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자: 남혜리
원제: Heteropatriarchal Semantics and Lesbian Identity: The Ways a Lesbian Can Be
Julia Penelope, <Call Me Lesbian: Lesbian Lives, Lesbian Theory> (Crossing Press, 1992) 부분번역
원문 링크
서문
지난 20년 동안 레즈비언 커뮤니티를 방해하고 망친 ‘이슈들’ 중 특히 한 가지, ‘여성성’은 레즈비언을 집결시키고 레즈비언의 입장에서 레즈비언 운동을 창조하려는 우리 노력을 무산시킬 가능성이 있다. 여성성을 수용하기 위해 되풀이되는 정당화 논리는 분노와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는데, 이성애 가부장제에서 레즈비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다. 레즈비언이란 ‘여성’이 되는 노력을 거부하는 사람, 그의 가능성을 제한할 남자들의 설명과 규정에 도전하는 사람, 이성애 가부장제 현실의 바로 그 기반을 거부하는 사람이다. 레즈비언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은 위기에 봉착했다.
'립스틱 레즈비언', '삐쭉머리의 다이크' , 혹은 '팸' 1, 그들을 뭐라고 부르든 이들은 우리 커뮤니티에 등장했으며 우리의 운동은 다양한 모습들 가운데 있다. 이들은 외모와 행동에 대한 우리의 지지와 승인을 요구하며, 주체적으로 메이크업을 하고, 하이힐을 신고, 가터벨트를 하고, 남자에게 박히고, 착취하고, 이용하고, 레즈비언들을 학대할 권리를 주장한다. 나같은 레즈비언이 그들의 주장에 반대하면, 이들은 우리를 욕하고 우리 삶을 폄하하며, 우리를 ‘억압자’라고 부른다. 간단히 말해, 이들의 아젠다는 레즈비언의 정치적 운동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피해자' 역할을 하고, 괴롭히고, 거짓말하고, 애교를 떨고, 조종하고, 명백히 멍청한 짓을 함으로써 말이다.
나는 왜 어떤 레즈비언들이 레즈비언 '여성성' 미덕을 극찬하고 레즈비언 '남성성'을 공격할 때 정당하다고 스스로 확신하는지 이해를 못하겠다. '여성성'과 '남성성'을 레즈비언의 관점에서 의미있는 것처럼 사용하는 레즈비언에게 동의하기 어렵다. 여성성과 남성성은 이성애 가부장제(HP)의 단어이기 때문이다. 이성애 가부장제는 '수용가능한' '허락할 수 있는' 여성의 외모와 행동의 경계를 정하고, 그 여성에는 레즈비언도 포함된다. 이성애 가부장제의 의미체계(HS)는 생물학적 성별에 따라 행동과 성격이 결정된다는 듯이 여성성과 여성됨을, 남성성과 남성됨을 등치시킨다. 이 등식을 바탕으로 이성애 가부장제는 여성의 여성성과 남성의 남성성에 가치를 둔다. 이 체계에서 여성적인 여성만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지지만, '남성성'으로 불리는 것을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드는 것처럼 보인다. 결과적으로, 이성애 가부장제가 강요한 여성성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여성은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여성성을 답습하는 행동양식과 사고방식을 학습한 여성적인 여성은, 정의에 따르면 '인간'에 미치지 못한다. 대조적으로 '남성성'은 남자들의 문화적 경계를 설정할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는 이런 행동을 금지하고 동경하지 못하게 한다. '남자같이' 행동하는 여자들이 비정상적이고 '나쁘기' 때문에 여성성은 매력적인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여성성의 부속물이 본질적으로 자신을 이등시민의 지위로 제한할지라도, 여자들은 이를 기꺼이 몸에 익힌다. 이성애 가부장제의 언어에서 이는 그저 '바람직한' 선택지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체계에서 남성 헤게모니가 강요한 한계에 저항함으로써 평가절하당하는 것보다는 이등 시민의 지위를 받아들이는 편이 분명히 더 보상을 받는다.
안타깝게도, 여성성을 적극 수용하고 극찬하는 이들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레즈비언들은 '억압자'라 공격당하고, '남자를 흉내낸다'고 조롱당하며, '파시스트'와 '네오나치'라는 낙인이 찍힌다. 이성애 가부장제의 이분법을 중요하게 받아들이는 레즈비언들은 우리가 거부하는 흑백논리에 갇혀 있다. 개인적인 것과 사회 변화를 위해 헌신하는 레즈비언들은 이성애 가부장제의 이분법과, 여성성에 가치를 두는 여성혐오로부터 우리 스스로 벗어나길 원한다. 뿐만 아니라 여성적, 남성적 같은 말로 강요당한 한계를 넘어서 사고하는 법을 배우고, 여성적이지도 남성적이지도 않으면 어떨지 상상하길 원한다.
이 작업을 시작하기 위해 먼저 질문을 해야겠다. “레즈비언의 관점에서 레즈비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내 생각에, 레즈비언이 어떻게 이성애자, 양성애자, 남게이와 다른지 확인하고 우리가 당하는 억압이 이런 차이에 기반한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에서 논의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흑인들이 그들 자신의 정체성을 백인 지배자와 완전히 다른 것으로 확립했던 것처럼,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자기 문화를 말살한 백인들이 정의내린 그 정체성을 거부했던 것처럼, 레즈비언들도 반드시 차이를 정체성의 핵심으로 삼아 남자들이 만들어낸 우리 정체성을 인정하는 자들에게 저항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고유하게 레즈비언으로 만드는 특징들로 정체화해야 할 것이다. 이는 어찌되었든 우리가 따돌림당하는 이유이다. 우리가 이성애 가부장제에서 태어나지 않고, 자라지 않았고, 살지 않은 체를 할 수 없듯이 이성애 가부장제나 그것의 가치를 무시할 수 없다. 우리의 사상과 가정의 기원이 이성애 가부장제란 사실 또한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확실히 이런 가치와 가정들을 잊어버릴 수 있으며, 그 첫 단계는 여성성과, 여성성이 우리에게 ‘좋다’는 사고를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가 여전히 '무엇이'에 대한 남자들의 설명을 타당하다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오늘날 레즈비언들은 여성성과 남성성 양극의 사이에서 여러 모로 고민하면서 이성애 가부장제의 이분법으로 분할된 상태이다. 다수의 레즈비언들은 심지어 우리가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를 상상하지 못했고, 이성애 가부장제 경계 바깥에 있는 선택지를 추구할 상상조차 못했다. 그들은 여전히 이성애 가부장제의 맥락에서 더(그리고 덜) 편하게 살아남을 방법에 사로잡혀 있다. 그리고 이 맥락은 이성애 가부장제의 언어로 설명된 세계를 진짜라 받아들이라고 요구한다.
'여성적'이 될 것이냐, '남성적'이 될 것이냐에 대한 논쟁이 아니다. 레즈비언이란 존재가 뭘 의미하느냐에 대한 것이다. 레즈비언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레즈비언의 관점에서 레즈비언이 되고, 레즈비언으로 살고, 레즈비언처럼 생각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이성애자 여성, 양성애자들과 어떻게 다른지 확인함으로써 시작해야 하며, 우리의 일탈을 정체성의 핵심으로 삼아야 한다. 레즈비언은 남자랑 떡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남자를 삶의 중심에 놓는 걸 거부한 유일한 집단이다. 우리는 바로 여성에게 초점을 맞춘 삶을 사는 유일한 집단이다.
하지만 우리는 단일한 집단도 아니다. 레즈비언 정체성의 기반을 확립하기 위한 노력으로, 우리는 우리가 레즈비언 공동체에 가져온 생애사가 얼마나 복잡하고 상호작용에 혼란을 빚는지 끊임없이 직면하고 있다. 우리 개개인이 다른 경험과 배경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필히 레즈비언의 맥락에 끌어온 이성애 가부장제의 가정과 그 체제의 가치들을 명명하고 인식해야만 한다. 2서로를 갈라놓은 이성애 가부장제의 요소들로부터 벗어나게 되기 이전에 이 작업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여전히 내재된 이성애 가부장제의 태도에 대해서도 잊어버리기 전에 인지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두 가지를 해낼 수 있다. 인종차별주의를 버리는 백인 레즈비언들이 이 과정의 좋은 예이다. 나이주의적 태도를 버리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나로서는 여성성이 레즈비언의 상황에서 바람직한 가치가 될 수 있다고 생각지 않으며, 왜 여성성을 거부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레즈비언 운동인지 설명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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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즈비언들은 우리가 타당하며 정확하다고 인정한 ‘세상의’ 설명으로 서로 분할되어 있다. 우리는 이성애 가부장제의 사고와 행동방식에 물들지 않은 상태로 레즈비언의 삶을 시작하거나 레즈비언 공동체에 들어가지 않았다. 우리끼리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많은 부분들은 남자들이 우리에게 소개한 현실 버전을 얼마나 온전히 신뢰하는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어떤 레즈비언들이 이성애 가부장제의 현실 서술이 본질적으로 정확하다고 믿는 반면, 다른 레즈비언들은 이 설명이 완전히 틀렸다고 믿는다. 어떤 레즈비언들은 이성애 가부장제의 현실 일부를 받아들이며 다른 레즈비언들은 이를 거부한다. 우리가 이성애 가부장제의 전제를 뒷받침한다는 사실은 영어를 사용하는 방식에도 반영되어 있다.
우리가 제1언어를 획득하는 경험은 하나의 현실이 있다고 믿게끔 우리를 기만하고, 그 현실은 제1언어로 부호화되어 우리에게 전해진다. 많은 미국 레즈비언들이 영어를 제1언어로 배웠고 미국판 현실을 영어로 배웠다. 다른 여느 언어와 마찬가지로, 영어는 사회의 화자들 다수가 선호하는 형태의 현실을 설명하며, 그 화자들끼리 동의한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우리에게 강요한다. 미국은 이성애 가부장제 사회, 즉 이성애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전제하며 여성이 종속되는 것이 '당연한' 문화를 가진 사회이다. 영어는 이러한 전제들이 논의할 여지가 없는 사실인 것처럼 설명하는 수단을 화자에게 제공한다. 남성적, 여성적이라는 단어는 오로지 이성애 가부장제 현실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개념들을 설명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단어들이 존재하고 지속적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이 이 용어가 '현실' 혹은 실제적인 것을 의미한다는 뜻은 아니다.
영어는 사회가 그 화자들의 경험과 인식을 부여한 체계, 개념적인 틀이다. 체계를 극복하는 방법, 이런 문화에서 인정받지 못한 가치와 인식을 표현하는 방법들이 있다 . 그러나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고 쓰는 데 투자하지 않을 일과 사상을 가져가는 것이다. 레즈비언이 이성애 가부장제 문화가 인정, 지지하고 수용하는 단어를 사용하는 한, 그는 영어가 설명하는 제한된 현실 속에서 이해, 해석될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우리가 영어를 사용하면서 완벽히 이성애 가부장제의 전제를 피할 수 있다는 생각이 레즈비언에게는 특히 위험한 망상이다.
레즈비언 화자들에겐 ‘의미상의 문제’가 있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혼자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이는 우리가 영어로 사고하고 말하기를 배울 때 강요당한 것이다. (사투리도 별다를 바 없다고 본다.) 일부 레즈비언들은 아마도 우리 문제가 의미론적이라는 내 주장에 반발할지도 모르겠다. 이성애 가부장제에서 역기능적인 대화는 의미론이 상관없거나 '명백하다고' 생각하는 논점을 흐리는 이유인 양 “그건 단순히 의미상의 문제야” “그냥 의미에 대한 질문이네” “나랑 말장난하지 말자” 같은 표현과 함께 러그 밑으로 쓸려나간 말이기 때문이다. 나는 의미론의 중요성과, 우리가 더 면밀한 주의를 기울여야 함을 말하고자 한다. 우리는 의미체계가 자명하다는 이성애 가부장제의 주장이 사용되도록 받아들일 수 없으며, 의미체계가 우리 사이에 오해를 만드는 방식을 계속 무시할 수 없다.
의미체계의 문제는 대개 우리가 수용하는 다양한 양상의 현실로부터 비롯되며, 같은 단어를 쓰는 것이 같은 것을 이야기한다는 의미라고 가정할 때 우리는 곤경에 빠진다. Linda Strega(린다 스트레가)의 <불티나게 팔리는 것- 레즈비언 여성성The Big Sell-Out: Lesbian Femininity>이 실린 <레즈비언 윤리학 Lesbian Ethics> 1985년 가을호와 Paula Mariedaughter(파울라 마리에도우터)와 Mary Crane(메리 크레인)이 그 분석에 응답한 1986년 봄호 사이에서 발생한 일이 의미 혼동의 좋은 예이다. 3 스트레가는 자신의 논문에서 레즈비언 사이의 차이를 언급하고자 부치와 팸을 사용하였는데, 이런 분류를 쓰는 게 레즈비언들의 관습이었으며 레즈비언 대중에게 의미있었기 때문이다. 스트레가는 부치란 단어를 기존의 뜻, 일부 레즈비언들이 사용하던 뜻과 다르게 사용하였다. 그 과정에서 그는 부치와 레즈비언을 섞어 쓰는 듯 보이면서 부치란 단어에 정치적 본질을 부여하였다. 하지만 부치와 팸은 우리 레즈비언 역사[herstory]로부터 의미체계의 방해물을 가져왔다. 과거 이 단어들의 의미와 마리에도터와 크레인이 사용한 방식은 스트레가가 원했던 방식은 아니었다.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 이들의 방식은 이들이 레즈비언 삶의 동일한 양상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스트레가가 가장 중요하게 다룬 한 가지는 레즈비언들 대부분이 남성적인 레즈비언들보다 여성적인 레즈비언을 훨씬 더 높게 쳐준다는 것이었다. 레즈비언 커뮤니티는 일반적으로 (평생) 남성적인 레즈비언들을 불신하고, 피하기까지 하는데 이는 우리가 (19세기 성과학자들이 선전했던) 20세기 ‘진짜 레즈비언’ 고정관념에 맞추려 하기 때문이다. 반면, 커뮤니티는 대조적으로 여성적인 레즈비언들에겐 귀를 기울이고 환영하는데, 이들이 이성애 가부장제의 ‘여성스러운 여성’의 전형을 충족하기 때문이다. 4
내가 볼 때, 우리 사이에서 남성성으로 여기는 것보다 여성성에 더 가치를 부여하는 일은 의심할 여지 없이 지독한 방식의 레즈비언 혐오를 반영한다. 왜 남자들의 이상에 순응하는 것이 여성적인 레즈비언들에 대한 더 깊은 신뢰로 이어지는가? 이는 계속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혼란을 이해하고 해결에 접근하기 위해, 우리는 영어의 이성애가부장적 의미체계 요소들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
이성애가부장적 의미체계
왜 레즈비언들은 이성애자들을 따라 여성적인 여성을 가치있게 여기고 '남자 같은' 여성을 폄하하는가? 그 해답은 영어의 의미론에 있다. 다이어그램 1은 '합의된 현실Consensus reality'이라 불리는 이성애중심적 가부장제의 의미체계에서 중요한 한 부분을 나타낸다. 합의된 현실이란 다수의 사람들이 참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진실인 양 행동하는 현실을 의미한다. 다이어그램은 어떻게 이 의미론적 '영역'이 우리의 장기기억에 저장되었는지를 시각화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이성애중심적 가부장제를 강요당한 우리의 경험을 나타낸 표이다.
다이어그램 1의 대조표는 이성애 가부장제 버전의 ‘인간이란’ 무엇인지 나타낸다. 대조표에 의미를 부여하는이분법은 ‘우리’ 종의 많이들 아는 성별이형성sexual dimorphism을 바탕으로 한다. 즉, 호모 사피엔스에는 1,2차 성징에서 다른 특성을 나타내는 두 성별이 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상식선에서 이해하는 세상에 대한 부분적인 설명일 뿐이다. 예를 들어, 그 단어 자체는 성별 이분법에 기반한 합성어(헤르메스[+남성]와 아프로디테[-남성])지만 양성구유자는 세상을 설명하는 이 대조표가 불충분함을 드러낸다. 이런 설명은 모순되는 증거에도 불구하고 이성애가부장적 의미체계를 수호하려는 서투른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건 현실에 대한 설명이 정확하지 않으며, 단순히 그 성별이분법을 다시 가져오는 것으로는 현실의 양상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성별이형성은 이성애중심적 가부장제의 의미론, 정치학, 그리고 성격의 토대이다. 성격은 이성애중심적 가부장제에 따르면 생물학적 성별에 기반하고 있다. 생물학은 행동, 매너리즘, 외모, 감성 스타일, 그리고 개인의 사고방식을 결정한다. 이는 단일원인론적 이데올로기다. 성별이형성은 수많은 종이 사용하는 번식방법이나, 꼭 필요하지도 않고 거부할 수 없는 것도 아니며,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다른 번식방법보다 생물학적으로 우월하지도 않다. 우리 인간종을 포함해 많은 종은 단성생식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면 도마뱀, 물고기, 갈매기, 일부 식물종) 그러나 오직 인간만이 그 방법을 발명하고 완성한 것처럼 번식능력에 집착하는 것처럼 보인다.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생물학적 성이나 번식가능성이 성격의 기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전혀 당연하지 않다. 키,몸무게 내지는 점성술처럼 출생시각의 지구에 대한 천체의 위치로 성격을 분석하는 편이 차라리 낫다. (전통적인 점성술은 성별이형성을 성격유형에 대한 설명과 섞어버린다.)
이성애는 다이어그램 1에서 명백히 나타나지 않는데, 이는 세상의 이성애 가부장제의 설명과 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성애 가부장제의 논리는 이성애가 필연적으로 ‘구멍 안 막대기 행동이론’ 혹은 “기능은 형태를 따른다”로 표현되는 성별이형성에 뒤따른다는 점을 가정한다.
1) 남자는 자지를,여자는 보지를 가지고 있다.
2) 자지는 보지 안에 쑤셔넣을 수 있다.
그러므로 자지가 존재하기 때문에 보지가 존재한다.
특정 성기는 필히 정해진 방식으로 써야 한다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기능이 형태를 따르며 이것이 ‘자연스럽다’는 가정은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이성애자뿐만 아니라 레즈비언들도 이를 믿는 것은 놀랍지 않다. 이미 전제로 굳어져 바꾸기 어렵다. 우리 레즈비언들은 추방된 신분이므로 이성애에 문제제기하기 어렵다. 세상의 이분법적 시각에서 우리는 안티테제다.
이성애중심적 가부장제에서 이성애의 사고방식과 그 '자연스러움'은 논쟁거리가 될 수 없다. 그 체제는 여러분이나 내가 던지는 류의 '질문을 허용하지 않으며' 도전받아선 안 되는 것이다. 이를 의심한다면 차(혹은 자전거나 보드)에 "낙태가 범죄면, 떡치는 건 중죄다" 범퍼스티커를 붙여라. 여성이 임신중절 수술을 할 권리는 논쟁거리가 된다. 하지만 이성애 성교의 '필요성'은 그렇지 않다. 다른 문화들은 성별이형성을 다른 방식으로 취급하며, 이는 그 문화권의 언어에 반영된다. 나는 여기서 미 대륙에 영향을 준 문화에만 관심있다. 여성적이라서 얻는 특권을 부정하는 어떤 레즈비언들은 '문화상대주의'와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권으로 행동이나 의복양식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흥미를 갖는다. (Lesbian Connection 9, 1 [July/August 1986], p. 17) 나는 사리, 5 무무, 6 스코틀랜드 지방의 킬트를 입는 남자들에 대해 말하려는 게 아니고, 20세기 미국에서 치마, 드레스, 하이힐, 메이크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성애중심적 가부장제는 필연적인 가정인 이성애와 함께 성별이형성을 기저로 한다. 한 종을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는 것은 첫 단계일 뿐이다. 만약 개인이 생물학적 성별이 중요한 특성이라고 생각한다면, 개인은 그런 구분이 +남성/+여성 인식체계를 만들었다고 가정할 수 있다. 하지만 영어는 이 경우가 아니다. 그 대신 성별 이형성은 +남성/-남성으로 부호화된다. 영어의 인식체계에서 여성이 -남성이라는 것이 독자 여러분에게는 곧장 명백하게 와닿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설명한다.
영어에서 남성은 규범, 표준의 위치를 차지하며, 여성은 비남성('타자')이다. 단어 쌍의 활용은 여성의 관점에서 명시적으로 수정되지 않는 한, 어떻게 남성됨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지를 보여주는 친숙한 예이다. 의사, 변호사, 예술가, 작가, 엔지니어, 외과의사, 조각가, 시장, 기수 등등은 남자일 것이라 생각한다. ‘여’의사, ‘여자’ 변호사, ‘여류’ 작가, ‘여자’ 조각가라고 라벨이 붙지 않는 한은 말이다. 이는 모든 유망 직종에서 성립한다. 대조적으로, 여성이라 여기는 직업에 그 종사자가 남성일 경우 분명한 수식어가 붙는다. 비서, 창기, 간호사. 이 직업들은 사회적 지위도 낮고 저임금이다. 남성이 이 직업군에 속하면 그는 남비서, 남창, 남간호사라 불린다. ‘모든 것의 척도인’ 남자에 대한 준일반pseudo-generic 남자, 대명사 he를 사용할 때도 마치 여성을 참조로 아우르는 것인 양 남성이 일반적이고 여성이 비정상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영어에서 모든 ‘사람들’은 특별한 조건이 없는 한 남성이라고 여겨진다. (우리가 스스로를 남성의 언어, 예를 들면 동성애자와 게이, 에 포함시킬 때 레즈비언들은 지워진다.)
다이어그램 1의 가장 왼쪽 열은 이성애가부장적 의미체계의 ‘공간’을 생물학적, 기능적, 행동적이라는 세 개의 구체적인 수준으로 나눈다. 이런 순서로 배열한 이유는 이성애가부장적 의미체계에 내재된 논리가 각 수준 사이의 함의관계를 가정하기 때문이다. 개인이 (대개) ‘남성’ 혹은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을 고려하면, (프랑스어 femalle에서 비롯된 여성female은 남성male에서 파생된 것처럼 보이게끔 14세기에 어원적으로 재정의되었다.) 이는 개인이 남자 혹은 여자 구실(아버지 또는 어머니)을 한다는 생물학적 특성에서 귀결된 것이며, 이 역할 설명으로부터, 이성애 가부장제의 언어로 ‘남성적’ 또는 ‘여성적’인 개인의 행동은 필히 개인의 역할과 생물학-에 문화적으로 적합하다고 귀결된다. 개인이 여성으로 태어나면, 개인은 또한 본질적으로 여자고, 이성애가부장적 문화에서 여성이 된다는 건 필연적으로 '여성적'이고 '여자 같다'는 소리다. 이러한 함의관계는 ‘여성스러워지다’가 ‘여성이 되다’를 뜻하는 것처럼 사용될 때 두 단어를 영어에서 동의어로 만든다. 미국에서 여성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여성스러워진다는 뜻이다. 여성스럽지 않은 여성은 이성애 가부장제의 언어에서 수용될 수 없는 모순이다.
대부분의 이성애자들, 그리고 레즈비언들은 영어의 의미체계가 서술한 현실의 설명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이들은 영어의 서술의 한계, 사실상 현실의 한계를 당연시한다. 개인은 남자거나 남자가 아니다. 남자는 비교의 척도다. 여성을 주로 공략하는 잡지 Savvy의 TV광고도 이런 전제를 보여주었다. " 직장에서 성공하기 위해 남자처럼 될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은 여성이 되기로 할 수 있어요." 이성애자들이 일부 레즈비언들을 계속 '선생님sir'이라 부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우리가 레스토랑, 주유소, 우체국, 그 외 다른 공공장소에 모습을 드러내면 우리를 대하는 누구든 체구, 몸무게, 키, 목소리, 몸짓, 옷차림, 머리길이 등의 '관련된 모습'을 스캔한다. 이러한 정보는 복합적인 성별분석을 제공하고, 사람들에겐 오직 +남성과 -남성이란 두개의 범주밖에 없기 때문에 +남성의 종합적 특성을 지닌 레즈비언들은 '선생님'이라 불리운다. 사람들은 우리를 레즈비언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그들은 개념지도에 신체를 대응시킨다. 1960년대 로큰롤은 이 작용하는 전제를 나타내었다.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만 있지" 마찬가지로, 다른 레즈비언을 '남자 같다', '남성적이다', '남자나 할 법하다'고 설명하는 레즈비언들은 이성애 가부장제의 현실을 정당화하고 다른 레즈비언들을 부정함으로써 그 체제의 가치를 우선시한다.
행동적 수준(III)에서는 각 성별에 해당된다고 여기는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가장 많이 사용하는 형용사를 나열하였다. +남성/-남성 이분법의 중요성과, 이성애가부장제가 반드시 유지해야 할 경직성은 다이어그램 1에 두 가지로 분명히 드러난다. 첫째, '진짜 남자'와 '진짜 여자'를 포함시켰는데 이는 '거짓된' 남성과 여성이 있음을 전제한다. 즉, 퀴어들은 그 가능성이다. 이는 우리가 이성애 우월성을 강화하는 전제조건과 같이 의미론적으로 실현 가능한 한 가지 방법이다. 양 측의 표현은 수준 I, II, III 사이에서 논리적 함의의 정확성을 가정한다. 만약 개인이 여성이면, 그는 반드시 이성애자이고 2세를 생산하고, 적절한, '여성스러운' 행동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징적으로 재현하지(그리고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으면 수준 II 나 III의 논리적 함의의 어떤 방식에서 그는 '진짜 여자'가 아니다. 그는 이성애 가부장제 체계의 논리와 상충되기 때문에 ‘다른 무언가’이다. 그는 무엇인가. 그는 자신을 여성 로봇으로 만드는 7 모든 시도를 거부하는 레즈비언이다! 어떤 이들은 이 레즈비언을 ‘부치’라고 잘못 부른다. (비록 과거 여성화에 저항한 많은 레즈비언들이 자신들을 ‘부치’라고 불렀지만)
둘째, 마지막 한 쌍의 단어, ‘여자 같은/남자 같은’은이러한 의미론적 형태에 결부된 중요성을 보여준다. 두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이 체계를 부정 혹은 ‘침해’한다는 신호를 보낸다. ‘여자 같은’ 남자는 어떤 면에서 ‘여자처럼’ 행동한다고 여겨진다. 그는 화날 때, 좌절할 때, 혼란스러울 때, 몹시 슬플 때 아마 울 수도 있다. 그는 다리를 꼬고 앉을지도 모른다. 그는 땅에서 뭔가를 주울 때 허리를 구부릴 수도 있다. 뭐가 되었든 간에, 그는 이성애가부장적 의미체계에서 '부적절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남자 같은' 여성은 '선을 횡단함으로써' 이분법의 형태를 부정해 왔다. 그는 공격적이고, 금욕적이거나, 소극적일 수도 있다. 그는 머리를 '너무' 짧게 할 수도 있다. 그는 '너무' 키가 크거나, '너무 많이' 몸무게가 나갈 수도 있다. 그는 좁은 보폭 대신 넓은 보폭으로 걸을 수도 있다. 여성 범주를 부정한다고 독해되는 행동이 무엇이든 간에, '남자 같다는' 말은 "'너무 멀리' 가지 마", "너는 퇴출이야"라고 여성을 모욕하고 경고를 주는 목적으로 사용된다. 의미체계의 침해는 의미체계의 배제로 이어지고, 의미체계의 배제는 사회적 추방으로 이어진다.
이성애가부장적 의미체계의 영역이 굳건히 유지되었기 때문에, 지난 10년간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양성성' 도입 시도는 실패가 예정된 것이었다. 첫째로, 이 단어는 그들이 대체하고자 한 '남성적/여성적' 이란 심리학적 이분법을 입증한다. 만약 두 개별적인 행동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하나는 남성의 자리고, 다른 하나는 여성의 몫이며, 결합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이미 존재하는 구별 없이 통합은 필요치 않으며 가능하지도 않다. 둘째로, 페미니스트들이 제안한 양성성은 수준 3, 행동적 수준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 그들은 이성애가부장적 의미체계가 서술한 것 같이 성격 특성, 행동 습관에 대해서만 말했다. 이 대체용어는 수준 간의 함의조건을 교란하거나 문제삼지 않으며, 확실히 성별이형성이라는 기반을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둔다. 끝으로 ‘체제 안에서' 변화를 장려하는 노력은 페미니스트들이 수준 1에서 시작하고 수준 간의 함의조건을 입증함으로써 수준 3에 침투할 때에만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하지만 이 전략 또한 '여자 같은/남자 같은' 형용사 쌍에 막혔다. 이 단어들의 탈락은 '남성적/여성적' 쌍이 수반하는 경계를 허물려는 시도를 가로막는다.
<레즈비언 분리주의: 분리주의 정치학의 언어학적, 사회적 근거들 Lesbian Separatism: The Linguistic and Social Sources of Separatist Politics>(1978)에서 나는 랜덤하우스 사전(1967) 8 초판에 등재된 womanly, mannish, manly, feminine, masculine의 정의를 나열하였다. 또한 나는 그 정의를 기술하고 어떻게 이 단어들이 나타내고 영속시키는 문화적 가치만으로 단어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는지 분석하였다. (단어는, 해당 언어의 발화자가 더 이상 그 단어가 설명하는 사상이나 대상을에 대해 말하려 하지 않을 때 쓸모없게 된다.) 거듭 말하겠다. 아래의 정의를 읽고, 여성성은 레즈비언들이 ‘개량’해야 할 무언가인지 답을 구해보길 요청한다. 이 사전적 정의들과 문화적 의의에 대한 내 분석이 다른 레즈비언들로 하여금 우리가 바라는 의미대로 단어가 사용되진 않는다(험프티 덤프티처럼)는 걸 깨닫는 데 자극이 되길 바란다. 9 문화의 핵심적인 가치와 태도를 반영하고 새기기 때문에 단어는 존재하고 만들어진다. 단어는 쓸모없어지면 쇠퇴한다. 레즈비언이 이성애 가부장제의 가정을 전달하는 단어를 쓸 때마다, 그는 단어의 수명을 늘리는 셈이다. 예상가능한 대로, 각 단어의 '실제 의미'는 그 반의어의 정의에서 밝혀진다.
여자다운 – 여자 같거나 여자에게 어울리는; 여성적인; 남성적이지 않은/소녀 같은. 여자답다는 것은 여성에게 적절하고 어울리는 면에서 유사함을 암시한다. 예) 여자다운 단정함, 겸손함
남자다운 – 남자에게 바람직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예) 강한, 용감한, 명예로운, 단호한, 박력 있는. 남자답다는 것은 존엄성, 정직함, 솔직함과 같이 남성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가치있거나 바람직한 속성을 소유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비굴함, 불성실함, 부정직함 등등과 반대되는 것. 또한 힘, 용기, 꿋꿋함을 암시한다;
여성적인- 성인 여성이나 소녀에게 따라다니는 것: 여성적인 아름다움, 여성적인 드레스. 여자같은; 연약한; 친절한
남성적인- 남자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남자다운; 박력있는; 강한; 도전적인; 남성적인 목소리. 남자(들)에게 따라다니는 것이거나 남자(들)의 특성: 남성적인 의상
남자 같은- 남자를 따라하는 것에 적용한다: 여성에게 쓰인다. 이 단어는 경멸적이며, 남성적인 특징을 가진 변종임을 암시한다(중요)
남자다운, 남성적인 아래에 나열된 속성들(강한, 용감한, 결단력 있는, 정직한, 위엄있는 등등..)은 개인이 추구할 만한 '좋은' 것들임을 알아챘을 것이다. 남성됨maleness에서 주로 기인하는 여러 부정적인 속성들 중 어느 한 가지도 열거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공격적인, 폭력적인, 속이 좁은, 자기중심적인, 방어적인, 자주 위험에 처하는, 고압적인, 자지에 집착하는, 오지랖 넓은, 약탈적인, 미숙한, 의존적인, 기빨리게 하는, 텃세부리는, 이기적인, 전쟁광 같은 특성들은 어디로 갔나? 도대체 어느 사전에서 남성성의 그러한 속성들이 나열된 걸 찾아볼 수 있단 말인가?
대조적으로, '여자 같은, 여성적인'이란 형용사는 제대로 정의되지 않았다. 부디 읽어 보시길, 당신이 거기서 뭔가를 발견하리란 기대는 하지 말고. 돌고 도는 '여자다운'의 유사 정의와 비교하며 '남자다운'의 정의에 길게 나열된 특징들을 꼼꼼히 살펴보아라. "여자 같거나 여자에게 어울리는" 그건 정의가 아니다. '여자 다운'의 제대로 된 정의는 '남자다운 특성'의 '반대항'으로서 ‘노예 근성, 불성실함, 비밀스러운 등등’임을 암시한다. ‘여성적인’ 아래서 형용사 두 개, 연약한과 친절한을 끄집어냈다. 그거다. 주로 여성과 관련된 긍정적인 속성들, 예를 들면 보살피는, 친절한, 다정한 같은 것들은 생략되었다. 그런형용사들은 사전에 기록되지 않았다. 말할 것도 없이 성별 이형성과 그 가정을 드러내는 형용사는 성격이론처럼 누구든 강하고 친절할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이 두 가지와 다른 특성들은 ‘반의관계’가 아니며, 따라서 상호배타적이지도 않다. 이성애 가부장제의 현실 설명만이 그렇게 보이게 한다.
레즈비언들은 '여성성'을 옹호할 필요가 없고, 온화하고 친절하다 느낄 필요가 없고, 직물에 관심있거나, 여성 혹은 '팸'과 관련있는 어떤 성격을 갖추려 할 필요가 없다. 이성애가부장적 이분법을 지지하지 않고서도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뭐든지 할 수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레즈비언들은 자전거타기, 소프트볼, 자동차 수리, 오토바이 타기, 건축업에 종사하는 것을 즐길 수 있다. 스스로를 '남성적'이라 하거나 '부치'로 칭하지 않고도 남자들에게 적대적일 수 있다. 이상형을 설명하려고 그런 라벨을 받아들이는 건 함정에 빠지는 일이며, 이성애 가부장제의 이데올로기가 레즈비언의 입장에 들어맞는 것처럼 영속시킨다.
'남자 같은'의 정의는 우리에게 결정타를 날린다. "남성적인 특징을 가진 변종" 정직한/강한/당당한/ 솔직한/용감한 여성은 돌연변이인 것처럼 기술했다. 남자들은 자기들을 위해 바람직한 속성을 기록해 두었다. 반면 여성은 연약하고, 온화하고, 불성실하고, 노예 근성이 있고, 비밀스러운 게 어울린다. 정직한,솔직한,당당한, 용감한 혹은 단호한 여성은 '변종'이다. 즉, 남자 같다. 이성애가부장적 의미체계의 논리는 여성으로 태어나 체제의 이분법을 거부하는 여성, 여성적으로 행동하길 거부하는 여성을 의미론적인 기본값에 따라 '남성적'이란 라벨을 붙여 '적절한' 방식으로 기술하게 한다. 분명하게 -남성이 아닌 사람들은 +남성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론적 속임수는 이성애가부장적 의미체계가 행동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나, 그 체제가 하는 일이란 레즈비언의 본래 상태를 희생시켜서라도 이성애 가부장제의 합의된 현실을 지탱하는 것이다. 레즈비언들은 이성애가부장제의 언어를 의미있는 것인 양 그만 사용하는 게 너무 늦었다. 여성성을 옹호하고 다른 레즈비언을 '남성적'이라며 남자랑 비교하는 레즈비언은 죄다 이성애가부장제의 '합의된 현실'을 지지한다.
레즈비언이 존재할 수 있는 방식
의미론적 체계의 목적은 의미를 생성하는 것이다. 의미론적 체계 없이 의미는 존재할 수 없다. 레즈비언은 이성애가부장적 의미체계에서 '무의미한' 존재이므로, 우리는 우리 존재가 중요해지는 의미체계를 구성해야 할 것이다. 미국에서 우리는 규범으로 알고 있는 유일한 의미체계, 이성애가부장적 의미체계에 종속된다. 내가 커밍아웃한 1950년대 게이 커뮤니티에서도 레즈비언들이 '부치'와 '팸'으로 깔끔하게 나눠지지 않는다는 암묵적 인식이 있었다. 우리는 나아왔기 때문에 화해해야만 하고, 극단을 정의하고자 한 결과로 단어 연속체에 이성애가부장적 이분법을 사용해도 여전히 행동의 범위는 인식되고 꼬리표가 붙여진다. 다이어그램 2는 이 행동에 관한 연속체를 나타낸다.
다이어그램 2에서는 1950-60년대에 내가 아는 레즈비언들끼리 쓰는 행동에 관한 라벨을 보여준다. 이 라벨들은 어떻게 우리가 연속체에 대한 인식을 표현하는지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이 용어들 중 상당수가 여전히 오늘날까지 쓰이고 있다. 우리는 우리 존재를 지우는 이성애가부장적 언어에서 의미를 가지게끔 의미체계를 구성했다. 이는 우리를 ‘레즈비언’이라 정의하는 이성애가부장적 의미체계의 생물학적 수준과 기능적 수준 간의 함의관계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이성애가부장적 의미체계가 정의한 대로 성별 행동특성의 타당성이라 받아들였으며 스스로 어딘가에 '맞추고자' 했다. 다이어그램 2는 레즈비언들 사이에서 인식된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일관적이고 뜻이 분명한 의미체계를 구성하고자 하는 하나의 시도를 나타낸다. 우리가 다양한 행동을 인식했고, (전혀 과장하지 않고) 이를 구분하는 경계가 흐릿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성격 설명서인 이성애가부장적 의미체계의 기초적인 이분법에 묶여 있었다. 우리는 부치와 팸이라는 가장 일반적인 단어를 의미있는 것처럼 사용했다. 우리는 사회적 맥락에서 중요해 보이는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그 단어로 자신을 설명했다.
레즈비언 정체성의 위치란?
의도는 좋았는데, 어떻게 레즈비언들은 완전히 상반되는 맥락에서 지속적으로 쓰고 독해할까? 예를 들어, 왜 사브리나 소저너(Sabrina Sojourner)가 여성성을 '개량'하는(Sojourner, 2월, 1991) 동안 왜 잰 브라운(Jan Brown)은 부치였을 때 경험한 여성혐오를 폭로했나?(Out/Look 7:30-34) 이때까지 나는 정치적 의식화와 오픈리 레즈~벽장 14의 연속체라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를 아직 언급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레즈비언들이 페미니스트냐 아니냐에 따라 이성애 가부장제, 더 정확히는 우리의 가치체계에 통합시킨 페미니즘 브랜드와 충돌하는 상상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상상을 '정치적 의식화'라 부른다. 15
일부(대다수라고 하고 싶다만) 레즈비언들은 이성애 가부장제에 순응하여 살고 있으며 이 사회를 그렇게 명명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그들 자신이 이성애자와 별로 다르지 않으며, 자기들의 불편함을 설명하기 위해 그저 가장 기초적인 분석을 할 뿐이다. 다른 레즈비언들은 스스로를 이성애 가부장제 경계 바깥에 있는 존재, 이성애자들과는 꽤 다른 존재로 생각하고 이성애가부장적 사회를 흉내내거나 비추는 어떤 사고나 행동양상도 대단히 불신한다. 레즈비언들은 '합의된 현실'을 공유하지 않는다. 그 말인즉슨, 아직까지 우리가 결정하고 조건을 평가하는 체계에 대해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성애가부장제 하에서 레즈비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스스로 만들어낸 설명이 없으며, 그 결과로 특정한 행동유형에 대해 다양한 가치판단이 존재한다. 레즈비언으로서 자신이 이성애 가부장제 사회에 대해 생각하는 면에 따라 이성애가부장적 서술에 대한 자발적인 도전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많은 이들이 시도했으나, 어떤 레즈비언도 이성애 가부장제를 무시하거나 없는 취급을 할 수 없다. 우리 중 누구도 우리의 삶이나 우리의 사고방식에 미치는 체제의 영향력을 부정할 수 없다. 이성애 가부장제를 부정하거나 어찌됐든 우리가 이를 비껴나간 사고를 했다고 주장하는 건 레즈비언인 우리에게 이성애 가부장제가 입힌 피해를 사소한 것처럼 만든다. 이러한 자아개념들은 서로 충돌하며, 조화될 수 없다. 타협하고 싶어도, 이런 의견 차이에 타협할 수 있는 '중간 지대'는 없다.
논의를 위해 이성애가부장제 사회를 원이라고 생각해 보자. 계발과 인식의 여러 단계에서, 이성애가부장제에 대해 레즈비언인 그의 위치는 레즈비언의 삶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를 기반으로 정해진다. 다이어그램 3은 이성애 가부장제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레즈비언이 취할 수 있는 6가지 입장을 나타낸다. 보수주의자, 전통주의자, 휴머니스트, 페미니스트, 래디컬 페미니스트, 그리고 분리주의자. 이 연속체에 찍힌 각각의 점들은 개략적으로 나타낼 뿐 완전히 구분된 정치적 입장은 아니다. (독자들이 이해하기 좋게 이 전문용어들을 사용했다.)
레즈비언 중심적 의미체계를 향하여
이성애 가부장제 바깥이나 경계에 살고자 하는 레즈비언들에게 있어, 그들에 대한 우리 태도나 그런 행동에 결부시킨 가치들은 상당히 변해왔지만, 레즈비언 내에서 볼 수 있는 행동의 다양성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어떻게 불일치를 넘어 의사소통해야 할까? 나는 레즈비언이 취할 수 있는 네 가지 선택지를 찾아냈다. (높은 확률로 더 있을 것이다.)
1. 우리는 어떤 레즈비언들이 그러하듯 이성애 가부장제가 정해놓은 남성적/여성적 이분법에 따른 가치를 받아들일 수 있고, 우리 삶에 지속적으로 그 단어들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2. 우리는 여성성을 '긍정적인' 것으로 '개선'할 수 있다는 레즈비언들처럼 이성애 가부장제가 만들어 놓은 가치를 역전시킬 수 있다.
3. 우리는 지금처럼 아무 목적 없이 지낼 수 있다. 때로는 '남성적인' 행동에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때로는 여성적인 행동에, 때로는 동의하면서.
4. 우리는 이성애가부장적 의미체계 전체를 거부할 수 있다. 이성애가부장적 의미체계의 경계와 언어 바깥으로 멀리 나가서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의 의미체계를 구성할 수 있다.
린다 스트레가가 제안했듯이, 자신을 여성적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거부한/하는 레즈비언들을 가치있게 여김으로써 우리는 뜻 깊은 출발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이성애 가부장제의 현실로부터 이탈한 것에 자긍심을 가지고, 이성애 가부장제의 설명과 가치에 순응하는 레즈비언 여성성을 긍정하지 않으며, 여성적이지 않은 레즈비언들을 긍정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다양한 수준의 이성애가부장적 훈육을 거부한다.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으며 정도를 달리할 뿐이다. 이성애 가부장제는 각색된 현실에 순응하는 사람들에게 보상한다. 이제 이성애 가부장제에 순응하는 사람들에게 특혜를 주지 말고, 저항하는 레즈비언 자매들에게 보상하자.
스트레가는 이성애가부장제 프로그래밍에 대한 우리의 저항을 레즈비언들이 반드시 긍정해야 하며, 체제에 순응하는 레즈비언들에게 그만 보상해야 한다고 단언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반드시 이성애 가부장제의 현실 밖에서 결단하여 우리 입장을 고수해야 하며, 우리를 흡수하고 인식의 급진적인 힘을 희석시키려는 시도에 저항해야 한다. 이성애자로 '패싱하는' 레즈비언들이 그런 시도를 하는데, 레즈비언임을 드러낸 채 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의 선택은 레즈비언 정체성보다 이성애 가부장제의 승인에 가치를 둔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이는 이성애자로 패싱되지 않거나, 패싱하지 않는 레즈비언들을 피하고 소외시키는 것으로 귀결된다. 17그리고 나는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매체에서 여성스러운 레즈비언들을 올려치도록 강력히 권하는 행태에 질렸다. 많은 레즈비언들이 이성애 가부장제에서 생존을 위해 패싱하려는 걸 인식했지만, 그런 사실을 인지했다는 것이 누구든지 기만을 긍정해야 한다거나, 그들에게 우리 공동체에서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문제의 요지는 패싱하는 레즈비언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더 잘 살아남기 위해 그런다는 점이다.
이성애자로 패싱할 수 있는 레즈비언들은 여성 동성애를 숨길 수 있기 때문에 특정한 사회적 특권을 획득한다는 걸 반드시 이해하고 인정해야 한다. 돈과 사회적 승인 외에 여성성의 특권과 보상은 거짓된 가치와 가짜 자존감이다. 이는 위선과 겉치레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성성에 가치를 두는 레즈비언들은 ‘티나는’ 레즈비언들보다 우월하다거나 차이를 성애화한다고 여긴다. 레즈비언의 입장에서, 여성성=이성애=벽장=특권=레즈비언혐오 이다. 만약 이성애자로 패싱하는 레즈비언들이 다이크한테 원하는 대로 그들의 선택을 눈감아주길 기대한다면, 이들은 상호존중이란 쌍방향임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여성스럽지 않은 레즈비언들을 ‘남자 같다’고 부정적인 투로 이야기하거나, ‘남자같이 행동한다’고 우리를 비난하는 건 무례하고, 체면을 손상시키며, 모욕적이다. 다이크들은 이성애자들이 으레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걸 들어 왔다. 우리는 다른 레즈비언들한테서 그런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 이는 우리 존재를 깎아내리고, 우리와 연을 끊는 일이다. 사실 우리는 레즈비언으로 패싱되는 두려움과 불신을 이해하지만, 그런 감정들은 우리를 이해하는 데 거의 혹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레즈비언의 여성성은 실재하는 이성애 특권을 누릴 수 있게 한다. 그런 사람들은 더 좋은 직장을 얻고, 사회적 명성과 돈이 따라온다. 다이크들은 여성성에 대해 전부 알고 있다. 여성성이 무엇이고, 어떤 걸 의미하며, 그게 뭘 제공하는지 알고 있다. 남자들이 여성의 여성성에 높은 가치를 매기기 때문에, 여성성은 레즈비언의 입장에서 여성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
- 내가 여기서 사용하는 어떤 표현도 여성해방운동 수십 년 전의 팸 레즈비언을 회고적으로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지 말라. [본문으로]
- 예를 들어, 레즈비언들 사이의 가장 중대한 그리고 가장 무시하고 싶은 차이 중 하나는, 계속 레즈비언으로 살아온 사람들과 삶에서 장기간 이성애자로 살고 행동했던 사람들 간의 차이점이다. 욕망에 따라 행동하고 살기를 선택하느냐, 남자와 살고/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선택하느냐의 한 가지 차이로 우리느 레즈비언으로서 어떻게 행동하고 스스로를 이해할지에 대해 완전히 분기하게 되었다. 한 가지 말하면, 그 선택은 빈번하게 계급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뼈레즈, 평생 레즈비언인 사람들은 고소득 직장에 갈 수 없기 때문에 상류층으로 올라갈 수 없고, 가난한 상태로 노동자 계급에 머무른다. [본문으로]
- 이 간단한 요약본으론 <불티나게 팔리는 것>의 린다 스트레가의 분석을 제대로 다룰 수 없고, 스트레가에 대한 파울라 마리에도우터와 메리 크레인의 답변도 마찬가지다. 나는 독자 여러분이 세 작품이 실린 <레즈비언 윤리학> 호를 찾아보기를 권하는 바이다. 특히 스트레가는 그가 잊어버리고 있는 이성애가부장적 태도의 구체적인 예시들을 잊어버리려는 이유에 대한 분석과 함께 제시한다. [본문으로]
- 예를 들어, 여성스럽지 않은 맥신 펠드맨(Maxine Feldman)을 생각해 보자. 그는 이성애자로 패싱하려 한 적이 없고, 이성애가부장적인 언어로 ‘예쁘지’ 않으며, 올리비아 레코드의 ‘대중 음악가들’과 대조적이며, 완고하게 음악산업의 ‘주류’로 진입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이성애자로 패싱하려고 하고, 이성애자로 보이려고 한다. 실제로, 그들 중 대부분은 무대에서 L워드를 쓰지 않으려 한다. 관중의 대다수가 레즈비언인 행사에서조차도 말이다. 그런 음악가들은 레즈비언으로 앞에서 커밍아웃한 우리를 배신할뿐만 아니라, 세상을 비웃는 방식의 레즈비언 음악에 대한 갈망을 이용한다. 이들은 '더 많은' 관중들(즉, 이성애자들)에게 어필함으로써 획득하려는 경제적 이득의 수단으로 우리의 돈과 충성을 이용한다. 잔인한 모순은, 홀리 니어(Holly Near)를 제외하면(만약 여전히 그가 스스로를 '레즈비언'으로 부를 만하다고 본다면) 이들 중 주류로 진입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본문으로]
- (역주)인도·네팔·스리랑카·방글라데시·파키스탄 등지에서 성인 여성들이 입는 전통의상. [본문으로]
- (역주) 하와이 여성의 민속의상. [본문으로]
- (역주) 즉, 물화시키는 [본문으로]
- 사전은 1987년에 2판이 나왔다. 그러나 이 단어들의 정의는 사실상 그대로 유지되었다. [본문으로]
- 예를 들어, <레즈비언 연결성Lesbian Connection>의 1985년 9/10월호를 보아라. 거기에는 남자랑 자면서 '레즈비언'이라고 하는 한 레즈비언 커플이 나온다! 그중 한 명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레즈비언이 무엇인가에 대한 내 정의를 확장시켰다" 당연히 그가 '확장시킨다'라고 한 건 단어가 좁은 의미로 쓰이는 걸 반대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서술을 긍정하게끔 하기 위함이다. (사람의 허리라인이나 엉덩이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지 않는 한) 좁은 의미는 이성애가부장적 의미체계에서 부정적인 함의를 갖는다. 이런 식의 '확장'은 유해하고, 위선적이고, 이기적이며, 그야말로 불가능하다. 섹스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레즈비언은 여자랑 섹스하지 남자랑 하지 않는다. 이성애자나 양성애자 여성들이 남자랑 섹스한다. 그게 단어의 의미다. 나는 이성애를 삶의 방식으로서 '개량'할 마음이 전혀 없고, 스스로를 레즈비언으로 칭하지 않는 여성들을 개심시킬 생각도 없다. 나는 '레즈비언'이란 단어에 개인적으로 집중하고 단어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레즈비언이란 용어를 훔치거나 흐리게 하지 않을 것이다. 확장을 위한 다른 용어는 더 이상 없다. [본문으로]
- [역주] 1950-60년대 미국의 레즈비언 문화에서 사용되던 용어들이 어떤 의미인지 독자들이 쉽게 이해하게끔 만든 비교짤.다이크보다 더 남성적이라 여겨지는 불다이크도 한국에서는 '강부치'로 통용되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 <일반적인 삶/레즈비언의 삶Common Lives/Lesbian Lives>9호(가을, 1983), 39-45에 실린 메릴 머쉬룸(Merril Mushroom)의 주목할 만한 예외 [본문으로]
- 그의 논문, "부치-팸 관계들: 1950년대의 성적인 도전Butch-Fem Relationships:Sexual Courage in the 1950's", <이단들: #12 섹스 이슈Heresies: The Sex Issue 12>, 3:21-24 [본문으로]
- 동성애자에게 이성애자를 경멸조로 칭할 때 사용하는 말로 heterosexual(이성애자)의 준말. 한국에서는 정확히 대응되는 말이 없고, 특히 이성애자 여성을 지칭할 경우 레즈들끼리 '헤녀'라는 말을 쓴다. [본문으로]
- (역주) 벽장 레즈비언의 반대 개념.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숨기지 않는 레즈비언. [본문으로]
- (역주) 오픈리 레즈비언의 반대 개념. 주로 인간관계의 단절을 비롯한 사회적 불이익을 받을 것을 우려해 아직 커밍아웃하지 않은 레즈비언을 의미한다. 이들은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이성애자로 패싱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본문으로]
- (역주)레즈비언 은어. 레즈비언으로 정체화하기 이전에 한 번도 남자와 연애/섹스/결혼 따위의 관계를 맺지 않은 레즈비언. [본문으로]
- (역주) 레즈비언 커뮤니티 내에서 소위 ‘일스’가 ‘티부’를 피하는 분위기를 떠올려 보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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