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 글에서, 퀴어 페미니스트들이 '젠더 폐지론'을 비판하는 네 가지 주요 주장에 대해 급진주의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답하고자 합니다. 그 네 가지 주장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1. 젠더 폐지론에 의해 젠더를 해체하면, 남는 것은 섹스인데 기존의 분류는 지극히 성기 중심적이다. 이는 불완전하다. 

2. 젠더가 해체된 이후 남는 것은 섹스이며, 이는 젠더 이분법을 강화시키는 방향이다.

3. 젠더를 폐기하는 것은 트랜스/젠더퀴어의 경험을 비가시화하는 폭력이다.

4. 시스젠더는 트랜스젠더보다 강자이며,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다.


1. 젠더 분류는 완전한가? 

  기존 분류의 불완전성에 대해서는 동감합니다. 성기중심적인 분류는 간성(intersex)을 배제하며, 생물학 역시 100%완벽한 기준이 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Y염색체의 유무에 의한 분류는 서양에서는 1950년대까지 유효했습니다. 현재는 Y염색체 위에 존재하는 성결정유전자인 SRY유전자가 발현되느냐/아니냐에 따라서 성기 모양이 결정된다는 것까지 대중들에게 알려졌는데, 그 외에 다른 성결정유전자가 발견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그렇다면, 현 시점 젠더분류체계는 완벽합니까? 아니요, 저는 젠더분류야말로 훨씬 구멍이 많다고 봅니다. 이는 바로 젠더가 '정신적 성별'이라는 특성에서 비롯됩니다. 


젠더분류체계는 나의 경험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습니다. 현재도 워낙 비슷해서 혼동되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젠더 플루이드와 젠더 플럭스, 에이젠더와 젠더리스, 젠더퀴어와 논바이너리 등은 자주 혼용됩니다. 또한 혼용만으로도 부족하여 사람들은 여러 개의 이름을 동시에 사용하기도 하지요. 예를 들어, 제 경우에는 분류에 따르면 논바이너리이며 젠더퀴어란 말도 혼용해서 쓸 수도 있고, 하위분류의 젠더리스와 성별 비순응자란 개념도 같이 사용해야 그나마 좀 커버가 되는 거 같더라고요.(웃음)


하지만 이조차 부족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참고로 기준은 제각기 다릅니다만, 현재 NYC에서는 31개의 젠더를 인정했고(https://www.google.co.kr/amp/s/heatst.com/culture-wars/here-are-the-31-gender-identities-new-york-city-recognizes/amp/) 영국 페이스북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젠더옵션은 71+개라고 하는군요(http://www.telegraph.co.uk/technology/facebook/10930654/Facebooks-71-gender-options-come-to-UK-users.html) 개개인이 경험하는 성별적인 특성이란 정말 각양각색이기 때문에, 젠더는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이름이 생길 때마다 불편함을 감수하고 줄줄이 외워야 하는 것일까요? n개의 이름표는 결국 혼란을 가중시키고, 이름표를 쓰지 않는 사람들을 배제합니다. 


또한, 타인의 젠더를 멋대로 잘못 넘겨짚는 것은(=미스젠더링) 대단한 폭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젠더 정체성이란 개인의 자아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내가 바라보는 나와 타인이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내가 다르듯 젠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타인이 판단해 주는 것이 맞을 때도 있고, 혹은 틀릴 수도 있죠. 간혹 트랜스젠더로 정체화했다가 피크 트랜스*(어떤 사람이 트랜스 커뮤니티에서의 모든 것이 옳지 않다 여기고, 트랜스정치학의 지지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게 되는 순간)를 겪어 다시 자신을 지정성별로 정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자아에 대해 총체적으로 완벽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까?


2. 성별 이분법 고착화에 관해

아니요, 현재의 분류체계 역시 젠더 이분법을 강화시킨다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젠더 분류에는 대체로 바이너리 모델에 기반을 둔 이름들이 많습니다. mtf/ftm이라는 정체성은 이분법을 근간으로 하는 이름이며, 중성이라는 이름 역시 여성/남성의 이분법에 기반을 둔 표현입니다. 논-바이너리라는 이름 역시 바이너리 모델이 존재함을 전제로 하고 사용되는 이름이지요. 


그리고 젠더 이분법을 깨는 것은 젠더를 세밀하게 나누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분법을 깨기 위해 우리는 필연적으로 기존의 젠더규범을 해체해야 합니다. 저를 포함하여 기존의 젠더규범에 들어맞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여성/남성의 이분법에 당연히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설명할 수 없는 용어니까요.

그렇기에 이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탐색하게 되는데, 이 사람들이 자신을 여성 또는 남성이라 부르지 말라면서 기존의 여성/남성 분류에 포함되길 거부한다면 과연 성역할 규범은 어떻게 깰 수 있을까요?


좀더 쉽게 이야기해 볼게요. 지정성별 여성인 A는 화장을 하지 않고, 원피스나 치마보다는 바지를 입길 좋아하며 짧은 머리를 고수합니다. 이 때 A가 자신을 논바이너리 정체성 중 하나로 소개한다면 A는 논바이너리로서 젠더표현을 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리고 A는 자신을 "내가 여자고, 이것이 여자다운 것이다"라고 소개할 수도 있다. 이 때 A는 여성에게 요구되는 젠더규범을 거부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 중 성역할 규범을 깰 수 있는 쪽은 후자입니다. 자신을 여성으로 정의하지 않고 젠더퀴어나 논바이너리 정체성을 사용하게 되면 결국 시스젠더인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성역할을 그대로 수용하고 이들에게 여성성/남성성을 고착화시킵니다. 


그렇다면 시스젠더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기존의 성역할을 그대로 재생산하는 사람들인가요? 젠더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사람들인가요? 아니요. 가부장제 시스템 하에서 지정성별 분류와 젠더규범의 폭력성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개중에는 안드로진이나 젠더플루이드/젠더 플럭스, 젠더리스 등 논바이너리에 해당하는 경험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류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거나, 지식을 접할 기회가 없어서 사용하지 않을 수도 있죠. 


그러면 자신의 젠더 정체성을 커밍아웃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질문할 수도 있겠네요. 글쎄, 정체성을 드러낼지 아니면 젠더 분류를 거부하고 살지는 개개인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다시금 말하건대, 가부장제 시스템 하에서 지정성별 분류와 젠더규범의 폭력성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또한 여성성/남성성의 이분법이란 가부장제의 유지를 위해 만들어진 개념입니다. 남자들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남성성'을 우위에, 그 반대의 특성을 여성성으로 이름붙였어요.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여성복으로 규정되는 옷(치마, 하이힐, 원피스, 스타킹,코르셋 등)은 실용성보다는 활동하기 불편한 옷이지요. 그리고 양육, 가사 등의 돌봄 노동은 여성의 일로 치부되면서 비하되었어요. 그 외에도 수동적일 것, ^예쁜 말^을 쓸 것, 도전하기보다 안정을 추구할 것, 등등 여성성이란 피지배 계급의 행동양식으로서 여성들을 억압해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성/남성성의 이분법을 유지해서는 안 됩니다. 이 젠더 규범은 깨져야만 하고, 이는 앞서 말했듯이 자신의 퀴어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정성별을 드러내고, 그 성역할에 맞지 않는 모습을 의도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가능합니다.


3. 젠더폐지론은 그들의 존재를 지우는가?

오해하고 있습니다. 이름을 없애버리자는 것은 당신의 경험을 삭제하고 입을 틀어막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나의 젠더가 무엇인지 이름표를 붙이지 않고서도 경험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앞서 저는 1에서 젠더분류의 불완전성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같이 젠더리스란 이름표를 쓰고 있다고 해도 당신이 느낀 경험과 나의 경험은, 억압의 정도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퀴어 공동체에서, 그리고 커밍아웃할 때 왜 각자 정체화하게 된 계기,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할까요. 사실은 그 이름만으로는 내가 누군지 설명하기에 부족하기 때문이 아닌가요? 


또한, 젠더 해체가 트랜스/젠더퀴어의 경험을 비가시화한다는 논리 그대로, 나는 여성의 경험을 지운다고 되돌려 줄 수 있습니다. 2에서 말했듯이 나라는 개인을 여성이 아닌 다른 젠더로 라벨링하는 것은 지정성별 여성으로서 당한 경험을 퀴어로서 겪은 경험으로 전환시킵니다. 그러나, 현재 지정성별을 기반으로 한 젠더 이분법이 하나의 장벽처럼 튼튼하므로, 이걸 퀴어로서 겪은 경험으로 전환시키는 것은 여성으로서 겪은 경험을 지워버리는 일이 됩니다.


예를 들어, 여성혐오범죄가 버젓이 존재하는데 내가 '여성으로 패싱되었기 때문에' 당한 성폭행을 젠더퀴어이기 때문에 겪은 경험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겉보기에 흑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나는 나를 백인이라고 생각해요! 쏘지 마세요!" 라고 말하면, 그 사람이 백인에게 총 맞아 죽었을 때 인종차별범죄가 아니게 될까요? 성감별 임신중절로 수많은 여자아이들이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젠더'로 죽지 않았습니다. 여성 할례의 경우 역시 '젠더' 로 인한 차별이 아닙니다. 


우리 개개인이 느끼는 성별 정체성, 경험들은 젠더라는 이름표 '이전에' 실존합니다. 본질은 우리의 경험이지, 이름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개개인이 가부장제라는 거대한 시스템 하에서 어떤 방식의 폭력을 경험했는지 말할 수 있는 분위기이며, 서로의 경험에 공감하는 가운데 이분법과 젠더 규범을 해체하는 것입니다.


4. 시스젠더란 말에 관해

  저는 시스젠더란 표현 자체를 거부합니다. '시스'라는 말은 정확히 정신적 성별과 신체적 성별이 같은 경우를 의미합니다. 실질적으로 '시스젠더'라는 말은 자신을 트랜스젠더 혹은 젠더퀴어로 정체화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붙여집니다. 그렇다면 정신적 성별이란 무엇인가요? 왜 스스로를 여성으로 느낍니까? 


자신이 원해서 여성으로 태어난 사람이 있습니까? 없겠지요. 차별이 존재하는 줄 알았더라면 아무도 여성으로 태어나고 싶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원하는 바는 여성 취급이 아니라, '인간' 취급입니다. 그런데 이 시스젠더라는 표현은 우리가 스스로를 여성으로 느낀다고 말합니다. 대체 그 여성은 누구입니까? 주민등록번호 2로 시작하는 사람들이고, 취업과 승진에서 차별을 받고요, 여성이기 때문에 화장실 몰카를 두려워하고, 여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핑크색을 좋아하고 리본과 레이스를 좋아하고 꾸미는 걸 당연시하게끔 요구되는 사회의 2등 시민입니다.


누가 2등 시민을 하고 싶습니까? 1등 시민이 되기를 원하지요. 그러나 사회에서 나를 그렇게 취급하기 때문에, 그 억압이 존재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여성'이라고 인식합니다. 내가 여성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당하는 각종 차별, 강요되는 여성성은 앞서 말했듯이 다른 젠더로 나를 표현한다고 해서 지워지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시스젠더란 표현은 너무 간단히 이런 맥락을 지워버립니다. 그 사람들은 과연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에 불만이 없을까요? 아니란 겁니다. 제가 하는 말이 여전히 '시스젠더니까' 하는 소리로 들린다면, 첨부된 사진을 보세요.  mtf인 케이트 본스타인이 쓴 <젠더 무법자>에서 저자는 분명히 "모두가 자신의 성별 지위에 불만을 가지며, 그 원인은 성역할, 지정성별, 성별 정체성일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요, 나는 성기를 기준으로 여성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주민등록번호가 2로 시작하고 여성으로 보이기 때문에 여성혐오범죄에 노출되고 차별을 당합니다. 나는 그래서 이 여성이란 이름을 혐오합니다. 그 이름은 차별, 억압, 2등 시민, 인형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름 또한 나에게 강요된 '여자는 어쩌고저쩌고~' 와 같은 성 역할을 혐오합니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를 트랜스젠더/젠더퀴어라 부르지 않습니다. 이유는 위에서 충분히 설명했으니 생략. 


여성성/남성성 규범, 고착화된 성역할은 모두를 억압해요. 그러나, 그 억압에 대해서 급진주의자들은 성역할을 타파하고 젠더 분류 자체가 문제라고 보는 입장이며, 트랜스/젠더퀴어들은 새로운 젠더의 명칭을 쓰고 의료서비스를 구입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 뿐입니다. 결국 트랜스/젠더퀴어들과 급진주의페미는 동일한 문제제기로부터 출발한 엇갈린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저는 스스로를 '시스젠더'라 부르지 않을 것이며, 또한 시스젠더 여성이 강자, 트랜스/젠더퀴어는 약자라는 프레임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원문은 2017년 4월 11일에 페이스북에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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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혜리(Hyeri 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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