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 3물결 페미니즘이 대세이다. 물론 엠마 왓슨 등 유명인사들이 미디어를 통해 홍보하고, 출판시장에 3물결의 관점을 반영하는 책들이 넘쳐나는 등 광고와 미디어의 탓도 있고, 아마 최신의 담론인 탓에 이를 빠르게 따라잡고자 하는 경향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왜 하필 대중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수용된 것이 3물결 페미니즘인지를 서구와는 다른 한국의 특수성으로 설명하고, 이런 과 비평하려고 한다. 그 특수성이란 전체주의에 대한 반동과, 식민지 남성성이 곧 3물결을 대세로 만든 원인이다. 참고로 후자의 경우는 특별히 자유주의 진영의 남성 페미니스트들에 초점을 맞춰 써보도록 하겠다.


개인주의의 확산



  집단의 규모를 막론하고 우리 사회에는 전체주의적인 분위기가 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사회성, 외향적 성격'을 강요당했다. 내향적인 성격은 사회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사회성이 부족하고, 눈치가 부족하단 말은 정상적이지 않음을 의미한다. 직장인 중 1/3이 왕따 경험이 있을 정도로 왕따가 빈번함에도 불구하고, 왕따가 왜 생기는지에 대한 합리적인 의문 없이 "그럴 만하니까 당하겠지" 라면서 서슴없이 2차가해하는 분위기가 있다. 


 의사결정 방식으로는 다수결 외의 의사결정방식을 거의 접해보지 못한 채 집단 내에서 소수인 개인의 목소리가 지워지는 경험을 한다. 이와 같은 분위기는 공동체를 위해 개인의 자율성을 박탈하고, 다른 의견을 수용하지 않는다. 문제제기를 하면 "프로불편러", "예민하다"라고 낙인을 찍는다. "다른 사람들은 상관없다는데 왜 너만 그래?"라면서 입막음을 한다.

  

  수평적인 조직문화보단 위계가 분명한 수직적 조직문화, 군대문화를 모방한 형태가 곳곳에서 드러나며, 또한 내부고발자를 입막음하고 2차가해하는 분위기가 존재한다. "집단의 명예"는 개인의 양심적 선언보다 우선시된다.

  

  이런 분위기를 대체로 수용했던 모부 세대와는 달리, 현재의 10대,20대의 경우에는 폭력적인 전체주의 문화에 대한 반동으로 개인주의가 널리 확산되었다. 또한 개인의 자율권이 강조되면서 취향 존중과 표현의 자유란 말은 정말 많이 사용되고 있다. 즉, 기존의 공동체주의 가면을 쓴 전체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개인의 자유를 확대하려는 분위기가 확산되었고, 이런 사회적 요구는 3물결 페미니즘의 관점과도 겹친다. 


  "개인의 자유를 확대한다는 것". 이 말은 억압되어 있던 여성들에게는 일종의 해방구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너는 화장을 안 해도 되고, 너의 섹스 요구를 거절해도 되고, 여성스럽지 않아도 되고, 다자연애든 연애를 안 하든 자유롭게 사랑하고, BDSM 등의 성적 실천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개인이 자율적으로 욕망을 표현할 권리만을 주장할 뿐, 욕망이 어떠한 사회적 맥락을 가지는지에 대해선 크게 관심이 없다. 여성들에게 "너에겐 더 많은 선택지가 있어"라고 말하며, 그 선택지에 대해선 책임을 묻지 않는다. 


  또한 페미니즘 분야의 베스트셀러이자 입문서로 추천받는 <나쁜 페미니스트>에서 저자는 "페미니스트는 완벽할 필요가 없어.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말한다. 물론 핑크색을 좋아하고, 화장을 좋아할 수도 있다. 수동적인 성격일 수도 있고, 성애화된 아이템을 못 잃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은 개개인이 자신의 성격이나 취향을 구조적인 차원에서 반성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러니까 이게 코르셋이라도 아무도 내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검열하지 않잖아? 뭐가 문제야?" 라고. 


  분명히 이런 자유주의 페미니즘에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한국에서 자유주의적인 노선은 급진주의 계열과 동일하게 "문제제기할 권리"를 이야기했으며, "프로불편러"에 "프로둔감러"라고 맞받아치도록 권장하며 여성의 목소리낼 권리를 응원했다. 또한 우리는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몸의 자기결정권을 이야기하며 "내키는 대로 섹스를 할/거절할 권리"와 "임신중단권"논의를 함께했다. 


  그러나 이런 자율성 추구는 개개인의 자율적인(제재 없는) 페미니즘 실천의 형태로(소위 말하는 100가지의 페미니즘) 이어졌고, 무엇이 페미니즘적이다/아니다란 논의를 검열로 취급하며 막았다. 이는 현재진행형인 로리타 논쟁과 젠더 논쟁의 양상만 관찰해도  확인할 수 있다.


  로리타 논쟁에서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의 욕망(즉, 로리타 스타일링)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표출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논의할 때 욕망을 검열한다며 급진주의 계열의 페미니스트들에게 "성적 보수주의자"라는 낙인을 찍고 "역코르셋"이라 반격했고,  로타, 아이유, 설리의 파급력은 인정하나 개인의 소비가 가져올 수 있는 영향력에 대해 간과, 축소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이와 같은 내로남불은 결국 개인의 "자율적 선택권"만을 최우선시하는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젠더 논쟁 역시 동일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우리는 성기를 중심으로 지정성별이 부과되었고, 그 지정성별로 인한 차별은 (그 양상에는 차이가 있으나)문화와 역사를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유지, 재생산되어 왔다. 또한 여성/남성이라는 이원화된 분류에는 여성성/남성성이 부과되었으며, 이 여성성/남성성이란 신체적으로는 자신의 1,2차성징과 연결되고 정신적으로는 성역할, 성별 고정관념과 연결된다. 


  사실 트랜스/젠더퀴어들이 고통받는 것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지정성별에 부여된 여성성/남성성이란 의미 때문이다. 그러나 젠더 폐지론자들이 "성역할을 재생산하니까 지정성별로부터 여성성/남성성이란 구분을 소거하자!"라고 말한다면, 트랜스/젠더퀴어들은 "지정성별이 여성성/남성성이라는 굴레를 씌우고 이게 나를 설명하지 못하니까 아예 새로운 성별로 나를 정의하자! "라는 차이점이 있다. 따라서, 후자를 지지하는 것은 결국 "개인이 성별을 자유롭게 정의하고 선택할 권리"를 지지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는 결국 로리타 지지자들과 마찬가지로 구조적 맥락이 결여된 채 여성성/남성성과 지정성별의 연결고리를 그대로 남겨두는 일이다.


  자율성 추구라는 말은 좋다. 그러나 개개인의 무제한적인 자유만을 요구하며, 이에 반대하는 일을 무조건 검열로서 낙인찍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욕망을 왜 법이 가로막는가? 살인이 사회적으로 용인된다면 어떤 영향을 미칠지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소아성도착증은 왜 금기시되는가? 성인-아동 간에는 명백히 권력차가 존재하며, 아동이 애정표현과 성희롱, 성폭력을 구분하기 어렵고, 사랑이 어떤 형태인지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았으며, 아동성범죄의 처벌 수위가 약하다는 것이 현실이다. 이를 도외시한 채 "소아성애"가 사회적으로 용인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 개개인은 욕망한다.  그러나 욕망이 어떤 방식으로 표출되어야 하는지, 나의 욕망이 용인될 때 사회적으로 어떠한 영향력을 미칠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며 어느 순간에서는 스스로를 규제해야만 한다. 검열이 불편하게 느껴지는가? 사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이미 우리는 욕망과 도덕적,윤리적 규범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자아에 의해 현실적이며 대개 책임질 수 있는 방식으로 욕망을 표현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책임질 수 없는 자유는 방종이며, 자신을 독립된 개인으로만 바라보는 일은 구조를 무시하는 것이다.


자신을 피해자화하는 남성들


  한국 남자의 남성성은 "식민지 남성성"이다. 역사적으로 한반도는 늘 외국의 침략과 간섭에 왔고, 남성들은 자신의 영토와 자원을 빼앗기고 외국의 지배를 받아 자신의 남성성이 불완전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한남들에게 이 불완전한 남성성은 "마땅히 보완해야 할 것"이 되었고, 이 때 보완해주는 주체는 자국민 여성이다. 즉, 한남에게 한국 여성들은 끊임없이 '기를 세워주고, 가치를 확인받아야 하는 대상'이며, (이성애자의 경우) 성적 욕망을 충족시켜줘야 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남들에게 모자란 남성성을 채워주지 않는 여성들은 '특권층'이며, 자신의 남성성을 위협하는 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벌좋고 능력있는 여성,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여성, 비혼 여성, 그 외 성역할을 거부하는 여성..등등은 후려치기의 대상이 된다. 


  또한 한남들은 남성성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자신을 피해자화하는 경향이 있다. 다들 잘 알겠지만, 이런 경향은 "역차별"과 "군대와 생수통 타령"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더구나 이들은 대체로 집에서 오냐오냐 보호받으며 자랐기 때문에 자기중심적인 성향도 강하게 나타난다. 상당수의 한남이 역차별과 군대 타령에서 그치지 않고 여성들이 당하는 차별에 대해서는 그 정도를 축소하거나, 묵인하고 더 나아가 차별을 정당화하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이런 식민지 남성성과 3물결이 대세가 된 것에는 어떤 연결고리가 있을까? 바로 3물결의 주요 키워드인 "맨 박스"와 "교차성 담론"에서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다. 


  우선 맨 박스가 어떻게 그들의 식민지 남성성과 연결될 수 있는지 살펴보자. 맨 박스란 쉽게 말해 가부장제 하에서  '남성도'피해자가 된다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지금 각광받고 있는데, 실제로,  <맨 박스>라는 이름으로 한 권의 책이 나왔고, 벨 훅스의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역시 맨 박스를 소개하고 있다.  남성 페미니스트들이 남성들을 설득할 때 백이면 백 써먹는 개념이 바로 '맨 박스'이다. 


  확실히, 그동안 가부장제라는 틀 아래 여성만 차별의 대상이 된 것은 아니며 분명히 맨 박스는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 있다. 맨 박스를 만들어낸 건 남성이다. 호모소셜 사회에서 '남성성'을 갖지 못했다고 여겨지는 남성들(ex: 게이 남성)은 여성성/남성성이라는 이분법 하에 '여성적인' 존재로 간주되었다. 기존 남성 사회에서  '여성적인' 남성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여성 억압의 구조를 유지하는 데 방해가 되었으므로 그들은 차별의 대상이 되었고, 이는 곧 지정성별 남성들에게 남자다움을 요구하는 맨 박스로 굳어졌다. 다시 말해, 맨 박스라 함은 여성이란 노예를 지속적으로 착취하기 위해 주인 노릇을 하던 남성 집단이 치르는 기회비용이다. 즉, 맨 박스도 결국 여성혐오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더구나 이 맨 박스라는 개념을 실제로 뜯어보면 "오빠가 허락하는 페미니즘"일 뿐이고,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지 않는 한남들조차 이를 열심히 이용해먹는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남성은 젠더 권력의 가해자이며 기득권자이나, 3물결의 담론에선 자신 역시 피해자이므로 한남들은 페미들에게 당당하게 자신의 밥그릇도 챙겨 달라고 할 수 있게 된다. 한남들은 더 나아가  이를 "진정한 페미니즘"이라 찬양하거나, 여성만 피해자가 아니고 성 평등을 지향하는 거니까 "젠더 이퀄리즘"이라 부르자고 이야기한다. 즉, 이들에게 "맨 박스"란 자신의 식민지 남성성을 교묘하게 실드치면서 스스로의 가해자성을 지워버리기 위한 좋은 수단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한남들이 이용하기 가장 좋은 것은 교차성 이론이다. 본래 교차성 이론은 기존의 여성운동이 서구 중산층 백인 여성들 위주이며, 중층의 약자성을 가진 여성들을 포용하지 못한다는 문제제기로부터 나왔다. 확실히 중층의 약자성을 가진 여성들의 경험은, 그 약자성들을 칼로 무 자르듯이 완벽하게 분할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빈곤하여 직업 교육기회를 누리지 못해 성매매를 하게 된 여성으로부터 계층 문제와 여성성 착취를 각각 따로 분리해낼 수 있을까? 레즈비언의 섹스를 신기해하며 가위충이라 낄낄대는 것은 여성혐오인가, 성소수자 혐오인가? 아마 분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교차성은 "중층의 약자성을 가진 여성의 경험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약자와 연대해야 한다"로 이어지면서, 연대주의로 나가는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3물결에선 남성 역시 가부장제의 피해자란 관점이 깔려 있으므로,  연대의 대상은 생물학적 여성만을 포함하지는 않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남들의 식민지 남성성이 발현된다. 


  한국에서 남성들은 이 교차성 이론을  '고통을 줄세우는'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들은 대체로 자신의 약자성을 이야기하면서(약자성이 없는 경우엔 맨 박스를 사용한다) 스스로를 피해자화한다. 정확히 '여성들보다' 내가 더 피해자라고 이야기하며 여성을 아득바득 기득권자의 위치에 세워두는데, 더 나아가면 자신의 약자성을 이용하여 여성혐오를 정당화하기까지 한다. 


  우선, 자신의 약자성을 말하며 여성을 굳이 기득권자의 위치에 세우려는 풍조에 대해 논의하겠다. 아주 대표적인 예시로, 게이 남성과 이성애자 여성(※둘 다 트랜스가 아닌 경우로 가정)을 놓고 억압배틀을 벌이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겠다. 이 때 게이 남성은 자신이 성별권력에선 여성보다 강자이나 성소수자이므로 동시에 여성보다 약자이며, 종종 여성인권보다 동성애자 인권이 더 낮다고 언급하면서 여성을 권력자로 상정한다. 이는 지극히 무례한 일인데, 두 경우 모두 살아본것도 아니면서 약자성의 서열을 매기는 것은 상대의 경험을 배제할 수 있고, 여성을 기득권자에 위치시키려 할 때 디폴트를 이성애자 여성으로 잡음으로써 성소수자인 여성은 그대로 존재가 지워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무의미하다. 고통을 줄세워서 뭘 얻을 수 있지? 내가 더 약자임을 확인받으면 고통이 없어지나?)


  또한 약자성을 이용해 여성혐오를 정당화하는 케이스, 이 역시 대단히 골치아픈 문제이기도 하다. 


  여성들은 상대적으로 배려라는 이름의 감정노동과, 더 많이 이해할 것을 요구받았고 이들은 그동안 각종 약자 운동에 남자들보다 더 많이 참여하고 연대해 왔다. 그런데, 바로 이런 지점을 알고 여성에게 접근하거나 여성혐오를 하는 남성들이 있다. 이들은 성별 권력에서 자신은 강자일지 모르나, 다른 층위에서는 자신이 약자임을 내세우면서 "약자들끼리의 연대"를 당당히 요구하며 여성혐오를 한다. 그러나 여성은 이를 지적할 수 없으며, 지적해도 "여자도 무슨무슨혐오 하잖아", "그래서 연대 안하겠다는 거야? 우리 혐오하겠다고?"라는 논점흐리기 답변만이 주로 돌아왔을 뿐이다. 


   물론, 여성도 소수자혐오 한다. 이를 부정할 생각은 당연히 없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반응들은 결국 여성혐오에 대해 전혀 반성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한남들이 "남자도 성범죄 당하는데요!"라고 말 돌리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또한 교차성 이론으로 여러 약자성을 가지고 개개인의  경험을 통합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면, 어째서 약자성을 갖는 한남들에게서는 굳이 "약자성"과 "여성혐오"를 분리해내려 하는지. 식민지 남성성이 한남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된다면, 그 한남 호모소셜 가운데서도 더 남성성이 부족하다 취급되었기 때문에 이것이 여성혐오로 이어질 수 있다는 해석은 왜 나오지 않았는가? 답은 정해져 있지 않은가, 이런 해석이 결국 '분리주의'를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남성들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듯 3물결 페미니즘의 일부 담론은 한남들의 식민지 남성성을 교묘히 숨기는, 그러나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맨 박스는 남성들 역시 가부장제의 피해자라 이야기하며 그들이 특권층이라는 위치로부터 책임을 회피할 여지를 주었고, 교차성 이론과의 결합은 이들이 소수자로서 '여성보다' 약자이며, 마땅히 연대해야 할 존재로 만들었다. 3물결의 담론 하에서, 남성은 불편하지 않다. 또한, 불편하지 않기 때문에 지지하기도 한다. 물론 노선을 정하는 데 다른 이유들도 있을 수 있겠으나, 그 '불편함' 이 근본적인 한 가지 이유가 아니라면, 왜 급진주의를 말하는 남성은 사막에서 바늘 찾듯이 안 보일까?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론의 취지는 둘째치고, 이것이 과연 누구를 위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검토해보아야 한다. 한남들이 가해자성을 숨기고, 여성을 외려 기득권자로 올려놓는 페미니즘은 어떻게 가부장제의 체제를 뒤흔들 수 있는가?




원문은 2017년 4월 18일,19일에 페이스북에 두 부분으로 나누어 처음 게시하였습니다. 

1부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198875770615618&id=100014795893804

2부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199633973873131&id=100014795893804





블로그 이미지

남혜리(Hyeri Nam)

6B radical feminist,lesbian,liberal right-winger, atheist,contents creato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