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페미니스트들 대상으로 여성신문에서  설문조사를 하길래 참여했다. 질문이 여러 개 있었는데, 그 결과가 오늘 다음과 같이 기사로 발표되었다. 

존경하는 여성 인물들 중에서는 1위가 강경화 장관, 2위가 박근혜 대통령, 3위가 심상정 정의당 대표였다. 평등을 저해하는 인물로는 모든 남성이 1위이며 구체적인 인물로는 문재인이 1위, 홍준표가 2위, 트럼프 남통령이 3위에 뽑혔다.

여성신문과 이 언론을 팔로우하는 사람들의 정치적 성향을 생각했을 때, 박근혜 대통령이 순위권이라는 건 꽤나 주목할 만한 일이다. (참고로 남통령에 대한 규탄은 주류 좌파 여성단체들도 한다.) 이 투표결과는 "20대 여성=좌파/문재인 지지자" 프레임에 대한 반박이 된다는 점에서도 꽤 인상깊다.

한편으로는 "설문을 어떻게 한 거냐"라며 투표 결과에 대해 미심쩍어하는 반응들을 보고 씁쓸해졌다. 20대 여성= 좌파(특히 문재인 지지자)라는 프레임이 얼마나 우리 사회에서 견고한지를 다시금 실감했기 때문이다.

   문재인을 욕하고 또한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는 20대 여성들은 소수이다. 실제로 그런 커뮤니티의 회원수와 좌편향된 커뮤들의 회원수를 비교하면 채 1/10도 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여성 커뮤니티에서 단지 좌편향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다는 이유로 활동중지를 당하여 발언권이 박탈당한 사람들이다. 남통령 문재인이 여성의 목소리를 먹금한 것을 비판하고,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여성혐오임을 밝힌 죄로 발언권을 박탈당한 사람들이다. 이런 우리가 투표로 목소리를 내겠다는데 그조차도 아니꼬운 모양이다. "좌표를 찍었네", "과정이 공정하지 않네" 그저 결과가 못마땅한 것 아닌가?

  우리는 그만 지워지고 싶다. 만약 있다면 "그는 반드시 일베이거나 워마드일 것이다", "자한당 알바냐" 라는 말로- 한마디로 비정상적인 존재라고- 그만 낙인찍히고 싶다. 이것은 지독한 편견이며, 다른 정치적 성향을 인정하지 않는 파시즘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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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혜리(Hyeri 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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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독재자 하나를 위해 수많은 여성들이 성적으로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가? 돈 쓰게 만드는 여자들도 문제라는 반박은 받지 않겠다. 그건 본질을 왜곡하는 시각일 뿐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반민주적인 독재 권력이 없었더라면, 여성인권에 대한 의식수준이 높았더라면 이 여성들이 기쁨조로 착취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북한의 여성 문제를 인식하지 않고, 마냥 통일이 되면 좋겠다고 떠드는 것이야말로 반페미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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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북한의 인권유린 수준을 생각했을 때, 김정은은 결코 무해한 이미지로 소비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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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혜리(Hyeri 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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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에밀리 디킨슨의 밤> 을 함께 보고 토크콘서트를 함께하는 자리였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왔다.

- 영화 감상평

작중에서 에밀리와 파트너 수잔의 관계는 겉으로 이성애 제도의 탈을 쓴 채로 유지된다. 학창시절에는 문제되지 않았지만, 망혼적령기에 수잔은 정상으로 보이는 길을 택한 것이다. 에밀리는 비혼여성으로 남았고, 수잔은 에밀리의 오랩충과 형식적으로 결혼해서 관계를 이어나간다. 영화에서는 격렬한 키스신을 통해 둘의 열정을 보여주지만 그 관계는 대외적으로 드러낼 수 없는 것이었다. 에밀리가 수잔에게 쓴 수천 편의 시는 결국 수잔의 이름은 지워진 채로 사후에 출판되었다. 지워진 수잔의 이름은 근래에 와서야 복원되었다고. 영화는 지우개 지우는 소리를 끝으로 하며 크레딧이 올라갔고, 그 결말은 지금의 현실이기도 했기에 가슴 한켠이 저릿해지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영화 상영회 장소를 대관할 때도 종교건물이라 레즈비언이 언급된 포스터를 대외적으로 부착하지 못하게 했다고.

또한 남성 중심적인 문단 역시 작중에서 드러난다. 에밀리가 출판사에 보낸 시는 ‘운이 맞지 않는다’며 퇴짜를 맞고, 수잔 또한 그가 생전에 출판할 수 있게끔 부탁을 해보지만 좀처럼 되지 않았다. 그가 생전에 시인으로서 성공했더라면 생애 끝자락에는 스스로 관계를 밝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일전에 본 <콜레트>와 그를 겹쳐 보기도 했다.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레즈비언 관계성 자체에 초점을 맞춘 나머지 시인으로서 그가 얼마나 훌륭한지에 대해선 많이 다루어지지 않았다고 느꼈다.

영화 총평: 비가시화된 당대 여성 시인/레즈비언의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너무 어둡지 않게 유쾌한 요소들을 적절히 섞어놓은 영화였다. 영상미도 좋았다. 여성의 불행 포르노는 지뢰라서, 에밀리 디킨슨의 삶을 어둡고 비참하게만 그려냈다면 내 성격상 보다 뛰쳐나갔을 것이다.

토크콘서트

그 자리에서 나는 비연애주의자 레즈비언이라고 선뜻 밝히기 어려웠다. 2시부터 시위를 뛰고 와서 내 언어로 엮어내기엔 너무 피곤하기도 했거니와, 대부분 파트너가 있거나 파트너를 만들 사람들인데 내 이야기가 얼마나 잘 전달될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애초에 영화부터가 두 여성의 평생의 로맨틱한 관계를 다뤘는데, 홀로서기를 택한 레즈비언도 있다는 발언이 이 자리에 ‘적절하긴’ 한 걸까. 머리가 복잡해졌고 나는 침묵하기를 택했다. 그러나 온라인 공간에서라도 분명히 말해야겠다.

첫번째 질문, "레즈비언의 역사는 어떻게 왜곡되고 탈취되었는가" 는 영화의 주제와 직접 관련되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학교든 가정이든 직장이든 집단 내에서 배제되지 않기 위해(보수적일수록 더하다) 개개인의 레즈비언들은 커밍아웃을 꺼린다. 완전히 벽장으로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에밀리 디킨슨처럼 사후에라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다면 이들은 그냥 평범한 이성애자 여성쯤으로 기억될 것이다.

또한 레즈비언은 퀴어판에서는 퀴어란 이름으로 포괄적으로 묶이고, 동성애자로 게이와 함께 묶여왔다. 그러나 레즈비언은 여성으로서 특수한 이해관계를 갖는다. 그러나 이는 그동안 무시되어 왔기에 레즈비언들은 독자적인 정치세력화, 가시화를 위해 GettheLout 으로 나왔다.

사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도 않았다. 당연히 뽑아낼 수 있는 주제의식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두번째, 세번째 질문이었다.

- 두번째 질문. 로맨틱한 우정 하에서 누락되는 레즈비언 ? 혹은 그 프레임에서 어떻게 관계성을 확립/보증받나
여자 둘이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고 걸어도 커플이 아닌 친구로 독해되는 것, 소위 말하는 ‘헤녀우정’이 레즈비언 지우기라고들 한다. 예전에, 그러니까 내가 좋아하는 언니가 있었을 때는 그 말에 쉽게 동의했다. 하지만 비연애주의자가 된 지금은 연애지상주의가 녹아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레즈비언 관계는 연애로만 한정되어야 하는 걸까? 당사자들이 레즈비언이어도 ‘연애가 아니라면’ 레즈비언 관계가 아닌 것인가? 연인이냐 친구냐 굳이 따지려 들지 않고 ‘친밀한 두 여성’의 모습 그 자체를 흐뭇하게 바라볼 수는 없는 것일까.

한국 사회에선 비혼 여성들이 늘어나고 있고, 여성들은 자기들의 친밀한 관계를 ‘연인’으로 정의하지 않아도 비혼이기 때문에 이성애가부장제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동거하는 n명의 여성들이 연인이든 친구든 그건 별로 중요치 않다. 사실 혼자 살아도 충분하다. 래디컬 페미니스트로서 던져야 할 질문은 “그래서 이들이 가부장제를 위협하는가?”이며, 내 대답은 “그렇다”. 레즈비언은 파트너가 있을 때만 가부장제를 위협하는 존재가 아니다. 본질은 우리가 이성애 제도에 편입되지 않기 때문에 가부장제에 위협이 되는 것이다.

내가 비혼 친구들에게 느끼는 감정을 로맨틱한 연애감정이 아니라 ‘우정’으로 정의한다 해서 그것이 가부장제에 순응하는 것으로 읽혀야 하는가. 연애감정이 없는 스킨십은 ‘헤녀우정’인가? 그런 해석은 레즈비언을 성애적인 존재로만 국한시키고, 우정을 연애보다 급이 낮은 관계라고 못박으면서 비연애주의 레즈비언들을 레즈비언 커뮤니티 밖으로 밀어낸다.

세 번째 질문. 레즈비언의 정치적 의제 고민하기
레즈비언이 문화컨텐츠 등으로 더 많이 가시화될 필요성, 그리고 불평등한 임금/고용 문제, 생활동반자법 및 동성결혼 등의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나 1인가구 의료법 개정 문제는 나오지 않았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해 좀더 이야기를 보충하고자 한다. 레즈비언은 ‘파트너가 있는 상태’가 디폴트인 것인가? 생활동반자법은 레즈비언이어도 파트너가 없는 여성을 보호해 주지 않는다. 동성결혼 법제화 역시 비혼 혹은 솔로로 남는 레즈비언을 또다시 누락시킨다.

일전에 비혼의제를 생각하며 만든 구호가 있다. “여자 혼자 잘 살면 둘이서도 잘 산다.” 경제력 문제 때문에 동거하는 경우가 제법 많을텐데, 여성빈곤 문제가 해결되면 굳이 ‘파트너’에 연연할 이유가 없다. 스스로 법적 보호자가 되면 굳이 수술할 때 보호자로 싸인해줄 동반자가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여성 혼자서 누릴 수 있다면, 둘이면 더 풍족한 삶을 살 수 있다.

무엇보다도 여성은 일대일 관계로 묶여야 할 필요가 없다. 일대일로 여성을 구속하는 것, 여성이 혼자 살기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은 이성애가부장제의 오래된 관습이다. 이성애가부장제는 자기만의 온전한 삶을 영위하는 여성을 ‘히스테릭한/외로운/선택받지 못한’ 존재로 낙인찍고 여성의 노동력을 평가절하함으로써 남성에게 매이는 선택으로 이끈다. 그 선택의 끝은 망혼과 출산, 그리고 육아와 경력단절이다. 물론 여성 간 일대일관계의 양상은 출산과 육아를 일반적으로 포함하지는 않는다.(입양해서 키우는 레즈비언들도 있다) 그러나 오직 나라는 한 사람에게 정신적, 물질적 자원을 쏟아부으라고 하면서 상대방의 사랑을 의심하고 확인하려 든다는 점에서 구속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또한 ‘영원한 나의 동반자’를 욕망하는 것도 이성애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실제로 보고듣는 현실의 레즈비언 연애썰을 생각하면 이것도 판타지)

종합

영화가 던지는 주제의식에 공감하면서도, 나는 개인적인 위치성 때문에 마냥 편하진 않았던 공간이었다. 레즈비언으로 느슨하게 묶여 있지만 나는 반-성애주의자anti-sexualist이다. (나는 무성애자이기도 하지만, 지금의 무성애는 스펙트럼으로 넓게 정의되기 때문에 반성애라는 표현을 썼다.) 아마도 나는 이 특수성 때문에 이번뿐 아니라 레즈비언 담론에서 지속적으로 위화감을 느낄 것 같다. 레즈비언 연속체라는 개념은 얼마나 유효한지, 레즈비언 재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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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혜리(Hyeri 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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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저는 트위터에 한번 정치적 레즈비어니즘 개념에 대한 정리 트윗을 타래로 엮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동시대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인 아드리안 리치의 개념과 함께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아래는 아드리안 리치의 강제적 이성애와 레즈비언 연속체 개념을 중심으로 정리한 카드뉴스로 개인 인스타그램에 우선 정리한 것들입니다. 내가 카드뉴스 다시 만드나 봐라

1부: 강제적 이성애 개념

2부:레즈비언 연속체 개념

3부에선 정치적 레즈비언으로 산다는 실제적 의미가 무엇인지, 레즈비언 집단과 이성애가부장제 사회와 함께 엮어서 다뤄 보았습니다.

 4부...까지 나오지 않길 바라나 만약 쓴다면 앞서 언급된 것들 외에 질문으로 구성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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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남성은 언제나 여성을 혐오했었다

좌파 남성들의 여성혐오 역사는 유구하다. 그남들은 여성을 수족으로 부릴 뿐 결코 리더의 자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빠는 필요없다> 라는 책에서 운동권 좌파들의 여성혐오 역사를 읽을 수 있다. 여성운동은 좌파남이랑 같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남들은 본인이 부를 가지지 못했기에 운동을 할 뿐, 기득권인 부분에서는 모르는 체 하거나 좀더 교묘하게는 여성주의적 발언을 하는 듯하며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 하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그래서 독자적인 정치세력화가 필요하다. 좌파남에게 무언가를 기대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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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즈비언 영화 상영회: 레즈비언 무비나잇

■ 행사 정보

일시 : 2019.09.28 토 18:40-22:00
장소 : 2호선 홍대 부근 (신청자 개별 안내)
비용 : 1만원 (현장에서 현금 납부)
주관 : 서울사포
제공 : 영상-마들렌 올넥 감독, 자막-서울국제여성영화제
문의 : seoul.sappho.2@gmail.com

신청링크
사전 신청자에 한해 개별연락



개인적으로, 영화 상영 후 토크콘서트가 더 기대된다. 1,2,3번 모두 중요한 주제. 1,2번은 레즈비언의 가시성과 관련되어 있고 3번은 레즈비언 집단의 정치화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 특히 마지막 질문은 지금의 레즈비언 커뮤니티를 돌아봤을 때 시사점이 크다. 일반 여초와 달리 L커뮤는 단지 개인적 만남의 장소로만 활용될 뿐(그나마 소모임이 있는 커뮤도 있다만) 내부에서 어떤 시사문제 토론이나 정보교류, 창작물을 만드는 행위와는 동떨어져 있는 것이 현실. 그래서 처음 발을 들였을 땐 마치 친교와 연애활동에만 미쳐 있단 느낌을 적잖게 받았다. 현재의 레즈비언이란 이름표가 단지 개인적인 정체성으로만 인식되는 건 이런 분위기 영향도 있지 않을까?

   아무튼, 여러모로 기대되는 행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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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혜리(Hyeri 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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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돌은 형태와 크기가 흡사 실제 여성과 비슷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으나, 실제 용도는 남성의 섹스 도구라는 한 가지뿐이다. 또한 리얼'돌'은 인형이므로 의사표시를 할 수 없는 존재이다. 저항할 수 없는 존재로 여성을 상품화해서 판매, 소비하는 행태, 이것은 과연 강간문화와 무관한가. 리얼돌이 아니라 강간인형으로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따라서 정부의 리얼돌 수입 허용 판결은 강간문화를 용인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여성의 안전할 권리는 경시되어도 되는가. 나는 이를 규탄하고자 28일 익명의 여성으로서 함께할 것이다.



일 시: 9월 28일
장 소: 청계광장 남측
주의사항: 생물학적 여성만 참여가능

공식계정

카페 리얼돌 수입 허용판결 규탄시위
트위터 @realdollout
인스타그램 @realdoll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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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혜리(Hyeri 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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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여성의제만 신경쓰면 되는 거 아냐?

   그 여성의제가 무엇인지부터 짚어 보도록 하자. 여성의제란 무엇인가. 여성의 삶- 정확히는 여성들의 권리, 이익과 관련된 사회적 문제가 여성의제다. 그리고 어떤 사회적 문제로부터 여성인권 이슈를 뽑아내서 공론장에 올리면 그것이 여성의제가 된다.

  일전에 예멘 남민(난민의 대부분이 남성이었다) 수용 문제로 한창 페미판이 뜨거워진 적이 있었다.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선진국의 사례를 들어 자국 여성들이 성폭행당할 것을 걱정했으나, 모든 차별에 반대하는 페미니스트들은 교육을 하면 괜찮다, 수용해야 한다면서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을 ‘극우 세력과 손잡았다’, ‘난민혐오자’라 비난했다.

  난민 수용 문제는 겉보기에는 여성과 직접 관련이 없어 보이는 문제지만, 파고들면 우리 삶과 연결되어 있다. 이 문제는 자국 여성의 안전과 연결되어 여성의제가 되었다. 다른 예로 빈곤 문제를 생각해 보자. 겉으로 보면 그저 경제 문제처럼 보인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들은 여기서 ‘여성의 빈곤’을 끌어냈고, 구체적으로 ‘여초 직장의 저임금 현상’과 ‘유리천장’, ‘고용 차별’등을 분석했다.

  그러니까 여성의제는 처음부터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다. 의제 하나하나가 철저히 페미니스트들의 해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사회문제를 여성인권과 연결짓고, 구체적인 여성의제를 공론장에 올리고, 대중적인 지지를 모으고, 구체적인 법안 발의와 시행까지 끌고가는 일련의 과정은 지극히 ‘정치적’이다.

  또한 대통령 및 집권당의 성향과 국회의 구성, 사법부의 성향은 법률의 제/개정, 시행여부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여성인권에 관심이 높은 정부일수록 관련 부처 예산을 늘리고 여러 통계 지표를 신경쓸 것이고, 반대의 경우라면 시위를 해도 ‘먹금’할 가능성이 높다. 기존 법률이 여성혐오적일 경우, (예: 낙태죄) 헌법재판소에서 이를 위헌이라고 판결해야 한다. 그리고 재판관을 임명하는 데 국회와 대통령의 입김이 들어간다.

   그러니 어떻게 정치를 신경쓰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나?    우리가 하는 시위와 청원과 서명운동 등등은 모두 정치적인 활동이 아니었나. 나는 정치와 여성인권을 엮지 말라고 말하는 사람이야말로 정치감각이 떨어지거나, 여성의 무지로 이득을 취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역사적으로 1물결 페미니스트들의 대표적인 업적이 ‘여성의 참정권 획득’임을 생각한다면, 정치 엮지 말라는 말은 모욕에 가깝다. 정치꿘이다 뭐다 말이 많은데,  여성운동에 빨대 꼽는 ‘꿘’도 정치적 흐름을 읽어내야  먹버를 당하는지 아닌지 알 수 있지 않나?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서프러제트들의 활약으로 누리게 된 참정권을 막연한 정치혐오로 썩히지 말라. 스스로 공부하고, 뉴스 댓글과 sns, 가능하면 오프라인에서도 정치적 견해를 더 많이 피력하라. 나는 여성들이 여성혐오 관련 기사 댓글들을 점령하는 것뿐 아니라 정치기사 댓글 성비마저도 뒤집어놓길 바란다.

#정치기사에_댓글달기


-본 글은 인스타그램(http://Instagram.com/thinkwomenfirst)에 우선 카드뉴스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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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혜리(Hyeri 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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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제도가 어떻게 가부장제를 지탱하는지에 대한 수많은 분석을 바탕으로, 현재 4B(비혼-비출산-비연애-비섹스)는 여성주의 실천의 기본 중의 기본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여성주의자들은 4B담론에서 이성애 관계만을 비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최근에는 '레즈연애도 혐애'라면서 레즈비언 관계까지 비판을 확장하였고,  이에 따라 반-성애자antisexual[각주:1]  대 레즈비언 간 치열한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구도에서 양측이 간과하기 쉬운 지점이 있는데, 바로 비연애주의자 레즈비언의 존재다. 


참고로 필자는 여성에 대한 연애감정은 경험했으나 성욕은 누구에게도 느껴 본 적이 없어 플라토닉 레즈비언 혹은 무성애자 레즈비언이라는 말로 자신을 소개해 왔다. (섹스 안하는게 뭐 그리 유별난 일이라고 굳이 부연설명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만) 연애관계에 대한 환멸을 느껴 몇 달 전부터 어플도 지우고 살다가, 최근에는 아예 비연애주의자 선언을 했다. 


나는 레즈비언이고, 비연애주의자다. 
 
   순차적인 생각의 흐름을 통해 나는 비연애주의에 도달했다. 그중 첫번째 단계는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바람직한 연애관계의 범주를 좁히고자 시도한 것이고, 두 번째 단계는 연애 자체가 문제적이라 생각하여 적극적으로 비연애를 결단한 것이다. 
 
1. 이상적 연애관계를 설정하기

과거 서구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들은 폭력적인 이성애 관계를 거부하고, 여성들 간의 자매애를 장려하고자 여성 동성애를 정치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들이 레즈비언 자체를 숭배하고 모든 형태의 레즈비언 관계를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이 이성애를 거부한 근본적인 이유는 여성이 차별대우를 받고 착취당하는 것을 문제삼았기 때문이므로 그 연장선에서 레즈비언 관계에서 권력차가 성애화되고 이성애가부장제를 강화하는 지점들을 비판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부치/팸 역할놀이와 BDSM이다.  나는 래디컬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로서 이 분석을 받아들였고, 부치/팸 단어나 BDSM을 반대하는 것은 물론 그 외에 권력차를 성애화하는 양식, 가부장제에서 내면화한 욕망들이 없는지 탐구하였다. 그 중 내가 발견한 것들은 다음과 같다. 

  • 나이차 

   무조건 연상 혹은 연하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다. 직종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연령의 차이는 일반적으로 사회경력 차와 연결되며, 자연히 경제력, 사회적 지위의 차이도 따라온다. 그리고 나이차가 심하게 날수록 이러한 차이는 더욱 벌어진다. 더구나 한국이 나이주의가 심하고 같은 연령이 아니면 친구가 되기도 어렵다는 점을 감안할 때,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는 상관없이 '일단' 연상의 여성 혹은 연하의 여성과 만나고자 하는 태도는 권력차를 성애화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연상/연하를 선호하는 심리의 기저에는 나이가 많은/적은 사람에 대한 고정관념이 자리하고 있다. 예를 들면 연상의 여성에게는 관계를 ‘리드’하고 조언,봉사해주길 바라거나, 연하의 여성에게는  ‘애교’를 부리고 의지하길 바라는 식이다. 이런 고정관념을 가지고 연애하는 것이 부치팸 단어만 안 붙였다 뿐이지 나이주의에 기반한 역할놀이가 아니면 뭘까. 그리고 실제로 나이차를 이용해 어린 여성에게 폭력을 저지르는 일들도 발생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무조건적으로 연상/연하를 찾는 태도는 분명히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 애교, 키차이에 대한 선망 


   이 부분은 부치/팸 관계와 마찬가지로 여성성/남성성 역할수행에 포함된다. 애교는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권을 중심으로 하는 특수한 언어문화로 이성애 관계에서 주로 ‘여성에게’ 더 많이 요구된다.여성은 미숙한 어린아이의 특성을 따라함으로써 자신을 무해한 존재로 성애화하고, 남성은 애교를 즐기며 자신의 남성성을 확인받는다. 여성들 간의 애교라 해도 여성이 자신을 무해한 존재, 보호받을 존재로 성애화한다는 점,그리고 일반적으로  권력관계(대표적으로 나이 차, 지위)를 수반한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애정표현에 필수적인 요소도 아니고, 약자의 언어인 ‘애교’는 지양해야 한다.
  또한 키차이에 대한 선망도 문제적이다.큰 키, 좋은 체구와 같이 남성성으로 분류되는 신체적 특성에 끌리는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반드시 질문해야 한다. 나는 왜 하필 큰 키의 여성에게 끌리는가?올려다보는 느낌이 좋거나,의지가 된다거나 따위의 대답들은 으레 이성애자 여성들이 키큰 남자를 선호하는 이유와도 겹친다. 이들이 키큰 남자를 선호하는 이유는 그게 전형적인 남성 신체의 특성이고, 자신을 보호해줄 것 같은 듬직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그 심리적 기저에는 여성은 남성보다 신체적으로 열등하며, 따라서 보호받는 대상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즉 키큰 여성을 선호하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보호받을 대상으로 상정하는 일이다. 또한 이는 이성애 관계에 대한 모방심리일 수도 있다. 실제로 전형적인 부치-팸 관계를 수행하는 레즈비언들, 이성애 관계로 패싱하고 싶은 레즈비언들은 키 차이가 나는 상대를 선호했다. 키는 생물학적 성차와 관련되는 것으로 멀리서도 상대방의 성별을 짐작하는 데 유용한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더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찌됐든 하나하나 찾아가던 중에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따지다 보면 이상적인 연애관계가 있긴 한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왜 연애를 해야 하지, 나는 뭣 때문에 연애를 하고 싶은 거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의 흐름 끝에 나는 비연애라는 종착지에 도달하게 되었다.


2. 비연애주의에 도달하다 


 "가부장제의 잔재를 몰아내는 게 목적이라면, 래디컬 페미니스트끼리 만나는 거 괜찮지 않아?"

 많은 래디컬 레즈비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나 역시 그랬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괜찮지 않다. 그나마 각성했다 치더라도 우리 역시 가부장제에서 살아온 시간만큼 그 문화에 찌들어 있고, 친구관계도 권력차가 존재하는데 하물며 연애관계쯤이야. 래디컬 페미라 해서 인간성이 좋다는 보장이 없으며, 특히 에로스적 사랑은 그 권력차를 낭만화하여 우리의 판단력을 흐려놓기 때문에 더욱 경계해야 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레즈비언 혐오 조장이나 아웃팅 문제 때문에 쉬쉬했을 뿐 여성 간에도 사랑이란 이름으로 가스라이팅과 성폭력이 발생한다. 


   연애는 본질적으로 우리가 스스로를 상품화하게 만든다. 만남어플, 연애를 목적으로 하는 커뮤니티가 형성되면서 동성애 관계는 이성애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연애시장을 구성하였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공간은 주로 어플과 이쪽 커뮤, 바, 클럽 등으로 한정된다. 어플과 커뮤에서는 대개 프로필을 적고 자기소개와 상대의 조건을 적어놓는다. '너도 래디컬페미면, 너도 탈코했으면' 역시 내가 상대를 고르는 조건이다. 내가 상대방에게 원하는 기준을 세우고, 나 역시 상대방의 기준에 맞추며 짝을 찾는 과정에서 우리는 온전히 자유로운 한 개인일 수 없다.  물론 친구를 찾는 과정에서도 서로 마음이 맞아야 한다지만, 친구를 사귀는 과정에서 우리는 연애처럼 상대방에게  구속력을 행사하거나 은연중에 외모를 평가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성적 요구를 하지 않고 이로 인해 불편해지지 않는다. 세상에는 섹스 외에도 재밌는 게 많은데
 

  그리고 정말 20년씩 길게 사랑을 지속하는 경우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부럽다고 느끼는 것 아닌가. 현실적으로 사람 감정이란 변하는 것이니 헤어졌을 때도 생각해야 한다. 만약 둘 다 페미니스트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면 좁은 판이므로 시위나 강연, 스터디 등에서 마주치기도 쉽다. 서로 어색한 상황이 만들어지는 건 둘째치고, 연애 사실을 자랑삼아 말하고 다녔다면, 헤어지고 나서 남들의 안줏거리쯤으로 소비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CC나 사내커플의 단점이 그대로 적용된다는 뜻이다.

   물론 남들이 바라는 정말 이상적인 연애를 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델을 따라 연애를 하는 분위기가 주류가 될 수는 없다. 이는 결국 이성애자 여성들이 갖는 연애에 대한 환상과 크게 다를 것이 없으며, 연애상대를 찾고 만나는 과정에서 경제적, 심리적 자원과 시간을 투자한 만큼 실제 연애관계가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서로를 발전시키고 힘이 되는 관계가 굳이 연애라는 방식일 필요는 없다. 소울메이트, 혹은 멘토-멘티와 같이 서로를 구속하지 않으면서도 친밀한 관계들을  상상함으로써 우리는 여성 간 친밀성에 대한 지평을 넓힐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외로워서 연애를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말한다. 왜 외로움을 느끼는지 스스로 질문해 보아라외로움을 느끼는 이유로는 "남들은 다 하니까" 연애하지 않으면 소외되는 느낌을 받는 것도 주된 이유가 되겠지만, 애정결핍과 관계중독 등의 심리적인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심리적인 문제는 차치하고, 전자의 경우만 이야기해 보겠다. 이는 사회에서 비혼 여성을 후려치는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 비혼 여성은 동물을 키우거나 친구와 동거하는 선택을 해도, 남자와 함께 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외롭지 않니?"라는 물음이 항상 따라다닌다. 탈혼 후  재혼하지 않는 여성에게도 사람들은 똑같은 질문을 한다. 여자들끼리 동거하거나 반려동물을 키운다고 해도 이성애중심적인 사회는 남자가 필요없는 우리의 욕망을 간단히 무시하면서 레즈비언과 무성애자 여성을 함께 지워버린다. 비혼을 결심하는 여성에게는 "그러면 외롭지 않겠니?"라고 질문한다. 남자 없이 생활하면 외로움을 느끼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우리는 강제로 외로움을 '주입당했다'.  

  남들이 당신을 미쳤다고 가스라이팅할 때, 당신은 스스로의 정신상태를 의심해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연애하지 않는 여성에 대해 자꾸 외롭고 경쟁에서 탈락한 이미지를 부여할 때, 당신도 비연애주의란 선택을 부정적으로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주입된 감정을 진짜 내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없다. 이미 연애를 해본 사람들이라면 365일 24시간 내내 함께 있지 않으므로, 연애 자체만으로 외로움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을 알 것이다. 그럴진대, 외로움을 해소하는 수단으로 사람을 만나기보다 혼자 있는 시간에 가치를 부여하는 새로운 시도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 



레즈비언이면서 비연애주의가 가능한가?


  최근에 그런 질문을 받았다. '여자랑 연애도 안 하고, 섹스도 안 할거면 대체 왜 레즈비언이란 이름을 쓰냐, 가시화에 방해된다'는 것이었다. 

   확실히 비연애주의 레즈비언들이 레즈비언 가시화에 별로 도움은 되지 않는다. 물론 우리도 여성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스킨십도 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이성애중심 사회가 위협적으로 느끼는 '동성애'를 재현하지 않기 때문이다. 4B를 실천하면서 여성끼리 동거하거나 혼자 사는 건 이성애중심 사회를 확실히 위협하고, 많은 레즈비언들도 애인과 함께 살기를 바라지만, 그런 생활방식이 레즈비언의 삶으로 독해되지는 않는다. 여자끼리 손 잡고 다녀도, 이성애커플의 인기 데이트장소를 찾아도 그냥 친한 친구관계로 읽힐 뿐 레즈비언이라 이해하지 않는 분위기이므로, '비연애주의' 레즈비언이 뜬금없게 들릴 수 있겠다. 

   그러나 가시화 차원에서 도움이 안 되는 것과 별개로, 여러 레즈비언 군상 중 하나로 비연애주의 레즈비언은 존재한다고 말하고 싶다. 가시화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비난받아야 한다면, 커밍아웃하지 못하는 레즈비언들도 비난받아야 하는가. 그리고 커뮤니티나 어플이 늘 연애/섹스상대를 구하는 글로 넘쳐난다는 점을 생각할 때, 지극히 소수인 비연애주의자들의 존재는 다른 레즈비언들의 존재를 지우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다. 
 
또한 레즈비언이 여성과 연애/섹스하리란 기대를 받는 건 사실이지만, 단순히 수행여부로 정의되는 정체성은 아니다. 이성애자로 패싱하고자 여성과의 연애를 철저히 숨기거나 사귀지 않는 벽장 레즈비언은 레즈비언이 아닌가? 영화에서 레즈비언 섹스를 연기하는 여성은 반드시 레즈비언인가? 과거 여성과 연애하다가 어느 순간 아이고 다 부질없다 현타가 와서 연애를 그만두는 여성이 있다. 그러면 이 여성은 더 이상 레즈비언이 아닌가? 노화의 결과로 성욕은 감퇴하고 새로운 관계를 맺고자 하는 열정도 줄어드는데, 그러면 죽을 때는 레즈비언이 아니게 되는 것일까. 심지어 망혼해 커뮤니티를 떠나는 이들도 우리는 이성애가부장제에 순응한 '레즈비언'이라 이해하지, 이들을 이성애자가 되었다고 설명하지는 않는다. (이와 같은 설명은 정치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성애중심주의라는 사회적 압력을 무시한 채 이성결혼 수행만으로 이성애자가 되었다고 인정해버리면, 탈반을 조장하는 기독교 혐오세력의 손을 들어주는 꼴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레즈비언은 단순히 비연애를 실천하는 것만으로 레즈비언이 아니게 되지는 않는다. 사람마다 레즈비언 범주에 대한 이해는 다르겠지만, 레즈비언 경험을 공유하며 스스로 여성을 사랑하는 여성이라는 의식이 있는 한, 비연애주의 레즈비언은 레즈비언이다.
 

커뮤니티 밖으로 나가는 여성들 


 비연애주의자 레즈비언은 커뮤니티에 남아 있기도 하지만, 커뮤니티에서 자신의 자리가 별로 없다고 느끼고 커뮤니티를 점차 멀리할 수 있다. 일단 이쪽 커뮤니티는 다양한 화젯거리를 이야기하기보다, 연애/섹스상대를 찾는 게 주목적인 사람들이 많고, 연애/섹스 관련글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친구로서 만나면 되지 않느냐 반문할 수도 있는데, 내 대답은 ‘글쎄’다.  애초에 우정과 연애감정의 경계가 그렇게 확실하게 나누어지는 건가? 역사적으로 연애하는 것처럼 로맨틱한 표현을 쓰며 우정을 나누던 여성들도 있고(블루스타킹) , 처음에는 그냥 친구로 지내다가 사귀게 될 수도 있다. 수많은 이성애자들이 여성과 남성은 친구로 지낼 수 없다고 믿듯이, 우리도 (잠재적으로) 그런 관계가 될 수 있음을 가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누구와도 연애를 하고 싶지 않은데, 친구로 만나고 싶은 여성이 자신을 (잠재적) 연애상대로 본다고 생각하면 아무래도 부담스럽지 않겠나. 그래서 이들은 자신을 보통의 레즈비언들과 이해관계가 다르다 생각하고 커뮤니티를 떠나고 일부는 아예 다른 지향성으로 재정체화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레즈비언 커뮤니티를 떠난 이 여성들은 어디로 가는가?이들은 비연애,비섹스를 지향하는 공간을 찾게 되는데 대개는 여성주의 기반의 일반 여성 커뮤니티로 유입된다. 그 이유는 첫째로, 여성 커뮤니티는 레즈비언 커뮤니티와 함께 폐쇄성을 공유하며, 레즈커뮤와 마찬가지로 여성전용공간이기 때문에 이들에게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다. 또한 지겹도록 연애글을 보다가 연애전시가 금지된 공간에 오면 자신을 포용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반면 무성애자 커뮤니티로는 잘 가지 않는데, 여성들이 독자적으로 분리주의 커뮤를 만들어 나오지 않는 한, 기본적으로 여성전용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최초의 무성애자 정의는 자위도 안 하는 무성욕자와 사실상 동의어로 쓰였으나, 지금은 섹스를 하지 않을 뿐 연애하는 사람들마저도 스펙트럼에 포함시켰기에 내부에서 동질감보다 차이를 더 많이 경험하는 것도 다른 한 가지 이유다.  
 
  이들이 커뮤니티를 떠나고, 재정체화하는 일은 레즈비언 집단에서 보면 소실이지만, 여성주의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성애를 엮거나 여성을 버리고 다른 무엇으로 정체화하지 않는 한 크게 부정적인 현상이라고 생각지 않는다.지금껏 크게 조명된 바 없는 래디컬 페미니스트 안의 무성애자들은 동성애를 탈이성애의 대안으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남성을 거부함으로써 레즈비언들과 함께 저항해 왔다. 또한 커뮤니티를 떠나는 것 자체가 곧 레즈들 일에 아예 관심 끊겠다는 뜻도 아니다. '나랑 외않자조'라면서 레즈비언에게 TERF 낙인을 찍는 트랜스젠더에게, 레즈비언 전용공간의 소실에, 여자 갈아먹는 남성중심 퀴어판에 분노한 건 비단 레즈들뿐만이 아니었다. 레즈비언 가시화의 날을 축하하던 사람들, 생활동반자법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레즈들뿐만이 아니었다. 조금 더 자신의 이해와 일치하는 공간과 언어를 찾아나선 이들을 납작한 시선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커뮤니티 안/밖을 이원화하는 편가르기는 단절을 심화시킬 뿐이다. 우리는 이해를 달리하면서도, 차이를 넘어 또다시 만날 것이다. 




p.s. 분명히 나는 비연애를 지향하고 더 많은 여성들이 연애 강박에서 벗어나길 바라지만, 페미니즘은 레즈비언과 관계가 없다거나, 레즈비언이 미개하다 혹은 동성애를 강요한다 식의 혐오발언까지 용납할 생각은 없다. 물론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을 여성과 연애하라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도 포함된다.






  1. 나는 스스로 성적 끌림의 대상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일련의 성적 실천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반성애주의antisexualism, 그런 사람을 반성애자antisexual라고 부를 것이다. 이는 무성애자asexual와는 다른데, 지금의 무성애자 스펙트럼은 엄청나게 확장되어 무성애자 중에도 연애를 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무성애자들 모두가 연애/섹스를 비판하지는 않으며 그냥 존중만 해라 마인드인 사람도 많다. 따라서 이 사람들을 수용하기에 무성애자란 범주는 너무 포괄적이다.
    금욕주의celibacy도 있긴 하지만, 흔히 종교적 맥락에서 사용되기 때문에 종교를 비판하고 탈종교 영업하는 이들에게 어울리지는 않는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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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혜리(Hyeri Nam)

6B radical feminist,lesbian,liberal right-winger, atheist,contents 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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