과연 어떤 바디랭귀지를 취할까?

그들은 1) 손을 모으고 다리를 오무리고 의자에 불편하게 걸터앉아 등을 굽히는등 위축되고 움츠러든 자세를 취하며 2) 자신의 몸을 최대한 작아보이게 만들고 3) 닫힌/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며 4) 최대한 적은 공간을 차지한다.  
 
"저는 송구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전 애자이니 귀엽게 봐주세요" "소인 몸둘바를 모르겠나이다" 를 온몸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바디랭귀지는 곧, 권력과 서열의 상징이며, 매순간마다 서열을 재확인 하는 역할을 하고, 서열이 바뀌었을때 가장 먼저 달라지는것 또한 바디랭귀지며, 바디랭귀지를 통해 사람의 서열을 쉽게 추측하기도 한다. (냄져들 무리에서 앉아있는 자세만 봐도 서열이 딱 보이는 이유가 바로 그거다). 

근데 여자들은 바보스럽게도 바디랭귀지를 통해 남자의 서열은 쉽게 파악할 줄 알면서, 바로 자신들이 여성으로서 그런 최하위 서열의 바디랭귀지를 강요당한다는 사실은 모른다. (또는 알아도 심각하게 생각 안하고 걍 그러려니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여자들은 역사적으로, 그리고 2017년인 지금까지도 항상 언제나 서열이 낮은 사람의 바디랭귀지를 강요당해 왔다.

-남자들은 양반다리 하고 앉을때 여자는 무릎을 꿇거나 인어다리를 하고
-남자들은 지하철이든 학교든 공공장소 어디서든 다리를 쩍 벌리고 앉지만 여자는 ^겸손하게^ 허벅지와 무릎 종아리를 딱 붙히고/모으고 앉아야 되고
-남자들은 의자 및 벤치 등받이에 양 팔을 날개처럼 걸치고 앉는 자세를 많이 하지만 여자가 그런 자세를 하는건 매우 드문 일이며
-남자들이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을때 여자들은 차렷한 자세거나 양손을 보지에 모으거나, 뒤로 모으거나, 팔을 어쩌지 못해 팔짱을 낀 닫힌 자세를 취한다. 


*남자교복에는 주머니가 있는데 여자교복에는 주머니가 없는 이유도 여자가 건방지게 남자처럼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다니는 꼴이 보기 싫어서라고 한다. 

또한, 남자교복의 상의는 품도 크고 널럴하게 길게 디자인하고, 여자교복의 상의는 짧고 품도 작아서 만세만 해도 겨드랑이가 당기고 배꼽이 보이게 디자인한것 또한, 남학생에겐 빠르고 큼직큼직하고 시원시원한 바디랭귀지를 허용하는 반면 여학생에겐 신체의 활동성을 제한하고 구속하며, 느리고, 작고, 소극적인 몸가짐을 세뇌시키기 위함이다 - 실제로 '왜 여학생의 교복은 남학생의 교복보다 불편해야 하는가'의 질문에서 모 학교 남교장이 여학생에게 ^조신한^ 몸가짐을 터득시키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대답했음. 여학생들에겐 죽어도 바지를 못입게하는 이유도 여학생이 바지입으면 남자처럼 앉을까봐라고 함*

 
이처럼 사회 문화는, 그것도 특히 일본과 한국의 사회 문화는 이렇게 여자와 남자가 정 반대되는 바디랭귀지를 갖도록 오랜세월 의복과 가상매체를 통해 교묘하게 세뇌시켜 왔고 그 결과 우리는 남성은 dominant 한 바디랭귀지를 취하는게, 여자는 submissive 한 바디랭귀지를 취하는게 당연한거라고 내면화 되었다.

그 결과 남자가 서열이 낮은 사람의 자세를 취하면 "너는 남잔데 왜 그렇게 앉냐" "똥 마렵냐" "남자답게 앉아라" "사내새끼가 왜 그렇게 늘 위축이 되어있냐"며 꾸지람을 듣고, 여자가 서열이 높은 사람의 자세를 취하면 "여자가 기가 세다" "계집애가 조신하지 못하게 어딜 그렇게 앉냐" "여자애가 좀 조신하게 앉아라" 라며 호통을 듣는다.

심지어 같은 여자들끼리도(페미니스트, 남혐이라는 여자들조차 적어도 앉는 자세에 관해서는) 서로서로를 검열하며 지적질을 해댄다. 어머니나 언니, 여동생, 여자친척, 할머니, 여성친구등에게 이런 지적을 한번도 받아보지 않은련은 아마 동양에는 절대 없을것이다. (한국과 일본이 유독 심하다. 나는 캐나다련이고 유렵여행이 취미인데 여성인권이 높은 서양선진국들일수록 여자들이 공공장소에서 남자처럼 앉으며, 남자처럼 앉아있어도 진짜 아무도 뭐라 안한다. 반면, 여성인권이 낮은 한국과 일본같은 나라의 지하철을 보면 남자들은 하나같이 쩍벌, 여자들은 하나같이 공손하게 무릎을 모으고 앉아있다)

한가지 충격이었던건, 캐나다에서 버스를 탔는데 치마를 입고 다리를 남자처럼 벌리고 앉아 속옷이 보이는 여자가 있었다. 그런데 다들 못본척 할뿐, 그 누구도 조금이라도 내색하거나 뭐라 하지 않았고, 심지어 바로 옆에 앉아 수다를 떨던 지인도 버스에 내릴때까지 다리를 오무리라는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만약 한국이었으면 남자들은 그곳을 뚫어져라 쳐다보거나 낄낄거리고 성희롱 하고 몰카를 찍으며, 이때쯤 꼰대 아저씨/아줌마가 등장해 다리를 오무리고 앉으라고 훈계를 하며, 옆자리의 친구도 "어휴~~야!!! 다리좀 오무리고 앉아!!! 다 보이잖아!!!" 하고 쪽을 줬을것이다.

 그런데 캐나다는 여성 본인의 주체성과 신체자유도를 고려하여 자기가 다리를 벌리고 앉아서 속옷이 보이는것조차 그녀 본인의 주체적 선택이기 때문에 존중하고 아무말도 하지 않은거다. *치마를 입고 다리 벌리고 앉으라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여성의 신체의 자유도와 civil right가 존중된다는걸 예를 든거다*
 
아까 위에서 냄져들이 의복과 가상매체를 이용해 여자에게 낮은서열의 바디랭귀지를 세뇌시킨다고 했는데 좀 더 얘기해 볼 필요가 있다.

일본애니/한국웹툰과 미국영화/서부가상매체 에서의 여성의 바디랭귀지 묘사를 비교해보자. 

 
-일본애니나 한국웹툰/만화/게임에선 (심지어 여성향 미연시 게임에서조차) 여캐들이 반드시 여성스러운 바디랭귀지로 묘사된다. 


일본 애니에서는 한번도 예외없이 모든 여캐들은 앉을때 다리를 얌전히 모으고 앉거나 八자로 붙힌채로 앉고, 서있거나 뛰어갈때, 춤을 출때도 몸의 움직임 묘사가 소극적이며, 언제나 ^여성스러운^ 포즈와 자세만을 취한다. 여캐의 모든 움직임은 귀여운척, 약한척, 모자란척, 그리고 아양떠것으로 일축된다.


반면, 남캐들은 온갖 센척, 시크한척, 멋있는척, 까리한척, 온갖 허세란 허세는 다 부린다. 여캐와 남캐의 바디랭귀지, 앉는 자세, 취하는 포즈등을 비교해보면 귀족과 노비급으로 다르다. (페미니스트 선언한 여자웹툰작가들도 다르지 않은데, 외모는 남캐 여캐 평등하게 그리면서, 바디랭귀지 코르셋은 아직 못 벗은 듯)

일본 남캐와 여캐의 바디랭귀지 비교.jpg (한국 웹툰도 만만치 않은데 일일히 캡쳐하기 귀찮아서 패쓰) 

한국투디 뿐만 아니라 한국영화나 드라마도 다르지 않노 (여자들이 앉은 자세를 주목) 

 


-반면 서양투디나 서양영화에선 여캐/여자배우가 땅바닥이던 벤치의 의자던 남자처럼 까리하게 다리를 벌리고 터프하고 간지나는 자세를 취하는 씬이 자주 등장한다. 예를 들면 Fast and the Furious 시리즈의 여주인공이나 Edge of Tomorrow 의 에밀리 블런트, 그리고 그 유명한 아바타에서 네이티리도 상당히 야생적이고 '여자로서 길들여 지지 않은', 자유로운 몸가짐을 취한다. 

한국이나 일본의 가상매체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사실상 전무한) 여성의 포즈다.  

넘어가서, 의복에 관해서: 특히 일본이 대표적이다. 한국은 일본의 악습을 그대로 답습함. 


-역사적으로 일본은 기모노를 입혀 여성의 움직임을 최대한으로 제한시켰다. 딱딱한 겹으로 온몸을 위아래로 둘둘 감아놔서 잘 움직이지도 못하고, 다리사이에 공간이 없어서 큰 보폭을 더딜수가 없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며 (쫑쫑쫑쫑 또는 오도도도 걸어야함), 모든 신체의 움직임의 속도가 느려지고, 작아지며 말그대로 끼릭끼릭 움직이는 인형으로 만들어놨다. 여성에게 기모노를 입힌 가장 큰 이유는 예뻐서가 아니라 바로 여성의 신체자유를 억압하고 서열이 낮은자의 바디랭귀지를 강요하기 위함이었다.


-역사적으로 일본은 여성에게 무조건 무릎을 꿇여앉혔다(아직도 그렇다). 그러면서 냄져들은 근-엄-하게 양반다리를 하거나 다리를 쭉 뻗고 앉는다.

-일본여자들이 안짱다리,오다리가 많은 이유는 가만히 서 있을때조차 발끝이 안을 향하라고 문화적으로 강요받기 때문이다. (이런자세는 위엄과는 거리가 먼, 유아스럽고 ^날 귀엽게 봐주세요 뿌잉^하는 자세다.) 

-일본은 일부러 여학생에게 최대한 짧은 치마교복을 입힌다. 치마가 짧을수록 몸가짐을 조심해야되서 그렇다. (한국과는 반대로) 치마가 길수록 몸가짐을 조신하게 하지 않으려는 여학생 = 불량스런 여학생으로 취급한다. 일본만화에서 불량스런 양아치 역할의 여학생들의 치마가 전부 긴 이유가 그때문이다. (반대로 남학생들에겐 존나 편한거 입히고 바지의 주머니도 꼭꼭 준비해줌^^)그래서 여학생들은 짧은 치마때문에 속옷보일까 불안해서 그 긴 시간동안 의자에 무릎 딱 붙히고 앉아서 불편하게 공부하는 동안 남학생들은 쩍벌하거나 건방지게 바지에 손 찔러넣고 다님. 

-한국도 치마길이에 대해서만 다를뿐, 여학생들에게 같은 이유로 교복치마를 입힘.
-서양은 공립학교는 사복을 입는데 사립학교, 특히 종교적인 학교일수록 교복치마를 입힌다. 종교=여성억압=신체자유도 제한=치마

 
면접:
-가장 공손해야할 면접에서조차 남자는 비교적 당당한 자세를, 여자는 서열 최하위의 자세를 요구함 (사실상 노예 말고 여자보다 더 겸손한 자세로 앉아야 하는 집단이 세상에 존재하기는 할까?) 만약 남자가 여자처럼 앉거나 여자가 남자처럼 앉으면 면접광탈! 엥? 이거 성차별 아니냐?

남돌은 되고 여돌은 안 되는 것

지는 맨날 다리 벌리고 앉으면서 하니는 "여자니까" 그렇게 앉으면 안된다는 강남.jpg                                                    
하니는 저 말 듣고 바로 화들짝 놀라며 다리를 억지로 오므림... 강남은 계속 쩍벌 유지함.

방송에서 한번 남자처럼 앉았다는 이유로 캡쳐되서 빨간색 동그라미까지 쳐져서 아직도 "쩍벌하니" 라는 키워드로 놀림감이 된 하니.

방송에서 남자처럼 앉았다는 이유로 몇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쩍벌하니"란 짤방으로 인터넷에 돌아다니며 놀림감이 되고 있다. (사실 쩍벌도 아님). 그런데 하니가 앉은 자세는 모든 잦이돌들이 맨날, 아주 밥먹듯이 흔하게 앉는 자세이다. 만약 냄져가 저렇게 앉았으면 반응이 어땠을까? 너무나 당연해서 아무도 관심조차 안줬겠지. 즉, 냄져에겐 밥먹듯이 당연한 행동이 여자가 하면 이상한년, 가정교육 못받은년, ^려성성 없는년^이 되서 몇년을 놀림당하고 욕먹는거다.

 어쨌든 지금까지 한말을 요약하면, 

1. 바디랭귀지는 권력과 서열을 의미한다.

2. 서열이 높은자일수록 과시적이고 군림하는 자세를 취하며,

3. 서열이 낮은 자일수록 위축되고 움츠러들고 서브미시브한 자세를 취한다.

4. 그런데 냄져가 서열이 높은 사람의 행동과 자세를 하고있고, 여자가 서열이 낮은 사람마냥 굽신거리고 있다.

5. 이건 영악한 냄져들이 남성성=군림하는 바디랭귀지, 여성성=순종적인 바디랭귀지라는 좆렬한 공식을 만든뒤 온갖 의복과, 문화, 전통, 가상매체를 동원해 사회적 불문율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6. 그 결과, 안타깝게도 여자들은 순종적인 몸가짐을 해야한다고 스스로 내면화 하기에 이른다 = 몸가짐 코르셋, 바디랭귀지 코르셋 

7. 이걸 반드시 깨버려야 한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몇가지 팁을 준다.


1) Allan Peace의 "Definitive book of body language"라는 책을 읽고 서열이 높은자의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바디랭귀지를 연마해라. 이것 말고도 바디랭귀지를 다루는 책은 자기계발 코너에 널렸다. *주의할것은 책에 나오는 ^려성적^ 바디랭귀지는 씹고 남성적 바디랭귀지만 습득해라* 


2. "욕망이라 불리는 전차"에서 말론 브랜도, "오션스 일레븐" 나 "파이트 클럽"에서의 브래드 핏, "하늘에서 떨어지는 일억 개의 별"에서의 기무라 타쿠야,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 등을 보고 몸짓, 앉는자세, 걸음 걸이 등 모든것을 따라해보라. (하늘같은 여자가 하등한 냄져를 따라하는게 좆같지만, 안타깝게도 이정도급 지배적인 바디랭귀지를 취하는 사람은 죄다 냄져배우 밖에 없어서 어쩔수가 없다. 아까 예를 든 여배우들조차 얘네들에 비하면 명확한 한계가 있다.)


3. 자세를 가다듬어라. 가슴과 어깨는 쫘악 펴고, 목은 꼿꼿이, 고개는 정면을 보고 큰 보폭으로 시원스럽게, 그리고 거만하게 걸어라. 똥폼잡는 냄져새끼들처럼 주머니에 손까지 찔러 넣어주면 금상첨화. (물론 하등한 냄져가 하면 똥폼이지만 여자가 하면 멋있다)


4. 해맑게 웃지말고 시크하게 웃어라. 윗니가 드러나는 웃음은 부드러운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를 드러내지 않고 입꼬리만 올라가는 (눈웃음이 동반된) 웃음은 거만함, 자신감, 즉 '내가 너보다 더 잘났다'는 뉘앙스를 풍기게 된다. 남자 모델들의 표정은 거의 두가지다. 위압감 있는 무표정과 입꼬리만 슬쩍 올리는 썩소. 이것도 빼앗아와야 한다. 거만해보이고 강해보이는 모든 바디랭귀지를 여자것으로 만들자. 


5. 가능한 많은 공간을 차지하라. 신하/노예/찐따/빵셔틀처럼 쭈굴거리며 움츠러든 자세나, 몸둘바를 모르겠다는 듯이 송구하게 앉지 마라. 너는 죄인이 아니다. 하녀도 아니다. 순종적이게 ^착하게^ 보일 필요가 없다. 자신을 낮출 필요가 없다. 다시는 스스로를 낮추는 자세 따위 하지 마라. 다리를 벌려라. (민폐급으로 쩍벌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다리는 자신의 어깨넓이만큼 벌리는게 적당하다.

 많은 공간을 차지하는 것은 상대에게 '난 느긋하고 여유롭다, 나는 너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고릴라, 침팬지의 세계에서도 우두머리 수컷은 팔과 다리를 벌리고 몸을 크게 함으로서 자신의 지배력을 과시한다. 반면 서열 최하위 수컷들은 구석에서 위축된채로 찌그러져있다. 서열 최하위 수컷들이나 하는 바디랭귀지를 니가 하지 마라. 


6. 닫힌 바디랭귀지를 삼가하라. 교수님을 만나거나 길에서 여러운 선배/직장상사를 만날때 은연중에 양손이 맞잡아 지는 경험을 했던가? 자기방어의 본능이다. Closed body language는 다리나 손을 모으거나 교차함으로서 심리적인 방패를 형성하는것이다. 가슴에 책을 양손으로 껴앉고 있다던지 앞으로 팔짱을 꼈다던지 이런건 별로 좋은게 아니다. 자연스레 손을 내려라. 너의 가운데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허벅지의 양쪽 바느질 선 정도에 위치할 수 있도록. 목, 배, 생식기 등 연약한 부위를 가리지 않음으로서 '내가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없다'는 메세지를 주는것이다. CEO가 시찰 돌때 손을 뒷짐지듯 잡는걸 봤는가? 신체의 정면을 전적으로 오픈 하는 행위로서 자신의 dominance 를 극대화 하는 것이다. 서열이 높고 강자일수록 자신의 몸을 많이 오픈한다. 두려울게 없기 때문이다. 서열이 낮고 약자일수록 자신의 몸을 가리려고 하고 부끄러워 하고 방어하려 한다. 자신이 약한것을 알기 때문이다. 약한자가 되지 마라.


7. 거만포즈 몇개 추천한다: 허리춤에 손을 꼽되 손끝은 사타구니 쪽을 향하게, 혹은 손가락을 바지 주머니에 꼽되 엄지 손가락은 나오게 해봐라. 엄지 손가락은 자신감의 상징이다. 냄져들이 엄지손가락으로 자기자신을 가르키거나 지 옆에 있는 사람을 가르키는걸 종종 봤을것이다. 그리고 사타구니 쪽을 향한 손의 끝은 생식기를 강조함으로서 성적으로 당당한 sexual threat이미지를 극대화한다. 서부영화에서 개까리한 악당이 문을 박차고 들어와서 어떤 자세로 서 있던가?

또한, 기도하듯 양손을 맞대거나 손가락 끝 끼리 서로 다 닿되 손바닥은 떨어진 (손으로 지구본을 만들듯) 모습을 취해본다. 전자의 경우는 '대부'의 알파치노가, 후자의 경우는 영화에 변호사, 의사, CEO 역할로 나오는 사람들이 자주 취하는 행동이다. 후자의 경우 지적으로 여유있고 유능한 느낌을 준다고 한다.

8. 몸을 기립하라. 가장 키가 커 보이는 자세로 등을 펴고 꼿꼿이 서라. 척추와 다리가 굽지 않고 일직선이 되야한다. 발끝은 절대 안쪽으로 모으지 말고 바깥을 향하게 서라. 자세 교정은 웨이트 트레이닝 (특히 스쿼트나 데드리프트)를 통해 할 수도 있고 혹은 요가 아니면 alexander technique 이라 불리는 자세교정 테크닉이 있다. 어떤 경우든 slouch (몸을 수그리는, 움츠리는) 자세는 하지 마라.



마지막으로, 글을 마치며: 당당한 바디랭귀지는 당당한 말투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너는 남자보다 서열이 낮은 존재가 아님을, 스스로를 낮춰야 할 필요가 없음을, 그리고 적어도 남자만큼은 건방지고 거만해도 될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하고 보지에 새겨라.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서열 최하위 수컷들이나 하는 ^여성스러운^ 바디랭귀지는 절대 하지 마라. 조금이라도 남자 앞에서 쭈굴거리는 순간, 보지대장부 자격 박탈이다. 그럼 이상. 

우리 이제 여기서 그만 벗어나자.

만약에, 여남의 바디랭귀지가 지금과 반대였다면, 남자들은 진작에 들고 일어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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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혜리(Hyeri Nam)

6B radical feminist,lesbian,liberal right-winger, atheist,contents 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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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코르셋인가?

-  필자는 애매한 경우 코르셋이냐 아니냐를 구분할 때 다음의 기준을 적용한다.

(논란이 되는 행위에 대해) 이는 내가 온전히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행위인가?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행위라면 코르셋이 아니지만, 자발적으로 할 수 없다면 코르셋이 맞다. 

  이 때, 본 글에서 제시하는 '자발적으로 할 수 있다'는 내가 문제의 행위를 하기로 선택하는 데 있어 외부적 압력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외부적 압력이 존재하는지를 판단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특정 행위를 하지 않았을 때 외부의 시선을 살펴보는 것이다.
(쉽게 말해,"만약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가 없으면 어떻게 될까?"라고 가정해 보는 것이다.)

  한 예로, 더치페이를 들어보겠다. 한국에서 남자친구를 사귀는 많은 여성들은 더치페이를 한다. 그리고 대부분 자신이 자발적으로 데이트 비용을 지불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들에게 더치페이를 하지 않는 상황- 외국처럼 남성이 모든 비용을 부담하는 것-을 가정해보라고 하면, 대체로 [무개념이다/김치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부담을 주냐] 라는 반응이 나온다.
  또한 실제로 많은 남성들이 더치페이를 하지 않는 여성을 포함하여 자신보다 높은 소비수준의 여성들을 김치녀라고 비난하고 조롱한다.
   즉, 더치페이란 연인 사이에서 지극히 당연한 규범으로 굳어진 것이고 이를 거부하면  사회적인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같은 여성에게까지 말이다. 

  따라서, 더치페이란 행위를 선택하는 것은 외부적인 압력이 존재하므로 자발적인 행위가 아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무개념녀,김치녀가 되지 않기 위해 학습한 관습적 규범일 뿐이며,  더치페이는 코르셋이다.

  또다른 예시를 들어 보겠다. 상당히 도발적인 문제제기인데,  '효도'와 '애국' 역시 코르셋이라 할 수 있다. 

  우선 효도 코르셋부터 논의해 보겠다. 대한민국에서 딸은 가정에서 어떤 존재로 여겨지는가? 남자 형제가 없는 집이라면 잘 느끼지 못할 수도 있으나, 딸은 기본적으로 "더 순종적이며, 노후에 더 부양해줄 것 같은" 존재로 간주된다. 동시에 "모부, 특히 엄마를 더 이해해줄 것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순종, 감정 노동, 높은 공감능력, 도덕성> 이런 것들은 사회에서 흔히 여성에게 요구하는 여성성 규범들이며  모부가 페미니즘을 공부하지 않은 한, 이러한 규범은 그대로 딸에게 자식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된다. 아들의 경우에는 오히려 철없고 반항적인 이미지가 연상되기 때문에 이런 규범들이 상대적으로 덜 강요된다. 
  
   실제로, 딸들은 어버이날에 실용적이고 좋은 선물을 해도 아들의 선물보다(그게 흔한 꽃바구니라 해도) 평가절하되는 경향이 있다. 가사노동에 대한 이중잣대는 말할 것도 없으며, '가족들을 더 잘 챙겨야 한다'고 요구받는다. 남자형제가 없는 내 경우, 엄마는 '가족을 더 잘 챙기는' 여동생과 비교하며 나를 이기적이라느니 사회성이 모자라다며 20년이 넘도록 가스라이팅해 왔다.

  또한 딸들은 자신이 지독한 성차별을 당하고,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으로 쓰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강요당하는 입장이기도 하다. 내면화된 코르셋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도 피해자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도 가족들을 위해 일했으니까",  "내가 용서하기만 하면 행복해질 거야"라고 말한다. 동시에 만약 용서하지 않고 연을 끊는다던가 하면 '비정한 패륜아'고 '이기적인 썅년'이 되리라 협박한다. TV에서 보여주는 화목한 가정만이 정상이라고 말하며 나를 부적응자로 만든다.

  애국 코르셋은 어떤가. 나라를 지킨 여성 독립운동가, 여성 문인, 과학자, 예술가 등등 수많은 여성들은 역사 가운데 지워지고 평가절하당해 왔다. 그러나 많은 남성들은 바람둥이거나 심한 성차별적인 발언을 해도 그 이론이 인정받고, 업적이 인정받고, 이런 것에 문제제기해봤자 옥의 티로 취급하든가 듣지를 않는다.

여성의 역사는 지워졌고 남자들이 일으킨 전쟁에서, 그 잘난 남자들이 나라를 지키지 못했는데 항상 더 착취당해 왔다. 전쟁에서 여성은 전리품이었고 성착취 대상이었으며 공로를 남겨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점들을 비꼬면서 "여자들에게는 국경도 나라도 없어" 라며 내 진짜 국적은 어디라고 말하거든 그건 또 나라에 기여한 것도 없으면서 감사할 줄 모르는 썅년이 된다. 

  즉 정리하자면, 코르셋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여성혐오에 기반한)사회적인 압력, 비난을 받지 않는 자발적 선택이 가능한가?" 에 달렸다. YES면 코르셋이 아니며, NO는 코르셋이다.

코르셋, 어떻게 해야 하지?

자유주의자와 급진주의자의 대립구도
- '역코르셋'과 '가부장제 재생산' 


  그러면 이 코르셋을 어떻게 다뤄야 할 것인가?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관점이 있다. 바로 자유주의자들과 급진주의자들의 관점이다. 자유주의자들의 경우에는 주로 <나쁜 페미니스트>를 근거로 들며 우리가 완벽할 수는 없으며 가부장제의 영향을 받은 것들 모두를 거부할 수 없다는 논리를 구사한다. 또한 이 코르셋 역시도 개인의 주체적인 행위 실천이 될 수 있다고까지 한다.(ex: 화장, 로리타 클리셰들) 주로 급진주의자들을 공격할 때 쓰는 프레임은 "여성의 자유에 대한 검열", "역코르셋"이다.
  
  여기에 반기를 든 급진주의자들의 관점은 그러한 코르셋은 가부장제 하에서 남성들이 여성들에게'만' 강요하였던 선택이므로 가부장제에 대항하기 위해서 코르셋들을 거부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들은 코르셋을 벗기 어렵다는 사실과 자신 역시 완벽한 페미니스트가 아님을 인정하지만, 적어도 코르셋을 '개인의 자율적 선택'차원으로 해석하는 시도를 그만두고 구조를 보라고 요구한다. 자유주의자들을 공격할 때 사용하는 용어는 "가부장제의 부역자", "흉자"이다.

  우리는 이미 "여성의 로리타룩 소비"를 가지고 개인의 주체적 선택의 문제로 볼 것인가, 혹은 구조의 문제로 볼 것인가로 싸운 적이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비단 로리문화에 한정되지 않고, 더 넓게는 모든 코르셋을 가지고 입씨름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나는 여기서 입장을 미리 분명하게 정하려고 한다. 

- 래디컬 페미니스트로서 나의 입장:
코르셋, 발견하고 경계하라

  앞서 코르셋은 여성을 억압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사용되는 규범이라고 정의하였다. 즉, 코르셋은 기존의 여성혐오적인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

  가장 심한 코르셋 중 하나인 외모 코르셋은 여성에게 특정한 얼굴,몸매,화장, 패션 등을 강요함으로써  사회에서 요구하는 여성상 ( 여리여리하고 순종적인, 어려보이는 이미지)에 맞추도록 요구한다.  기존의 틀에 맞지 않는 여성들은 손쉽게 후려치기를 당하고 고나리질의 대상이 된다. 동시에 외모 규범은 여성들에게 "예쁜 외모가 권력이다"라고 세뇌시키면서 많은 남성들에게 선택받고 예쁘다는 칭찬을 받는 일이 여성으로 누리는 최고의 행복이라고 속삭인다. "못생겼다, 살 좀 빼라"라는 비난과, "예쁘시네요"라는 칭찬은 둘 다 외모 품평이며, 여성을 평가받는 상품으로 대상화한다. 

   결혼-출산을 강요하는 프레임은 또 어떤가. 결혼하지 않는 여성은 노처녀 히스테리라는 수식어가 붙고 하자가 있는 것으로 치부되며, "여자라면 아이를 낳아야지"라는 말은 비혼,비출산주의 여성과 불임 여성을 여성 집단으로부터 배제한다. '취집'이라는 표현 역시 결혼을 디폴트로 여기는 사고방식에서 비롯되었다. 아이를 원하지 않는 여성, 커리어를 중시하는 여성들의 존재는 지워진다. 웃기게도 여자들끼리의 동성 결혼은 비정상으로 취급한다는 점에서 결국 결혼-출산 프레임은 여성을 남성에게 종속시키고 아이를 낳는 존재로 규정한다. 

  이 외에도 여러 코르셋들이 있으나, 대표적인 것들만 예시로 들어 보았다. 이러한 코르셋은 페미니스트 개개인이 끊임없이 발견하고 거부해야 하며, 개인의 주체적인 선택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그 이유로는 첫째, 
당신은 이미 욕망을 체화해 왔기 때문이다. 여성혐오는 인류가 모계 사회에서 부계 사회로 이동한 이후 가부장제와 뿌리를 나란히 하여 유지되어 온 것이다. 또한 앞서 포스팅에서 밝혔듯이 우리 개개인은 상대적으로 자주 노출되는 것을 욕망하게 된다. 우리는 자주 들은 음악에 꽂히고, 자주 본 것을 기억하지, 아예 모르는 것에 이끌리지는 않는다. 당연히 미디어에서 지속적으로 생산하는 미의 기준에 맞추는 것이 편하지, 그에 반대되는 선택을 하는 건 비정상적인 것 같다. 너도나도 성형하고 다이어트하니까, 다들 예쁘게 꾸미고 화장하니까 따라가기 쉬운데, 사실 페미니스트들은 이게 주입된 욕망이란 걸 알고 있잖아. 정확히는, 우리 대부분은 페미로 정체화하고 나서 알게 된 것들이잖아. 과연 내가 가진 욕망들은, 가부장제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둘째, 새로운 선택지를 알아도 실천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흔히들 페미니즘은 여성들에게 선택지를 넓혀 주었다고들 말한다. 화장, 제모, 다이어트, 성형과 같이 기존에 너무 당연하게 여겼던 규범들이 사실은 '당연하지 않았다'라는 걸 일깨워 준다고 말한다.

   거기까지는 좋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긴다면 뭐가 달라질까. 늘어난 선택지와 기존의 선택지. 얼핏 보면 그냥 별 차이가 없겠지만 두 갈래 길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히 다르다. 늘어난 선택지가 아닌 기존의 선택지, 즉 남성중심사회의 미적 기준에 맞추는 걸 선택한다면 그건 '변화'도 '해방'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 행동은  페미니즘에 관심없는 여자들이 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뿐더러, 변화나 해방은 억압 때문에 기존에 내가 하지 못했던 것, 할 수 없었던 것을 시도하게 될 때 쓸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아니, 엄연히 저 흉자들과는 마인드가 다른데 어떻게 똑같은 취급을 할 수가 있냐"고? 일제 식민지 시대 때 독립의 필요성을 느낀 건 비단 독립운동가들뿐이었을까? 제국주의 권력에 착취당하는 일반 민중들 중에서도 분명 있었다. 그러면 그 사람들도 같이 역사에 남아야 하는데 왜 그렇지 못했을까. 한마디로 '차원이 달라서', 머리로 아는거랑 실천하는 거랑은 차원이 달라서 그렇다. 전자는 힘을 가질 수 없지만, 후자는 힘을 가지고 주변 사람들의 변화를 함께 이끌어낸다.

- <나쁜 페미니스트>를 사유하며

<나쁜 페미니스트>의 저자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말의 배경에는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극심한  검열이 있었다. 도덕적이어야 하고, 가부장제의 산물은 무조건 멀리해야 하며 결단코 타협해서는 안 되는 근본주의와 뿌리를 같이하는 면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어쩔 수 없이 현실과 타협해야 하는 지점이 있음을 알고 있다. 코르셋인 줄 알면서도 면접을 보기 위해 화장을 하고, 내가 하는 일이 여성에게만 부여되는 돌봄 노동, 감정 노동인 줄을 알면서도  '여성성'을 수행한다. 그렇지 않으면, 짤릴 테니까. 

   또한 가부장제라는 체제 하에 어디까지 나의 욕망과 취향이 자유로운지 선뜻 구분해내기는 어렵다. 우리는 프레임에 갇힌 사람들을 코르셋이라고 부르며 이들을 계몽의 대상쯤으로 여기지만, 사실 우리 역시  코르셋을 풀어가는 단계 어딘가에 있다. 갓치-코르셋-흉자(명자)의 삼분법은 구분이 명확하지 않으며, 코르셋을 하나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코르셋으로 분류된다면, 갓치는 '완벽한 페미니스트' 라는 존재로 성녀화될 뿐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나쁜 페미니스트'는 의미를 갖는다. 페미니스트들이 지독한 자기검열과 비타협적인 태도, 그리고 도덕성을 요구받으며 고통받았기 때문에 "완벽하지 않아도 페미니스트야"라는 말은 큰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말은 가부장제 문화에 대한 비판적인 검열을 멈추라는 뜻이 아니다. 스스로 완벽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네가 페미니스트네 아니네 타인을 함부로 재단하지 말라는 뜻이지, 당신이 향유하는 문화, 취향과 같은 것이 코르셋이라도 전혀 문제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는 완벽주의의 압력에 지친 사람들을 위한 위안이지, "그러니까 지금 이 상태에 머물러"라고 안주하는 상태를 정당화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완벽하지 못하다고 해서 타인을 설득할 자격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 논리대로라면, 유치원 교사는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하면 안 돼'라고 가르칠 수 없거든. 도덕적으로 완벽한 교사만 도덕을 가르칠 수 있나? 그거 아니잖아. 완벽하지 않은데도 우리가 교사의 자질 운운하지 않는 건, 교육을 통해 '무엇이 바람직한지'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코르셋을 다 못 벗었어도 이 글을 쓸 수 있는 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억압에 대한 저항이니까. 그 가치를 우리가 공유하고 있으니까 그렇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러나 거기에 멈춰 있지는 말기를. 완벽하지 않다고 해서, 우리가 코르셋을 거부하는 행동 자체가 무의미한 것도 아니고, 그게 어떤 의미인지도 알잖아. 당장 다 벗으라는 말은 하지 않지만, 하나씩은 천천히 시도해 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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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혜리(Hyeri 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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