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페미니스트들 대상으로 여성신문에서  설문조사를 하길래 참여했다. 질문이 여러 개 있었는데, 그 결과가 오늘 다음과 같이 기사로 발표되었다. 

존경하는 여성 인물들 중에서는 1위가 강경화 장관, 2위가 박근혜 대통령, 3위가 심상정 정의당 대표였다. 평등을 저해하는 인물로는 모든 남성이 1위이며 구체적인 인물로는 문재인이 1위, 홍준표가 2위, 트럼프 남통령이 3위에 뽑혔다.

여성신문과 이 언론을 팔로우하는 사람들의 정치적 성향을 생각했을 때, 박근혜 대통령이 순위권이라는 건 꽤나 주목할 만한 일이다. (참고로 남통령에 대한 규탄은 주류 좌파 여성단체들도 한다.) 이 투표결과는 "20대 여성=좌파/문재인 지지자" 프레임에 대한 반박이 된다는 점에서도 꽤 인상깊다.

한편으로는 "설문을 어떻게 한 거냐"라며 투표 결과에 대해 미심쩍어하는 반응들을 보고 씁쓸해졌다. 20대 여성= 좌파(특히 문재인 지지자)라는 프레임이 얼마나 우리 사회에서 견고한지를 다시금 실감했기 때문이다.

   문재인을 욕하고 또한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는 20대 여성들은 소수이다. 실제로 그런 커뮤니티의 회원수와 좌편향된 커뮤들의 회원수를 비교하면 채 1/10도 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여성 커뮤니티에서 단지 좌편향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다는 이유로 활동중지를 당하여 발언권이 박탈당한 사람들이다. 남통령 문재인이 여성의 목소리를 먹금한 것을 비판하고,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여성혐오임을 밝힌 죄로 발언권을 박탈당한 사람들이다. 이런 우리가 투표로 목소리를 내겠다는데 그조차도 아니꼬운 모양이다. "좌표를 찍었네", "과정이 공정하지 않네" 그저 결과가 못마땅한 것 아닌가?

  우리는 그만 지워지고 싶다. 만약 있다면 "그는 반드시 일베이거나 워마드일 것이다", "자한당 알바냐" 라는 말로- 한마디로 비정상적인 존재라고- 그만 낙인찍히고 싶다. 이것은 지독한 편견이며, 다른 정치적 성향을 인정하지 않는 파시즘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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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혜리(Hyeri 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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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저는 트위터에 한번 정치적 레즈비어니즘 개념에 대한 정리 트윗을 타래로 엮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동시대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인 아드리안 리치의 개념과 함께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아래는 아드리안 리치의 강제적 이성애와 레즈비언 연속체 개념을 중심으로 정리한 카드뉴스로 개인 인스타그램에 우선 정리한 것들입니다. 내가 카드뉴스 다시 만드나 봐라

1부: 강제적 이성애 개념

2부:레즈비언 연속체 개념

3부에선 정치적 레즈비언으로 산다는 실제적 의미가 무엇인지, 레즈비언 집단과 이성애가부장제 사회와 함께 엮어서 다뤄 보았습니다.

 4부...까지 나오지 않길 바라나 만약 쓴다면 앞서 언급된 것들 외에 질문으로 구성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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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혜리(Hyeri 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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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여성의제만 신경쓰면 되는 거 아냐?

   그 여성의제가 무엇인지부터 짚어 보도록 하자. 여성의제란 무엇인가. 여성의 삶- 정확히는 여성들의 권리, 이익과 관련된 사회적 문제가 여성의제다. 그리고 어떤 사회적 문제로부터 여성인권 이슈를 뽑아내서 공론장에 올리면 그것이 여성의제가 된다.

  일전에 예멘 남민(난민의 대부분이 남성이었다) 수용 문제로 한창 페미판이 뜨거워진 적이 있었다.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선진국의 사례를 들어 자국 여성들이 성폭행당할 것을 걱정했으나, 모든 차별에 반대하는 페미니스트들은 교육을 하면 괜찮다, 수용해야 한다면서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을 ‘극우 세력과 손잡았다’, ‘난민혐오자’라 비난했다.

  난민 수용 문제는 겉보기에는 여성과 직접 관련이 없어 보이는 문제지만, 파고들면 우리 삶과 연결되어 있다. 이 문제는 자국 여성의 안전과 연결되어 여성의제가 되었다. 다른 예로 빈곤 문제를 생각해 보자. 겉으로 보면 그저 경제 문제처럼 보인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들은 여기서 ‘여성의 빈곤’을 끌어냈고, 구체적으로 ‘여초 직장의 저임금 현상’과 ‘유리천장’, ‘고용 차별’등을 분석했다.

  그러니까 여성의제는 처음부터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다. 의제 하나하나가 철저히 페미니스트들의 해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사회문제를 여성인권과 연결짓고, 구체적인 여성의제를 공론장에 올리고, 대중적인 지지를 모으고, 구체적인 법안 발의와 시행까지 끌고가는 일련의 과정은 지극히 ‘정치적’이다.

  또한 대통령 및 집권당의 성향과 국회의 구성, 사법부의 성향은 법률의 제/개정, 시행여부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여성인권에 관심이 높은 정부일수록 관련 부처 예산을 늘리고 여러 통계 지표를 신경쓸 것이고, 반대의 경우라면 시위를 해도 ‘먹금’할 가능성이 높다. 기존 법률이 여성혐오적일 경우, (예: 낙태죄) 헌법재판소에서 이를 위헌이라고 판결해야 한다. 그리고 재판관을 임명하는 데 국회와 대통령의 입김이 들어간다.

   그러니 어떻게 정치를 신경쓰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나?    우리가 하는 시위와 청원과 서명운동 등등은 모두 정치적인 활동이 아니었나. 나는 정치와 여성인권을 엮지 말라고 말하는 사람이야말로 정치감각이 떨어지거나, 여성의 무지로 이득을 취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역사적으로 1물결 페미니스트들의 대표적인 업적이 ‘여성의 참정권 획득’임을 생각한다면, 정치 엮지 말라는 말은 모욕에 가깝다. 정치꿘이다 뭐다 말이 많은데,  여성운동에 빨대 꼽는 ‘꿘’도 정치적 흐름을 읽어내야  먹버를 당하는지 아닌지 알 수 있지 않나?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서프러제트들의 활약으로 누리게 된 참정권을 막연한 정치혐오로 썩히지 말라. 스스로 공부하고, 뉴스 댓글과 sns, 가능하면 오프라인에서도 정치적 견해를 더 많이 피력하라. 나는 여성들이 여성혐오 관련 기사 댓글들을 점령하는 것뿐 아니라 정치기사 댓글 성비마저도 뒤집어놓길 바란다.

#정치기사에_댓글달기


-본 글은 인스타그램(http://Instagram.com/thinkwomenfirst)에 우선 카드뉴스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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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혜리(Hyeri 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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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제도가 어떻게 가부장제를 지탱하는지에 대한 수많은 분석을 바탕으로, 현재 4B(비혼-비출산-비연애-비섹스)는 여성주의 실천의 기본 중의 기본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여성주의자들은 4B담론에서 이성애 관계만을 비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최근에는 '레즈연애도 혐애'라면서 레즈비언 관계까지 비판을 확장하였고,  이에 따라 반-성애자antisexual[각주:1]  대 레즈비언 간 치열한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구도에서 양측이 간과하기 쉬운 지점이 있는데, 바로 비연애주의자 레즈비언의 존재다. 


참고로 필자는 여성에 대한 연애감정은 경험했으나 성욕은 누구에게도 느껴 본 적이 없어 플라토닉 레즈비언 혹은 무성애자 레즈비언이라는 말로 자신을 소개해 왔다. (섹스 안하는게 뭐 그리 유별난 일이라고 굳이 부연설명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만) 연애관계에 대한 환멸을 느껴 몇 달 전부터 어플도 지우고 살다가, 최근에는 아예 비연애주의자 선언을 했다. 


나는 레즈비언이고, 비연애주의자다. 
 
   순차적인 생각의 흐름을 통해 나는 비연애주의에 도달했다. 그중 첫번째 단계는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바람직한 연애관계의 범주를 좁히고자 시도한 것이고, 두 번째 단계는 연애 자체가 문제적이라 생각하여 적극적으로 비연애를 결단한 것이다. 
 
1. 이상적 연애관계를 설정하기

과거 서구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들은 폭력적인 이성애 관계를 거부하고, 여성들 간의 자매애를 장려하고자 여성 동성애를 정치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들이 레즈비언 자체를 숭배하고 모든 형태의 레즈비언 관계를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이 이성애를 거부한 근본적인 이유는 여성이 차별대우를 받고 착취당하는 것을 문제삼았기 때문이므로 그 연장선에서 레즈비언 관계에서 권력차가 성애화되고 이성애가부장제를 강화하는 지점들을 비판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부치/팸 역할놀이와 BDSM이다.  나는 래디컬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로서 이 분석을 받아들였고, 부치/팸 단어나 BDSM을 반대하는 것은 물론 그 외에 권력차를 성애화하는 양식, 가부장제에서 내면화한 욕망들이 없는지 탐구하였다. 그 중 내가 발견한 것들은 다음과 같다. 

  • 나이차 

   무조건 연상 혹은 연하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다. 직종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연령의 차이는 일반적으로 사회경력 차와 연결되며, 자연히 경제력, 사회적 지위의 차이도 따라온다. 그리고 나이차가 심하게 날수록 이러한 차이는 더욱 벌어진다. 더구나 한국이 나이주의가 심하고 같은 연령이 아니면 친구가 되기도 어렵다는 점을 감안할 때,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는 상관없이 '일단' 연상의 여성 혹은 연하의 여성과 만나고자 하는 태도는 권력차를 성애화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연상/연하를 선호하는 심리의 기저에는 나이가 많은/적은 사람에 대한 고정관념이 자리하고 있다. 예를 들면 연상의 여성에게는 관계를 ‘리드’하고 조언,봉사해주길 바라거나, 연하의 여성에게는  ‘애교’를 부리고 의지하길 바라는 식이다. 이런 고정관념을 가지고 연애하는 것이 부치팸 단어만 안 붙였다 뿐이지 나이주의에 기반한 역할놀이가 아니면 뭘까. 그리고 실제로 나이차를 이용해 어린 여성에게 폭력을 저지르는 일들도 발생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무조건적으로 연상/연하를 찾는 태도는 분명히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 애교, 키차이에 대한 선망 


   이 부분은 부치/팸 관계와 마찬가지로 여성성/남성성 역할수행에 포함된다. 애교는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권을 중심으로 하는 특수한 언어문화로 이성애 관계에서 주로 ‘여성에게’ 더 많이 요구된다.여성은 미숙한 어린아이의 특성을 따라함으로써 자신을 무해한 존재로 성애화하고, 남성은 애교를 즐기며 자신의 남성성을 확인받는다. 여성들 간의 애교라 해도 여성이 자신을 무해한 존재, 보호받을 존재로 성애화한다는 점,그리고 일반적으로  권력관계(대표적으로 나이 차, 지위)를 수반한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애정표현에 필수적인 요소도 아니고, 약자의 언어인 ‘애교’는 지양해야 한다.
  또한 키차이에 대한 선망도 문제적이다.큰 키, 좋은 체구와 같이 남성성으로 분류되는 신체적 특성에 끌리는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반드시 질문해야 한다. 나는 왜 하필 큰 키의 여성에게 끌리는가?올려다보는 느낌이 좋거나,의지가 된다거나 따위의 대답들은 으레 이성애자 여성들이 키큰 남자를 선호하는 이유와도 겹친다. 이들이 키큰 남자를 선호하는 이유는 그게 전형적인 남성 신체의 특성이고, 자신을 보호해줄 것 같은 듬직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그 심리적 기저에는 여성은 남성보다 신체적으로 열등하며, 따라서 보호받는 대상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즉 키큰 여성을 선호하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보호받을 대상으로 상정하는 일이다. 또한 이는 이성애 관계에 대한 모방심리일 수도 있다. 실제로 전형적인 부치-팸 관계를 수행하는 레즈비언들, 이성애 관계로 패싱하고 싶은 레즈비언들은 키 차이가 나는 상대를 선호했다. 키는 생물학적 성차와 관련되는 것으로 멀리서도 상대방의 성별을 짐작하는 데 유용한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더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찌됐든 하나하나 찾아가던 중에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따지다 보면 이상적인 연애관계가 있긴 한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왜 연애를 해야 하지, 나는 뭣 때문에 연애를 하고 싶은 거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의 흐름 끝에 나는 비연애라는 종착지에 도달하게 되었다.


2. 비연애주의에 도달하다 


 "가부장제의 잔재를 몰아내는 게 목적이라면, 래디컬 페미니스트끼리 만나는 거 괜찮지 않아?"

 많은 래디컬 레즈비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나 역시 그랬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괜찮지 않다. 그나마 각성했다 치더라도 우리 역시 가부장제에서 살아온 시간만큼 그 문화에 찌들어 있고, 친구관계도 권력차가 존재하는데 하물며 연애관계쯤이야. 래디컬 페미라 해서 인간성이 좋다는 보장이 없으며, 특히 에로스적 사랑은 그 권력차를 낭만화하여 우리의 판단력을 흐려놓기 때문에 더욱 경계해야 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레즈비언 혐오 조장이나 아웃팅 문제 때문에 쉬쉬했을 뿐 여성 간에도 사랑이란 이름으로 가스라이팅과 성폭력이 발생한다. 


   연애는 본질적으로 우리가 스스로를 상품화하게 만든다. 만남어플, 연애를 목적으로 하는 커뮤니티가 형성되면서 동성애 관계는 이성애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연애시장을 구성하였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공간은 주로 어플과 이쪽 커뮤, 바, 클럽 등으로 한정된다. 어플과 커뮤에서는 대개 프로필을 적고 자기소개와 상대의 조건을 적어놓는다. '너도 래디컬페미면, 너도 탈코했으면' 역시 내가 상대를 고르는 조건이다. 내가 상대방에게 원하는 기준을 세우고, 나 역시 상대방의 기준에 맞추며 짝을 찾는 과정에서 우리는 온전히 자유로운 한 개인일 수 없다.  물론 친구를 찾는 과정에서도 서로 마음이 맞아야 한다지만, 친구를 사귀는 과정에서 우리는 연애처럼 상대방에게  구속력을 행사하거나 은연중에 외모를 평가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성적 요구를 하지 않고 이로 인해 불편해지지 않는다. 세상에는 섹스 외에도 재밌는 게 많은데
 

  그리고 정말 20년씩 길게 사랑을 지속하는 경우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부럽다고 느끼는 것 아닌가. 현실적으로 사람 감정이란 변하는 것이니 헤어졌을 때도 생각해야 한다. 만약 둘 다 페미니스트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면 좁은 판이므로 시위나 강연, 스터디 등에서 마주치기도 쉽다. 서로 어색한 상황이 만들어지는 건 둘째치고, 연애 사실을 자랑삼아 말하고 다녔다면, 헤어지고 나서 남들의 안줏거리쯤으로 소비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CC나 사내커플의 단점이 그대로 적용된다는 뜻이다.

   물론 남들이 바라는 정말 이상적인 연애를 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델을 따라 연애를 하는 분위기가 주류가 될 수는 없다. 이는 결국 이성애자 여성들이 갖는 연애에 대한 환상과 크게 다를 것이 없으며, 연애상대를 찾고 만나는 과정에서 경제적, 심리적 자원과 시간을 투자한 만큼 실제 연애관계가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서로를 발전시키고 힘이 되는 관계가 굳이 연애라는 방식일 필요는 없다. 소울메이트, 혹은 멘토-멘티와 같이 서로를 구속하지 않으면서도 친밀한 관계들을  상상함으로써 우리는 여성 간 친밀성에 대한 지평을 넓힐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외로워서 연애를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말한다. 왜 외로움을 느끼는지 스스로 질문해 보아라외로움을 느끼는 이유로는 "남들은 다 하니까" 연애하지 않으면 소외되는 느낌을 받는 것도 주된 이유가 되겠지만, 애정결핍과 관계중독 등의 심리적인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심리적인 문제는 차치하고, 전자의 경우만 이야기해 보겠다. 이는 사회에서 비혼 여성을 후려치는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 비혼 여성은 동물을 키우거나 친구와 동거하는 선택을 해도, 남자와 함께 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외롭지 않니?"라는 물음이 항상 따라다닌다. 탈혼 후  재혼하지 않는 여성에게도 사람들은 똑같은 질문을 한다. 여자들끼리 동거하거나 반려동물을 키운다고 해도 이성애중심적인 사회는 남자가 필요없는 우리의 욕망을 간단히 무시하면서 레즈비언과 무성애자 여성을 함께 지워버린다. 비혼을 결심하는 여성에게는 "그러면 외롭지 않겠니?"라고 질문한다. 남자 없이 생활하면 외로움을 느끼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우리는 강제로 외로움을 '주입당했다'.  

  남들이 당신을 미쳤다고 가스라이팅할 때, 당신은 스스로의 정신상태를 의심해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연애하지 않는 여성에 대해 자꾸 외롭고 경쟁에서 탈락한 이미지를 부여할 때, 당신도 비연애주의란 선택을 부정적으로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주입된 감정을 진짜 내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없다. 이미 연애를 해본 사람들이라면 365일 24시간 내내 함께 있지 않으므로, 연애 자체만으로 외로움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을 알 것이다. 그럴진대, 외로움을 해소하는 수단으로 사람을 만나기보다 혼자 있는 시간에 가치를 부여하는 새로운 시도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 



레즈비언이면서 비연애주의가 가능한가?


  최근에 그런 질문을 받았다. '여자랑 연애도 안 하고, 섹스도 안 할거면 대체 왜 레즈비언이란 이름을 쓰냐, 가시화에 방해된다'는 것이었다. 

   확실히 비연애주의 레즈비언들이 레즈비언 가시화에 별로 도움은 되지 않는다. 물론 우리도 여성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스킨십도 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이성애중심 사회가 위협적으로 느끼는 '동성애'를 재현하지 않기 때문이다. 4B를 실천하면서 여성끼리 동거하거나 혼자 사는 건 이성애중심 사회를 확실히 위협하고, 많은 레즈비언들도 애인과 함께 살기를 바라지만, 그런 생활방식이 레즈비언의 삶으로 독해되지는 않는다. 여자끼리 손 잡고 다녀도, 이성애커플의 인기 데이트장소를 찾아도 그냥 친한 친구관계로 읽힐 뿐 레즈비언이라 이해하지 않는 분위기이므로, '비연애주의' 레즈비언이 뜬금없게 들릴 수 있겠다. 

   그러나 가시화 차원에서 도움이 안 되는 것과 별개로, 여러 레즈비언 군상 중 하나로 비연애주의 레즈비언은 존재한다고 말하고 싶다. 가시화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비난받아야 한다면, 커밍아웃하지 못하는 레즈비언들도 비난받아야 하는가. 그리고 커뮤니티나 어플이 늘 연애/섹스상대를 구하는 글로 넘쳐난다는 점을 생각할 때, 지극히 소수인 비연애주의자들의 존재는 다른 레즈비언들의 존재를 지우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다. 
 
또한 레즈비언이 여성과 연애/섹스하리란 기대를 받는 건 사실이지만, 단순히 수행여부로 정의되는 정체성은 아니다. 이성애자로 패싱하고자 여성과의 연애를 철저히 숨기거나 사귀지 않는 벽장 레즈비언은 레즈비언이 아닌가? 영화에서 레즈비언 섹스를 연기하는 여성은 반드시 레즈비언인가? 과거 여성과 연애하다가 어느 순간 아이고 다 부질없다 현타가 와서 연애를 그만두는 여성이 있다. 그러면 이 여성은 더 이상 레즈비언이 아닌가? 노화의 결과로 성욕은 감퇴하고 새로운 관계를 맺고자 하는 열정도 줄어드는데, 그러면 죽을 때는 레즈비언이 아니게 되는 것일까. 심지어 망혼해 커뮤니티를 떠나는 이들도 우리는 이성애가부장제에 순응한 '레즈비언'이라 이해하지, 이들을 이성애자가 되었다고 설명하지는 않는다. (이와 같은 설명은 정치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성애중심주의라는 사회적 압력을 무시한 채 이성결혼 수행만으로 이성애자가 되었다고 인정해버리면, 탈반을 조장하는 기독교 혐오세력의 손을 들어주는 꼴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레즈비언은 단순히 비연애를 실천하는 것만으로 레즈비언이 아니게 되지는 않는다. 사람마다 레즈비언 범주에 대한 이해는 다르겠지만, 레즈비언 경험을 공유하며 스스로 여성을 사랑하는 여성이라는 의식이 있는 한, 비연애주의 레즈비언은 레즈비언이다.
 

커뮤니티 밖으로 나가는 여성들 


 비연애주의자 레즈비언은 커뮤니티에 남아 있기도 하지만, 커뮤니티에서 자신의 자리가 별로 없다고 느끼고 커뮤니티를 점차 멀리할 수 있다. 일단 이쪽 커뮤니티는 다양한 화젯거리를 이야기하기보다, 연애/섹스상대를 찾는 게 주목적인 사람들이 많고, 연애/섹스 관련글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친구로서 만나면 되지 않느냐 반문할 수도 있는데, 내 대답은 ‘글쎄’다.  애초에 우정과 연애감정의 경계가 그렇게 확실하게 나누어지는 건가? 역사적으로 연애하는 것처럼 로맨틱한 표현을 쓰며 우정을 나누던 여성들도 있고(블루스타킹) , 처음에는 그냥 친구로 지내다가 사귀게 될 수도 있다. 수많은 이성애자들이 여성과 남성은 친구로 지낼 수 없다고 믿듯이, 우리도 (잠재적으로) 그런 관계가 될 수 있음을 가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누구와도 연애를 하고 싶지 않은데, 친구로 만나고 싶은 여성이 자신을 (잠재적) 연애상대로 본다고 생각하면 아무래도 부담스럽지 않겠나. 그래서 이들은 자신을 보통의 레즈비언들과 이해관계가 다르다 생각하고 커뮤니티를 떠나고 일부는 아예 다른 지향성으로 재정체화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레즈비언 커뮤니티를 떠난 이 여성들은 어디로 가는가?이들은 비연애,비섹스를 지향하는 공간을 찾게 되는데 대개는 여성주의 기반의 일반 여성 커뮤니티로 유입된다. 그 이유는 첫째로, 여성 커뮤니티는 레즈비언 커뮤니티와 함께 폐쇄성을 공유하며, 레즈커뮤와 마찬가지로 여성전용공간이기 때문에 이들에게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다. 또한 지겹도록 연애글을 보다가 연애전시가 금지된 공간에 오면 자신을 포용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반면 무성애자 커뮤니티로는 잘 가지 않는데, 여성들이 독자적으로 분리주의 커뮤를 만들어 나오지 않는 한, 기본적으로 여성전용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최초의 무성애자 정의는 자위도 안 하는 무성욕자와 사실상 동의어로 쓰였으나, 지금은 섹스를 하지 않을 뿐 연애하는 사람들마저도 스펙트럼에 포함시켰기에 내부에서 동질감보다 차이를 더 많이 경험하는 것도 다른 한 가지 이유다.  
 
  이들이 커뮤니티를 떠나고, 재정체화하는 일은 레즈비언 집단에서 보면 소실이지만, 여성주의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성애를 엮거나 여성을 버리고 다른 무엇으로 정체화하지 않는 한 크게 부정적인 현상이라고 생각지 않는다.지금껏 크게 조명된 바 없는 래디컬 페미니스트 안의 무성애자들은 동성애를 탈이성애의 대안으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남성을 거부함으로써 레즈비언들과 함께 저항해 왔다. 또한 커뮤니티를 떠나는 것 자체가 곧 레즈들 일에 아예 관심 끊겠다는 뜻도 아니다. '나랑 외않자조'라면서 레즈비언에게 TERF 낙인을 찍는 트랜스젠더에게, 레즈비언 전용공간의 소실에, 여자 갈아먹는 남성중심 퀴어판에 분노한 건 비단 레즈들뿐만이 아니었다. 레즈비언 가시화의 날을 축하하던 사람들, 생활동반자법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레즈들뿐만이 아니었다. 조금 더 자신의 이해와 일치하는 공간과 언어를 찾아나선 이들을 납작한 시선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커뮤니티 안/밖을 이원화하는 편가르기는 단절을 심화시킬 뿐이다. 우리는 이해를 달리하면서도, 차이를 넘어 또다시 만날 것이다. 




p.s. 분명히 나는 비연애를 지향하고 더 많은 여성들이 연애 강박에서 벗어나길 바라지만, 페미니즘은 레즈비언과 관계가 없다거나, 레즈비언이 미개하다 혹은 동성애를 강요한다 식의 혐오발언까지 용납할 생각은 없다. 물론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을 여성과 연애하라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도 포함된다.






  1. 나는 스스로 성적 끌림의 대상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일련의 성적 실천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반성애주의antisexualism, 그런 사람을 반성애자antisexual라고 부를 것이다. 이는 무성애자asexual와는 다른데, 지금의 무성애자 스펙트럼은 엄청나게 확장되어 무성애자 중에도 연애를 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무성애자들 모두가 연애/섹스를 비판하지는 않으며 그냥 존중만 해라 마인드인 사람도 많다. 따라서 이 사람들을 수용하기에 무성애자란 범주는 너무 포괄적이다.
    금욕주의celibacy도 있긴 하지만, 흔히 종교적 맥락에서 사용되기 때문에 종교를 비판하고 탈종교 영업하는 이들에게 어울리지는 않는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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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혜리(Hyeri 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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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사용되던 감정노동보다는 공감노동이 적확한 표현이라 생각하여 감정노동을 공감노동으로 대체하였다.

 

타인은 내게 완전히 공감할 수 있는가


없다. 내가 직면한 문제를 가장 잘 아는 건 내 자신이고, 어떤 감정이 드는지 가장 잘 아는 것도 내 자신이다. 타인의 공감이란, 나의 문제를 타인의 사고로 해석하고 사회화한 공감노동을 수행하며 내 감정을 흉내내는 일이다. 자기의 시각에서 내 문제를 이해하고, 내 감정을 추측해서 그 상태를 흉내내기 때문에 완전한 공감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예시를 하나 들어 보겠다. 내가 칼에 손가락을 베였다고 하자.  고통의 강도는 나만 알 수 있다. 이 때 타인이 "괜찮아?어떡해 아프겠다" 라고 하는 건 자기가 겪은 비슷한 경험을 토대로 나오는 반응이다. 사실 내가 얼마나 아픈지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다. 다만 타인은 자신의 비슷한 경험에 비추어 그 당시의 감각을 떠올리고  '아프겠다'고 반응하는 것뿐이다. 또 하나의 예시를 들어보겠다. 친구들에게 남충과의 관계가 해결되지 않는다며 혐애1상담을 한다고 치자. 이 때 둘이 잘 해결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헤어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똑같은 문제에 다른 반응이 나오는 이유는 나의 문제를 나의 시각이 아니라 타인의 시각에서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인의 시각은 나의 시각과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렇듯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 감정의 이해에 대한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완전한 공감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내 문제에 가장 잘 공감할 수 있는 건 바로 나 자신이다. 완전한 공감이란 불가능하고, 타인에게 공감을 요구하는 건 도리어 상처만 안고 돌아오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사실, 여기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경험적/직관적으로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타인이 진정으로 자신의 상황을 이해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사람들은 타인이 자기 말에 동조해주면서 공감노동을 하길 바란다. 어째서일까?

 

 타인에게 공감노동을 요구하는 것은 사회적 인정욕구와 관련이 있다.  내가 직면한 문제가 있는데 이 문제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게 맞는지 타인으로부터 확인받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정투쟁은 공감노동을 요구하는 사람과 수행하는 사람의 계급에 따라서 양상이 달라지며, 같은 성별계급sex caste이더라도 여/남 집단은 다른 양상을 보인다.


권력과 공감노동


  우선, 권력차가 존재하는 경우에 대해 생각해 보자. 실제로 권력관계에서 공감노동을 요구하는 쪽은 대개 지배계급이다. 남성은 여성에게, 상사는 부하직원에게, 모부는 그 아이들에게[특히 딸에게], 부자는 빈자에게 공감노동을 요구한다. 물론 반대로 약자가 강자에게 공감노동을 요구할 수도 있으나, 양측이 공감노동을 수행하는 방식은 분명히 평등하지 않다. 사회적 약자가 강자에게 공감노동을 요구하는 경우는 숨 좀 쉬게 해달라, 먹고 살게 해달라는 아우성에 가까우며 그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눈치를 봐야' 한다는 점에서 분명히 차이가 있다.


  또한 권력관계에서 약자가 공감노동을 하지 않으면 비난과 불이익이 따라온다. 왜냐하면 공감노동을 수행하지 않는 것은 지배자의 서열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여성이 남성을 인정하지 않을 때 남자들은 서열이 떨어지는 불안감을 느낀다. 그래서 남자들 중에서도 서열 최하위의 남자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여성, 대개 가장 만만한 아내와 딸에게 위협과 폭력을 가해서라도 인정받고자 한다.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폭력앱충의 흔한 멘트가 6지금 나 무시하는 거야9인 것 역시 이런 맥락에 있다. 중간~상위 서열의 남자들은 물리적 폭력을 사용하는 대신, 공감노동을 수행하지 않는 여자나 아랫사람에게 사회성이 떨어지고 (특히 여성의 경우)귀여운 맛이 없다고 하거나, 인생의 값비싼 조언을 해주는 양 비위를 맞춰달라고 요구한다. 그래야 자신의 서열이 다른 남자들 앞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은 공감노동을 하지 않는 남자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프레임을 씌울 수 없는데, 사회에서 여성의 공감능력이 남성보다 우수하며, 이를 돌봄노동과 연결해 남성의 공감능력이 낮은 것도 6이해하라고9 강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표면적으로 공감노동을 수행하지만 공감을 요구하는 쪽에 동일시하지 않는 건 강자만 가능하다. 연장자는 연소자의 입장을 듣고 공감하는 척 가스라이팅을 할 수 있는 반면(예:  힘들지? 그래도 노오오오력하면 다 돼!) 연소자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남성폭력male violence을 당했을 때 “진짜 안됐다...근데 그 날 무슨 옷 입고 있었어?” 따위의 말로 위로하는 척 2차 가해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자지거나 흉자다. 그러나 여성이 가해자가 될 때 피해자남에게 공감하지 않는 여자를 이들은 맹렬히 비난한다.


성별에 따른 공감노동의 양상


  그렇다면 동일한 성별계급에서 공감노동을 요구하는 건 어떤 방식일까. 우선 여성 집단을 먼저 생각해 보자. 여초 커뮤니티에 가면 이런 글을 쉽게 접할 수 있다. "남친이 ~했는데 나 화내도 되는 거겠지?", "~ 내가 소심한 걸까?"라고 감정을 확인받는 글들. 사실 나의 감정은 온전히 내가 통제하는 영역이다. 그러나 많은 여성들은 내가 느끼는 감정들조차도 '이게 과연 이 상황에서 적절한 감정인지' 확인받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분노와 질투처럼 부정적인 감정을 타인에게 확인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여성은 감정적이라 쉽게 화낸다는 여성혐오적 편견 때문이다. 우리는 그남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분노와 질투 같은 자연스러운 감정조차도 빼앗겼던 것이다. 여성은 판단능력이 떨어지고 감정적이라는 세뇌는 우리의 감정조차 검열 대상으로 만들었으며, 자신의 판단능력과 감정을 신뢰하지 못하는 여성은 가족, 친구, 익명의 커뮤니티 등에 이야기함으로써 공감노동을 요구하게 되었다. 사실 문제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임에도 '네 생각, 감정이 틀린게 아니야' 라는 반응에 집착하게 된 것이다.


  반면 남성의 경우 자신의 생각에 대해 조언을 구하기는 하지만, 감정을 확인받고자 하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 그남들은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는 편이며, 타인의 인정을 받는 것도 생각의 타당성보다는 자기가 처한 문제의 중요성, 문제를 해결한 자신의 유능함을 인정받고 싶어한다. 일부러 과장된 이야기를 하면서 유능하다, 훌륭하다는 반응을 기대하는 것이 그남들의 인정욕구다. 즉, 인정투쟁이 유능함을 자랑하는 방식으로 나타나므로 그남들은 이를 자신보다 서열이 낮은 사람을 지배하는 데에도 효과적으로 사용해 왔다. 6나는 유능하므로 네가 나를 떠받드는 것은 당연하고, 이렇게 능력있는 주인님을 모시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9라고 여성을 세뇌시켰고 위에서 설명했듯이 공감노동을 수행하지 않는 여성에게는 불이익을 주었다. 그러나 여성에게 공감노동을 요구하는 것은 서열 상승이 아니라, 여성을 지배하는 현상 유지에 가깝다. 실제로 그남들이 서열을 올리기 위해 인정투쟁의 준거집단으로 삼는 것은 같은 남자들이다. 그남들끼리 부랄탕[각주:1]을 끓일 때 허세가 심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자기 여친에게 쓰는 돈은 아까워하고 여성을 김치녀네 된장녀네 후려치면서, 남자들끼리 있을 때 한턱 쏜다고 보여주는 이중성 역시 인정투쟁의 준거집단이 남성이라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공감노동에 관해 취해야 할 태도


  첫째. 자신의 감정과 판단능력을 신뢰하고 스스로 사고해라. 특히 나의 감정에 대해 옳은지 틀린지 묻지 말 것. 나의 생각과 감정은 온전히 나의 것이고, 그렇게 느낀 데에는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 자신의 느낌, 예상 해결책 등을 적고 사고과정을 기록하자. 이 문제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믿음을 가져라. 나를 가장 잘 달랠 수 있는 것도 나 자신이라는 믿음을 가져라. 그리고 정보를 구하되 자기 의견을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말에 휩쓸리기가 쉽고, 공감을 빙자한 가스라이팅에 넘어가기도 쉽다.


  둘째. 아무에게나 공감노동을 수행해 주지 않는다. 공감노동을 요구하는 쪽이 원하는 반응을 해주지 않았을 때 관계에 리스크가 생길 수 있으므로 친밀한 관계에서 잘 모르겠거든 적당히 회피하는 쪽이 나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기존의 서열질서를 재생산하므로 자지를 위해서 공감노동을 수행하지 말 것. 어쩔 수 없이 눈치를 볼 경우 공감하는 척하며 은근슬쩍 자지의 능력을 폄하하거다 기억력, 판단능력을 의심하게 만드는 가스라이팅을 시도하자. 어차피 그남들은 당신이 여성이라서 겪는 차별과 억압에 공감하지 않으니, 그남들을 위한 6진심어린 공감9은 정말이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누누이 말하지만 정신적 자원에도 한계가 있다. 상담사들은 직업적으로 공감노동을 수행하지만 그 사람들도 스트레스를 받고 자원이 고갈되기 때문에 상담이 필요하다. 그래서 아무에게나 공감노동을 수행해 주지 말라는 것. 같은 여성이라도 당신에게 일방적인 공감을 요구한다면 그건 착취다.


셋째로, 타인을 감정 쓰레기통으로 쓰지 않고, 감정 쓰레기통으로 쓰일 경우 그 관계를 피하라.

어떤 관계가 감정 쓰레기통으로 쓰는 관계인가요?
- 폭력앱충의 예: 자기를 인정하지 않는 약자에게 물리적 폭력 행사
- 혐애/망혼 흉자의 예: 자기가 처한 상황의 좆같음을 끊임없이 토로하지만 상황을 근본적으로 벗어날 생각이 없음. 그리고 공감해주지 않으면 뒷담하면서 평판을 떨어뜨림

 

감정 쓰레기통에 대한 정의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나는 부정적인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쏟아버리는 것뿐만 아니라 '그래도 되는 존재'로 대상화하는 일을 감정 쓰레기통 삼는다고 말한다. 즉 공감노동에서 착취하는 사람-착취당하는 사람이 있으면 착취하는 사람이 착취당하는 사람을 감정 쓰레기통으로 쓰고 있는 셈이다. 이와 같이 사람을 감정 쓰레기통으로 이용하는 것은 타인의 정신적 자원을 고갈시키며, 인간관계를 망친다. 만약 당신이 감정쓰레기통으로 쓰인다 싶을 경우 그 관계를 끊어내야 한다. 6위로도 못해주냐 싸이코패스야9 같이 가스라이팅을 동반하는 경우 결과적으로 자존감도 낮아지고, 피해자임에도 도리어 당신이 사회성 빻은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 aka 알탕연대, 남성 호모소셜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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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혜리(Hyeri 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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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워마드에서 밀전병에다 낙서를 하고 태운 글이 올라왔고, 수많은 언론에서는 이때다 하고 기사를 내놨다. 천주교 쪽에서는 이를 신성모독으로 규정, 워마드 사이트 폐쇄 청원을 올리고 바티칸에서 파면해야 한다는 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이 모든 일이 탈좆교한 내게는 그저 우스운 해프닝으로 보인다. 주목해서 볼 웃음 포인트란 정말 많다. '개독'을 욕하는 사람들은 정말 많으며 일베에 마리아 능욕글은 넘쳐나는데 하필 워마드를 콕 찝어서 욕받이로 쓰는 것, 내부의 성범죄에 분노하지 않으면서 '빵쪼가리 훼손'에 분노하는 것, 당신들의 좆교를 강요하는 폭력성은 돌아보지 않는 것. (이를테면 유아세례나 행인들의 시간을 빼앗는 노방전도 등) 이 모든 포인트들을 따지면 우습기 짝이 없는 것이다.

내부 성범죄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일베의 여성혐오 겸 신성모독 게시물들


   천주교인들이 보여주는 이중성이 아니더라도,  여성주의자들이 좆교를 배격하고 비판하는 건 사실 당연하다. 세상의 모든 좆교는 여성 신도를 자지들보다 낮은 자리에 있게 하며, 여성의 돌봄노동과 감정노동을 당연시해 왔다. 음식을 준비하고 뒷정리를 하고, 신도들을 앞에서 웃으며 맞이하는 역할은 주로 여성의 몫이다. 더 많이 봉사하는 성별은 역할은 여성이지만, 여성의 지위는 제한되었다. 천주교에서는 여성 사제를 인정하지 않고, 개신교는 교파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대개 여성 목사를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수천 년 전에 쓰여져 업데이트되지 않는 경전 곳곳에 녹아있는 여성혐오는 얼마나 많은가. 개독경은 이미 창세기부터 여성을 사악한 뱀에게 넘어가 남성을 타락시킨 존재로 묘사하고 여성을 인구 수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내부에서 발생한 성범죄에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이단으로 찍히고 사탄 혹은 독사의 비유로 묵살당해 왔는지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성애 중심의 결혼제도를 당연시하면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는데 이는 기존의 결혼제도에 편입되지 않는 성소수자, 비혼 여성들을 배제하는 것이다. 이렇듯 철저히 자지 중심적인 문화가 만연하고, 자지를 머리 위에 두고 섬겨야 하는 것이 좆교다.

교회에서 여성의 자리는 어디에 고정되어 있는가.



   따라서 여성주의자들은 좆교가 가부장제 하에서 여성의 노동력을 갈취하며 차별하는 또 하나의 억압구조임을 기억하고, 좆교를 전면적으로  거부해야 할 것이다. 워마드가 쏘아올린 작은 빵은 상당한 파장을 불러왔는데, 이를 잠깐 지나가고 말 해프닝으로 기억하지 말라. 이 흐름은 장기적으로 개개인의 좆교 거부선언, 끊임없이 부딪히는 의제인 임신중단 합법화, 레즈비언 가시화 운동 등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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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전적 의미의 코르셋은 미용 목적으로 멀쩡한 여성의 신체를 구속/ 변형한다. 우리가 쓰는 '코르셋'은 바로 이 지점에 맞춰 의미를 확장시킨 것이다. 화장,브라,하이힐,치마,교정,성형 등은 미용 목적으로 이상적인 여성의 모습에 부합하게끔 여성의 신체를 변형하고 구속한다. 무엇이 코르셋이고 무엇이 아닌지는 사실상 거의 명확하다. 뭐가 코르셋인지 정의한 이상 '탈'코르셋도 손쉽게 정의할 수 있다. 


    그런데 주체적 화장/성형/다이어트 따위가 탈코르셋이라는 도둑들이 있다. 자기가 하는 게 페미니즘이라 믿겠지만, 당신들은 여성주의자들의 언어를 빼앗는 도둑이고 백래시다. 스스로 언어를 훔친다는 자각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이 도적들은 뻔뻔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어서 언어의 주인인 여성주의자들의 눈치조차 안 보고 '역코르셋 씌운다'며 주인에게 호통을 치고 있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답답한 옷을 벗는다는데 거꾸로 옷을 입는다고 말하니 얼마나 웃긴 문법인지.


    지금은 다 억압인 줄 알지만, 전족이 발을 기형으로 만들고 코르셋이 장기의 위치를 바꿔놓아도 그 당시에 많은 여자들이 순응하고 스스로 신고 입었다. 그리고 당신들도 똑같아. 오히려 여성주의자들 언어를 빼앗아서 쓰니 더 해로워. 정신 좀 차리고 족쇄 안 벗을거면 최소한 도둑질이나 하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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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정체화하는 과정을 흔히들 <매트릭스>에 나오는 빨간약을 먹었다고 비유한다. 그 빨간약은 현실을 깨닫게 만드는 약이다. 그 현실은 유토피아가 아니며, 행복함과 동시에 고통, 그 외 여러 감정들을 마주하는 공간이다. 페미니즘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려는 목적으로 페미니스트가 되면 행복하다고 말하는 건 고통을 의도적으로 삭제하는 자기기만이다. 모두가 성공한 삶을 추구하게끔 만들기 위해 성공한 사람의 행복한 일상에만 초점을 맞추고, 이를 위해 힘들게 기울인 노력을 삭제하거나 미화하는 일과 똑같다.


기존의 사고체계를 뒤바꿔놓고 얼마나 뿌리깊은 억압이 존재하는지,얼마나 여성혐오가 만연한지 깨닫는 일을 '행복함'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왜 우리에게 '프로예민러', '프로불편러' 라는 딱지가 붙는데. 나의 욕망과 습관도 가부장제의 체계 하에 구성된 것은 아닌지 자기검열하는 일이 어떻게 쉬운 일일까. 그리고 공론장에 발담근 사람들은 다른 노선과 정치적인 담론 싸움을 지속해나가야 한다. 천성이 토론을 즐기는 사람일지라도, 타협 불가능한 쟁점들을 두고 신명나게 낙인을찍어가면서 싸우는 과정이 행복할 리 없다.


그렇다고 페미니스트들이 항상 불행하냐 하면 그렇지만도 않다. 페미니즘을 하는 과정 역시, 1-2년의 단기간이 아니라 생각한다면 결국 우리 삶 가운데 한 부분이다. 우리 삶은 고통의 연속선으로 이루어져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꽃밭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천진난만하게 뛰어노는 그림에 머물러 있지도 않다. 소소한 행복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주변 사람들의 변화를 목격하며 느끼는 기쁨, 같은 곳을 바라보는 사람들끼리 느끼는 동료의식, 그동안 불편하게 느꼈지만 말할 수 없었던 것을 드디어 말하게 된 해방감, 이런 것들이 곧 소소한 행복이다. 그 소소한 행복은, 앞서 말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이 길을 계속 걸어가게끔 나를 지탱해주는 힘이다.


그렇다면 페미니스트의 삶은 행복과 불행의 혼합물인가? 글쎄,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는 과정,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는 삶이 행복 또는 불행의 이분법으로 간단히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행복과 불행 외에 다양한 감정들 또한 교차하며, 시시각각 변한다. 예를 들어 실친 중 한 명이 내가 쓰는 필명을 알고, 나를 팔로우한다고 말했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은 기쁨과 동시에 내가 그 사람의 눈치를 봐야 할까? 하는 불안함이었다. (그 불안함은 이내 사라졌지만) 함께 열심히 싸우던 사람들이 자쳐서 페이스북을 떠나겠다고 말할 때 나는 아쉬움, 안타까움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져 있으리란 위안을 받는다. 위 사례들은 단순히 행복/불행이라는 카테고리에 분류될 수 없다. 따라서, 페미니즘을 하면 행복하다, 혹은 불행하다고 단정짓는 건 바보같은 일이다. 물론 개개인의 삶에서 행복을 더 크게 느낄 수도 있고, 불행한 감정을 더 많이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로 단정짓는 일이 내가 경험하는 무수한 감정들 중 지극히 일부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임을 나는 여기서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한다. 페미니즘은 내 시각의 창이 된 인생의 한 부분이며, 그 창으로 들어오는 감정들은 고작 한두 가지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원 글은 17년 6월 2일경 필자의 이전 블로그에 게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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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은 2017년 페이스북 계정에 게시되었습니다.

이 글은 로리타 유행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그 문제점을 밝히며, 로리문화 근절을 위한 개개인의 실천과 참여를 독려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본 글에서는 미디어와 소비자들의 수요를 통해 확산 및 재생산되어 온 로리타 열풍의 배경, 용어 로리타' 어원과 '로리타 컴플렉스'의 의미, 그리고 로리타 문화가 유행함으로써 발생하는 문제점과 개인의 로리문화 소비에 대한 비판과 제안을 담을 것이다.

A. 롤리타란 무엇인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가 원작이다. 롤리타는 실제 사람의 이름이 아니며, 험버트가 자신이 사랑하게 된 소녀 돌로레스 헤이즈에게 붙인 것. 소설에서 롤리타는 소녀의 순수함과 성인 남성을 적극적으로 유혹하는 이중성을 가진 존재이다. 즉 롤리타는 순결하고 신성한 성녀와 성애화된 대상인 창녀의 경계를 넘나들며 남성이 여성에게 기대하는 모순된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킨다.
그러나 롤리타가 진짜 이름이 아니듯이, 돌로레스를 이중적인 존재로 파악하고 그녀로부터 성적인 욕망을 충족하는 주체는 관찰자인 험버트이다. 당사자인 열두 살의 돌로레스가 험버트에게 기대한 것은 성인들 간의 육체적 쾌락을 수반하는 사랑보다는 친구와 같은 정서적 유대감이었을 수도. 확실한 건 롤리타는 남성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켰고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페도필리아를 다루었기 때문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오늘날 미디어에서까지 재구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주요 내용은 http://m.terms.naver.com/entry.nhn?docId=1393627&cid=41773&categoryId=41779

B. 로리타 컴플렉스
-의미
롤리타 신드롬이라고도 한다. 소설 '롤리타'로부터 파생된 신조어로 미성년자인 여성에게 성적인 선호를 보이는 현상을 의미한다. 일본에서는 로리타 컴플렉스를 로리콘이라 하는데, 주로 일본 애니/만화/미연시에 등장하는 미성년자 여성을 성적으로 소비하는 남성들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굳어졌다. 그리고 일본애니에 대한 수요가 늘고 점차 그 소비자들이 양지로 나오면서 서브컬쳐계의 은어로 사용되던 로리, 로리콘이라는 명칭이 대중적으로 확산되었다.

- 왜 로리타 컨셉이 유행이 되었나
우리나라에서 로리타 문화가 성행하게 된 배경에는 80-90년대 초까지 횡행했던 성감별 여아낙태가 있다. 수십만의 여자아이들이 태어나기도 인해 죽으면서 현재 성별에 따른 결혼 적령기 인구수가 크게 차이나는 상황. 국내에서 짝을 찾지 못하는 잉여 남성이 최대치에 이르고 동시에 여성의 사회진출 증가가 맞물리면서 남성들은 연애 시장에서 중요한 스펙인 '경제력'에서 아버지 세대보다 지위가 하락하게 되었다.



이렇듯 자신과 비슷한 연령대에서 짝을 찾지 못하는 남성들이 증가하였는데, 이들은 어떻게든 번식 탈락을 면하기 위해 자신의 값어치를 높이려고 동일 연령대의 스펙이 좋은 여성들을 후려치거나, 아예 바깥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렇게 외부로 눈을 돌려 물색하던 중 '어린 여성' 을 노리게 된 것이다.
남성은 자기보다 어린 여성에게 나이에서 자신의 지위권력을 행사할 수 있고, 경제적인 능력과 지식수준에서도 여성보다 우위임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나이 어린 여성은 나이가 많은 여성보다 일반적으로 성 경험이 적으리라 추론할 수 있기 때문에 남성들의 순결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킨다. 따라서 자기 또래 연령대보다 어린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삼는 것은 성별 이외의 다른 부분에서 자신의 지위를 확인하고자 함이며, 기존의 순결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받은 선택이다. 결국 로리타 유행이 확산된 것은 이중적인 이미지로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를 채워주었고, 연애-결혼시장에서 도태되길 두려워하는 남성들이 어린 여성을 추구하게 된 것과 맞물린다.


​C. 로리타 클리셰
로리타 컴플렉스를 자극하기 위해 사용되는 여러 장치들. 아동의 순수함을 상징하는 장치와 남성을 유혹하기 위한 섹스어필 장치가 있으며, '험버트'와 같은 관찰자를 암시하는 장치도 포함된다. 대표적인 로리타 클리셰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참고문헌: <현대 대중매체에 나타난 롤리타룩에 관한 연구>, 고윤정, 김미자, 한국의류학회지,

​​​​순수성의 이미지- 미니스커트, 캡 슬리브 등 짧은 기장의 원피스, 화이트&파스텔톤 색감
요부성의 이미지- 호피무늬, 망사스타킹, 선글라스, 하이힐 등
이중성(순수성과 요부성의 혼합)- 몽환적이거나 무심한 듯한 표정, 소녀의 이미지를 연출하는 옷에 헝클어진 머리칼 등
관찰자의 시선: 관음하는 듯한 앵글


위에서 언급한 것들은 로리타 클리셰의 예시인데, 문화권에 따라서 사용되는 아이템이 달라질 수 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새로운 아이템이 클리셰로 사용될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앞서 언급한 아이템만을 가지고 '로리타 클리셰'라는 이름을 붙이기보다는 이런 아이템이 어떻게 미디어에서 사용되는지를 알고, 어떤 예술 작품이 로리타 콤플렉스를 겨냥한 것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
미디어에서 로리타 클리셰를 사용하는 방식을 생각해 보자. 여자 아이돌 뮤비에서는 언급한 클리셰들 중에 '순수한 소녀의 이미지를 상징하는 것'과 '창녀의 이미지, 즉 섹스어필'과 '관음적인 시선'이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경향이 있다.(각각에 해당하는 장치로는 교복이나 교실, 진한 색조화장, 다리에 초점을 맞추는 것 등이 대표적이다.)

이는 소설 <롤리타>의 서술 방식을 재구성한 것으로, 돌로레스의 순수한 면과 험버트를 유혹하는 면, 그리고 그런 그녀를 유심히 관찰하는 험버트(성인 남성, 관찰자) 에 각각 대응된다. 그리고 미디어를 수용하는 남성은 필연적으로 관찰자인 험버트의 시선에서 롤리타, 즉 여성을 바라보며 여성의 이중성을 발견하고, 그 여성이 자신을 유혹한다고 느끼게 된다. 롤리타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재현된다.
따라서 우리는 앞서 언급한 세 가지 요소 내지는 여성의 이중성이 드러나 있는지 고찰함으로써 특정 예술 작품에 로리타 컨셉이 사용되었는지를 판단할 수 있다.


D. 로리타, 무엇이 문제인가
첫째, 아동과 청소년을 성적으로 대상화한다는 것이다. 1부에서도 지속적으로 언급하였듯이, 로리타 컨셉은 아동/청소년의 순수한 이미지와 섹스어필하는 이미지를 혼합하여 '순수하면서도 남성을 유혹하는 듯한 아동, 미성년자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미디어를 통하여 남성들은 '만들어진 아동, 청소년 여성'과 섹스할 수 있다는 상상을 하며 성적으로 소비하게 되는 것.
일베와 같은 남초사이트(회원수 600만으로 추산되었다는 것은 잘 알 것이다)만 가도 실제 여동생 또는 친척을 대상으로 몰카를 찍어올리면서, 그리고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로린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성적으로 소비하지 않던가. 
(첨부된 일베 캡처 확인)
그리고 너도나도 로리컨셉 찍어내면서 기획사에서 미성년자인 아이돌 여성을 상품화하고 있는데, 이 아이들 역시 로리 유행의 피해자들 아닌지?



둘째, 로리 컨셉이 유행하게 되면 미성년자의 성적 대상화에서 더 나아가 남성에 의한 미성년자 대상 성범죄로도 이어질 수 있다. 미성년자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뮤비를 보는 것을 반복하다 보면, 더 강한 자극을 찾기 위해 아동 포르노를 소비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는데, 이는 소아성도착증으로 발전하거나 또는 아동성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 (사진 7,8번 밑줄 참고. 참고문헌은 2012년도 법무부 자료, <아동음란물과 아동성범죄의 상관관계 연구>)


단순히 가능성의 이야기 아니냐고? 로리 문화가 유행한 이후 아동성범죄가 유독 증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첨부 사진 9,10,11 확인. 참고로 로리컨셉이 유행한 것은 경제가 침체된 이후, 일본도 마찬가지.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
CNTN_CD=A0001588944) 그리고 실제로 성범죄를 저지른 경우 중에 로리물을 지속적으로 소비해 왔던 사례들이 존재한다.
(강하영님 글 인용)

■ 2004년 나라 초등학교 1학년 여자아이 유괴 살인사건
 과거에도 수차례 여자아이들을 성추행해왔던 가해자 남성은�자택 실내에 아동을 성적으로 묘사한 포르노 만화와 잡지를 �다량으로 보유하고 있었고, 체포 후에 범행동기에 대해 �"어린 여자아이에게 흥미가 있었다. 로리타 포르노비디오나�애니메이션을 보는 걸 좋아했다. 따라해보고 싶어서 �여자아이를 찾았다"라고 진술함. 여자아이를 성적대상으로�보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고등학교 2학년때 야동(중학생�정도의 오빠가 초등학생 정도의 여동생과 성관계를 맺고,�여동생이 성적 쾌감을 얻는 내용)을 보고, "아이들도�어른과 같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밝힘.
■ 2005년 소녀 성노예 사건
 여러 명의 소녀들을 감금하고 개목줄을 채우거나,�자신을 '주인님'이라 부르게 하고 성적으로 학대함.�해당 가해자 남성은 여성을 감금 폭행하고 육성하는�'조교물'이라 불리는 장르의 야동에 빠져있었고,�감금한 소녀들에게 비슷한 행위들을 했다고 함.
■ 2011년 쿠마모토 3살 여아 강간살인 사건
 남자 대학생이 3살 여자아이를 납치해 강간하고�살인한 뒤 시체 유기. 가해자 남성 방에서�'소녀'의 알몸이 묘사된 포르노 만화 다수 발견.
■ 2012년 히로시마 초등학교 6학년생 납치 사건
 남자 대학생이 초등학교 6학년 여자아이를�여행가방에 넣어 납치함. 가해자 남성은�노출도가 높은 소녀 영상(시판)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으며, 해당 사건에 대해 "소녀를 가방에 �넣는 장면이 있는 만화를 참고로 했다"고 진술함.
■ 2014년 토치기 여아 살인사건
 가해자 남성 컴퓨터에서 아동 포르노 다수 발견.
과거 트위터에 「스쿨미즈기(학교 수업용 남색 수영복)
+란도셀은 최강 조합!! 실제 보게 된다면 일 저지를지도!」
라고 적은 것이 발견됨.


단순히 일부의 사례를 가지고 전체를 일반화하지 말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겠다. 이 논리 그대로 적용해 보자면, '성범죄를 저지르는 남성은 일부인데 왜 모든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세요?' 라는 반발과도 똑같다. 그리고 우리 페미니스트들은 이 말이 왜 빻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
우리 여성들은 어떤 남성이 나에게 위해를 가하고 어떤 남성이 안전할지 완벽히 구분할 수 없다. 30개의 과자를 주고 그 중 1개가 독이 들었다고 하면 29/30의 확률을 믿을 것인가? 1/30의 확률로 내가 죽을 수도 있는데? 로리물을 소비하는 것과 아동성범죄와의 인과관계를 따지는 것이 대단히 논리적인 비약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인과관계가 있는 사건이 한 건이라도 있다면, (실제로 한 건보다 많지만) 그 한 건을 예방하는 노력이 그렇게 무의미한가?

셋째로, 로리 컨셉은 미성년자/성인 여성으로 하여금 특정한 여성상을 따르도록 강요한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어려 보이는 여성상'과 '수동적인 여성상'이 있다.
- 어려 보이는 여성상: 미디어에서는 성인 여성에게 미성년자로 보이게끔 하는 컨셉을 강요하며, 이에 영향을 받아 다른 성인 여성들도 스스로를 '어려 보이게끔' 꾸밀 것을 강요받는다. 즉 동안이 칭찬이 되고 너도나도 어려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동안 열풍'에는 로리 유행의 영향이 있다.
이에 대해 젊음에 가치를 부여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좋은 지적인데, 그러면 왜 동안에 대한 집착, 나이 프레임은 여성에게 유독 심하게 요구되는지 설명할 수 있는가? 크리스마스 케잌, 상폐녀라는 단어는 왜 여성에게만 붙여지고, 특히 퇴물이니 꺾였다느니 하는 말이 사용되는 건 왜 '여성 연예인'에게 국한되는가? '남자는 와인이다', '아재 개그' 등 중년 남성을 올려치기하는 풍조와는 대조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지.
너도나도 어려 보이고 싶어하는 현상, 나이 먹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현상은 여성에게서 특히 두드러진다. 반면 남성에게는 중후한 멋을 강조하고 있다. 어려 보이는 여성- 상대적으로 나이 많은 남성의 구도는 곧 롤리타의 돌로레스와 험버트의 구도를 재생산하는 것이 아닌지.

-수동적인 여성상: 최근 로리타 클리셰로 자주 사용되는 장치 중에 '수동적인 연출(팔다리를 의도적으로 없는 것처럼 연출, 무기력한 표정, 힘없는 듯 창백한 피부색 강조 등)' 이 있다. 이러한 연출이 남성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는데 이 역시 특정한 여성상을 주입시킨다. '아무것도 못하는 여성상, 인형같은 여성' 을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게끔 하는 것이다.
더구나 미디어에서 수동적인 여성상을 강조해 온 것은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다. 드라마나 여성향 애니, 로맨스 소설 등에서, 여성은 대체로 남성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존재로 그려져 왔고, 능동적으로 스킨십을 주도하지 못하고 강압적인 행위(팔을 강제로 잡아끄는 것, 강제키스 등)에 대해서도 저항하지 않고 수용하는 존재로 묘사되어 왔다. 실제로 여전히 강제적인 스킨십을 폭력이 아닌 판타지로 받아들이는 여성들이 많다. 따라서 로리타 클리셰로 사용되는 수동적인 연출은 기존의 수동적인 여성상 프레임을 더욱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여성의 주체적인 목소리를 억압하려는 시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E. 로리 문화의 소비자들
- 여남의 소비 형태
여성 개인이 로리 문화를 소비하는 방식은 대체로 로리 컨셉을 그대로 모방하는 형태로 소비되며, 일부는 기존의 미디어에서 사용하던 로리타 클리셰의 의미를 전복시킨다고 주장한다. 남성의 경우에는 미디어에 나타난 로리컨셉의 연예인들을 성적으로 소비하거나 개중에는 더 자극적인 것을 찾아 2D/3D 아동 포르노물을 소비하거나 실제 여자 아동을 대상으로 성적인 상상을 하기도 한다.
남성이 소비하는 방식이 왜 잘못인지는 합의된 영역이라 생각하므로 굳이 더 설명하지 않겠다. 문제는 여성- 특히 성인 여성 역시 소비에 동참함으로써 아동과 청소년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동안 여러 가지 반론들이 페페미판에서 나왔으므로 그 주장을 정리함으로써 자세히 답하도록 하겠다.

- 그동안 페페미판에서 제기되어 온 여러 가지 반론들
1. 의미를 전복시키면 괜찮지 않는가?
1-1. 섹스어필을 제거한 경우: 대부분의 아동, 청소년 당사자들에게선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은 섹스어필을 찾아볼 수 없다. 실제로 여자 중학생, 여자 고등학생은 미디어에 보이는 것처럼 죄다 몽롱한 표정에다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연약하고 무기력한 이미지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남들은 이들을 성적인 대상으로서 소비하고 이들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르기까지 한다.
왜일까. 이미 미디어에서 그렇게 세뇌시켰거든. '섹스어필을 하는 미성년자'의 이미지를 주입해서 실제 아동, 청소년 여성과도 연애하고 섹스할 수 있을 것 같은 환상을 가지게 했거든. 그래서 섹스어필을 제거한 경우는 분명히 '로리타 컨셉의 기준'인 이중성을 충족시키지 않지만, 남성에게 그런 사소한 차이를 판별할 능력은 이미 없다. 소녀시대 때부터 너무 많이 재탕되었기 때문이다.
1-2. 주체적인 여성상: 수동적인 여성상만 로리타 클리셰에 해당되지 않는다. 로리컨셉을 판별하는 기준은 '아동의 이미지, 창녀의 이미지, 그리고 관찰자' 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가이며, 한국에서는 섹스어필로 '수동적 연출'을 선택한 것이며, 서양에서는 '주체적인 섹스어필'이 사용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 (ex) 킨더호어룩 (캡처 4장 확인)



2. 아동과 성인의 경계를 흐리는 게 뭐가 잘못인가요? 나이주의 아닌가요?
일반적인 아동과 성인의 특성은 분명 존재합니다. 피아제의 인지발달이론을 비롯하여 연령별 행동특성에 관한 연구는 왜 존재합니까. 언어 구사능력이 떨어지는 아동의 특성을 모방한 '성인 여성의 애교'를 지적하는 것도 나이주의인가요?
그리고 한 가지 착각하고 있는데, 아동다움과 성인다움에 대한 구분은 한남이 하고 있다. 로리 미디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성애화된 이미지를 소비하는 바로 그 한남이요. 한남이 '아동,미성년자'와 '성인'의 이미지를 구분해서 내면화했는데 로리타 클리셰를 접하면서 그 경계가 흐려졌고, 거기에 미디어에서는 섹스어필까지 포함을 시키니까 아동이나 미성년자를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거라고요.

3. 로리타 컨셉의 기준을 모르겠다.
A: 앞서 1부에서 그 기준을 설명하였다. 로리타 컨셉이란 소녀다운 순수함, 성적인 요소(섹스어필), 그리고 관찰자의 시선을 상징하는 요소들이 혼합되어 나타나는 전체적인 이미지이다. 이것도 로리 아이템인가요? 저것도 로리 아이템인가요? 아니, 잘 생각해 보자. 아이유,로타를 페도컨셉이라고 까지 않느냐. 그런데 우리가 그 뮤비나 사진 등에서 찾아내는 로리타 클리셰는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엔간한 걸그룹들 뮤비에서도 마찬가지. 한두개 아이템만으로는 그것이 페도충들을 저격한 작품이라고 말하기 애매하다. 여초에서 로리타라고 비판이 나오는 건 최소한 3-4가지 이상의 로리타 클리셰가 사용되고, 이러한 클리셰들이 결국 앞서 말한 순수함/섹스어필/관찰자의 시선 이라는 항목에 해당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롤리타'를 재구성하게 되는 것.

4. 로리 문화를 보이콧한다고 아동성범죄가 완전히 없어지진 않는다.
A: 포함관계 똑바로 확인해라. 아동성범죄의 원인이라는 집합 안에 로리 컨셉이 부분집합으로 포함되어 있는 것이지, "아동성범죄의 원인= 로리컨셉"이라고 주장한 적 없다. 앞에서 로리 유행과 아동성범죄와의 상관관계 설명했으니까 다시 정독하도록. 아동성범죄를 '한 건이라도 예방하자는 차원에서' 불매하자는 것이지, 로리 불매만 한다고 근본적인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없는 거 우리 다 아는 사실이다.

5. 무엇보다도 섹슈얼하게 소비하는 한남이 제일 문제인 거 아닌가?
A: 고재기가 역재기하는 날까지 영혼을 담아 페도충들을 후드려패는 게 맞다. 그러나, 한남만 팬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여성 개인은 로리 문화를 소비함으로써 미디어에서 로리타 컨셉이 지속적으로 사용되게끔 재생산하는 데 일조한다. 따라서 당신은 간접적으로 미성년자의 성적 대상화에 동조하는 셈이다.
몇몇은 이를 성매매 비유를 들면서 수요가 없어지면 공급이 자연히 사라질 것이라는 논리를 구사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성매매는 불법이며 음지화된 산업이고 로리타는 미디어에서 적극적으로 생산해내는 양성화된 산업이다. 바로 이 부분이 결정적인 차이점인데, 각종 미디어를 통해 '로리타가 유행이다' 라고 어필함으로써 수요가 지속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 절대로 이를 소비하는 주체인 한남 개개인에 대해 검열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6. 미디어만 패지, 왜 개인에게까지 불매를 강요하는가?

현대는 SNS의 발달로 인해 개인 역시 1인 미디어로써 기능하는 시대이다. 즉, 일반인이지만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에서 팔로워를 많이 거느릴수록, 아프리카 방송에서 유명해질수록, 연예인만큼은 아니더라도 상당한 파급력을 갖게 된다.
또한 경제학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네트워크 효과가 있다. 네트워크 효과는 개인의 수요가 다른 사람의 수요에 영향을 받는다는 이론으로, 개인이 특정한 상품을 소비할 때, 다른 사람에게도 소비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네트워크 효과 중에서는 밴드왜건 효과(다른 사람이 사기 때문에 따라 구매하는 것)가 있는데, 로리 문화의 경우에는 연예계에서 로리 컨셉을 한 연예인들이 인기를 얻으면서 너도나도 로리컨셉을 따라하게 되었기 때문에 밴드왜건 효과를 통하여 설명할 수 있다.
(용어 : http://m.terms.naver.com/entry.nhn?docId=2064243&cid=50305&categoryId=50305)
따라서 영향력의 차이를 운운하며 TV에서 자주 보이는 연예인만 비판하라는 것은 결국 책임을 회피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불매 운동은 소비자가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가장 강력한 저항이다. 그리고 물론 이러한 불매 운동은 혼자 하기보다는 단체로 할 때 효과가 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에서 기업은 상품을 팔아 이윤을 내는 것을 최우선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왜 여성혐오 광고를 낸 기업의 목록을 정리해서 커뮤니티에 뿌리고, 개인적으로 불매하고자 했었나? 그리고 우리는 불매운동에 동참하자고 하는 목소리를, 개인의 기호를 무시하는 행위라고 비판하지 않는다.

7. 제가 자타공인 동안인데요 뭘 입어도 로리컨셉이 되는 거 아닌지...?
A: 1부에서 로리타 컨셉 기준 정해놨다. 로리컨셉의 기준은 동안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스타일링이다.

8. 아동, 청소년 당사자들의 경우에도 제한해야 한다고 보는지?
A: 성인 여성들이 애교랍시고 혀 짧은 소리를 내며 기싱꿍꼬또 영상을 따라하는 게 유행을 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언어발달이 미숙한 아동의 발달적 특성을 흉내냄으로써 자신이 연약한 대상임을 어필하는 것인데 실제로 아동은 그런 식의 애교따위 안 해(.......)
로리 컨셉의 경우에도 동일한 맥락이다. 미디어에서 생산하는 아동, 청소년의 이미지는 '남성의 성적인 기호를 충족시키기 위한 가공된 이미지'이다. 그래서 실제 아동, 청소년 개개인의 특성과는 당연히 괴리가 있는데 문제는 이들이 그게 어떤 의미인줄 모르니까 별 생각 없이 모방 학습을 통해 스스로를 대상화할 수 있다는 것. 따라서 아동, 청소년 당사자들에 대해서도 로리 유행이 어떠한 문제점을 낳는지 경각심을 일깨워 줄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앞의 문제점 3번에서 설명했듯이 로리 문화가 유행한 결과로 자신만의 개성을 살린 스타일링이 아니라 특정한 여성상만을 추구하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9. 소아성도착증은 현 시대 대한민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에도 있었고, 서양에도 존재한다.
A: 맞다. 그러나 이에 대한 시선이 엄연히 다른 것이 사실이다. 서구권에서는 특정 광고가 소아성도착증을 조장한다고 하여 비판하고 금지시킨 사례가 꽤 있는 것으로 안다. (관련기사: http://www.ziksir.com/ziksir/view/2605) 솔직히 이 정도까지 패면 굳이 간섭 안 한다(....)
반면에 우리나라의 인식은 어떠한가? 아동성범죄의 처벌 수위는??
그리고 과거에도 있었다고 하는데, 과거에는 아예 소아성도착증이라는 개념이 없었으며 성 관념이 워낙 보수적이었으니 자기 취향이라고 생각해도(=_=) 앞에서 말이라도 꺼낼 수 있었을까? 뒷세계에서 음지화되었으면 몰라도, 현재 한국/일본과 같이 대놓고 양성화된 사례 없었다.

10. 그렇게 입으면 성범죄 당한다는 논리와 뭐가 다른가?
A: 앞에서 계속 언급했는데, 로리컨셉의 로리가 괜히 붙지 않았다. 문화권마다 세부적인 클리셰에 차이가 존재하나 순수함과 섹스어필이 혼재된 이중적인 캐릭터, '롤리타'를 현대판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로리컨셉이다. 애초에 "저 여자애가 나를 먼저 유혹했어" 따위의 변명을 하게 만드는 게 로리컨셉이라고.
성인 여성이 로리컨셉을 모방하는 것은 미성년자 성적대상화를 재생산하는 행위이며, 짧은 치마와 성범죄 간에는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으나 로리컨셉이 유행한 후에는 아동성범죄가 증가했다는 명백한 팩트가 존재한다. 따라서 동일한 비교 대상으로 볼 수 없다.

이는 로리타 버스터즈의 카드뉴스에 살을 붙인 설명.
(링크: https://www.facebook.com/lolitabusters2/posts/1299082690131190)

F. 결론 및 제언

앞서 로리 문화가 유행하는 것이 왜 문제인지, 그리고 여남의 로리 문화 소비 형태 및 문제점, 그동안 페페미판에서 제기되어 온 여러 가지 반론에 대하여 정리해 보았다.
부르디외의 문화재생산이론에 따르면, 지배계급은 자신의 문화자본을 피지배계급에 강요함으로써 기존의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한다. 여기서 문화자본에는 아비투스적 문화자본, 제도화된 문화자본, 객관화된 문화자본이 있다. 그 중 가장 바뀌기 힘든 것이 아비투스적 문화자본(=체화된 문화자본)으로, 개인의 취향, 습관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아비투스는 사회화를 통하여 형성되는데, 사회화란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기존의 사회문화적 규범, 습관 따위를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우리 개개인이 한국식 가부장제 하에서 자라 왔다는 것을 감안할 때 나 개인의 아비투스적 문화자본은 남성 중심의 여성혐오적인 정서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각자 다른 방식으로 페미니즘을 한다지만, 최근의 흐름이 공통적으로 '가부장제를 해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바, 우리는 자신의 여성혐오적인 편견은 물론 가부장제 하에서 사회화된 취향은 없는가 스스로 검열하고, 변화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ㅡ 그리고 여기에 화장은 물론, 로리타 컨셉 역시 포함된다.
물론 당장 로리컨셉의 사진을 찍는 걸 그만두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십수 년~수십 년에 걸쳐서 형성된 가치관과 취향을 어떻게 하루아침에 다 갈아엎겠는가. 그러나 로리 불매 운동은 기존의 문화에 정면으로 저항한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시도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또한 아동성범죄 이야기도 나왔으니 한 마디 덧붙이겠다. 아동성범죄는 로리 불매만으로 해결되지 않으며, 보다 복합적인 시각에서 접근해야 한다. 즉,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우선 로리문화를 소비하는 한남을 패고(각종 P2P, 텀블러나 유튜브에 돌아다니는 아동음란물 신고) 로리문화를 불매하며, 또한 제도적 차원에서는 아동성범죄 처벌 수위를 높일 수 있도록 현행법 개정을 요구하며 성욕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대대적인 캠페인과 성교육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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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혜리(Hyeri Nam)

6B radical feminist,lesbian,liberal right-winger, atheist,contents 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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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rls_can_do_anything 슬로건이 일종의 '페미니스트 인증'으로 사용되는 시류에 편승해, 이 문구를 사용한 여러 페미굿즈들이 나오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는 당연한 모습이다. 어떤 사업 아이템이 돈이 된다고 알려지면, 너나 할것없이 이를 이용해 수익을 내고자 한다. 외식업계에서 오만 음식에 치즈를 얹는 것도, 허니버터칩 열풍에 편승해 허니XX 과자들이 인기를 얻었던 것도 다 같은 맥락이다.

나는 그런 일련의 경제활동을 하나로 싸잡아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 영역이 페미니즘이라면 좀 비판하고 넘어가야겠다. 왜냐하면 페미굿즈는 철저히 여성을 타겟으로 하는 상품이며, 여성인권의 슬로건을 표면적으로 내세우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은 굿즈를 소비함으로써 수집/치장 욕구를 충족하는 동시에 여성인권에 기여하는 것 같은 만족감도 얻을 수 있다. 내가 여기서 분명히 지적...하고 싶은 것은 '여성인권에 기여한다는' 부분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그건 여성인권에 사실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굿즈를 사서 착용하거나 붙이는 그 자체만으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이렇게 반론하고 싶을 것이다.

'여성의 목소리가 삭제되는 게 여혐민국의 현실인데, 내가 페미니스트임을 겉으로 드러내는 건 유의미하지 않냐'

그래. 페미니스트 후드티를 입든 에코백을 들든 뱃지를 달고 다니든 인증하는 건 유의미하지. 하지만 굳이 굿즈로 치장하지 않더라도 당신은 페미니스트임을 인증할 수 있다. 더 유의미하고 저항적인 방법으로. 그 방법은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여성혐오적인 발언에 "그건 여성혐오야"라고 분명히 제지하는 것, 주변 사람들에게 페미니즘을 알리는 것. 내가 페미니스트고 메갈이고 워마드라는 선언은 말로도 할 수 있고, SNS에 글로 쓸 수도 있다. 자신을 직접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페미활동으로는 민원 넣기, 국민청원/시위 참여, 페미니스트 스티커 붙이기, (페이스북 페이지 등 익명 플랫폼을 이용해) 페미니즘 컨텐츠 제작 등이 있다.

앞서 말한 활동들은 세상을 변화시킨다. 그런데 페미굿즈를 입는 건 그만한 영향력이 있는가? 내가 볼 땐 아니다. 그나마 회색이나 검은색 티셔츠 입으면 다행이게. 위협적인 느낌을 주지는 못할망정 여성성의 상징으로 쓰이는 핑크색으로 굿즈를 만들지 않나, 페미니스트는 물지 않는다는 문구를 쓰지를 않나. 페미니스트임을 드러내면 욕하고 아예 사회적으로 매장하려 하는 게 여혐민국인데, 기왕 전시할거면 저항적이고 위협적인 느낌을 주어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판매자들의 페미니즘 이해도를 신뢰할 수 없다. 페미니즘이 돈이 된다는 슬로건에 눈독들여 홍보했는데, 그 밑천이 드러나 엎어진 페미굿즈 텀블벅이 몇 개였던가. 이번 GCDA 열풍에서도 마찬가지다. #GirlsCanDoAnything 은 단순히 패션 아이템으로 소비될 문구가 아니다. 그 슬로건을 제대로 실천하려면, 여성 청소년, 여자 아동들이 고정관념을 깰 수 있게끔 가르쳐야지. 굳이 장사를 해야겠다면 정치, 과학, 법률, 의료 등 각 분야에 진출해 있는 여성들에 관한 책과 강연을 파는 게 훨씬 어울리지 않는가.



여성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구호는, 여성인 나와 당신이 남성중심적인 사회의 편견을 깸으로써 비로소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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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혜리(Hyeri 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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