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들 간에는 선배, 후배라는 개념이 사용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머모님(대모님)'이라는 용어도 마찬가지.
#1. 후배와 선배는 한국의 정서상 친구가 될 수 없다
나이 차에 상관없이 친구가 될 수 있는 서양과는 달리, 한국의 선후배 문화는 정말 빻은 형태(군대의 위계질서 모방)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으며 아주 '바람직한' 선후배 문화라고 해도 후배와 선배 간에는 친구가 될 수 없는 분명한 위계질서가 존재한다.
그 바람직한 선후배 문화란 대개 선배가 후배에게 교과서나 시험 족보 따위를 물려주거나, 후배는 선배가 수능이나 중요한 시험을 치를 때 응원하러 가는 양상이다. 얼핏 보면 서로 챙겨주는 형태인 것 같지만, 챙기는 것에도 분명한 순서가 있다. 선배는 '먼저 보살피고 챙기는' 쪽이며, 후배는 '그에 대해 보답하는' 양상을 띤다. 따라서 아무리 훈훈한 관계라 할지라도 후배-선배가 동등한 권력을 가질 수 없다. 하물며 폭력을 동원하며 군대식 위계질서 강요하는 곳은....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따라서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후배-선배'라는 표현은, 단순히 '먼저 페미활동을 한 사람' 내지는 '나중에 페미활동을 시작한 사람'이라는 구분으로 생각할 수 없다. 이미 우리는 선후배 문화가 위계질서를 생산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페미판에서도 위계질서를 재생산하기 위해 사용된 사례가 있는 바, '후배 페미'와 '선배 페미'라는 표현은 쓰지 말아야 할 것이다.
#2. '머모님(대모님)' 이라는 용어는 어때?
- 숭배/ 서열화 가능성
'머모님(대모님)'은 대체로 앞서 운동한 사람들에 대한, 혹은 나이 많은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예우의 표현쯤으로 사용되고 있다. 다만 한 세기를 앞서 활동한 사람뿐만 아니라 동시대 여성들- 특히 기껏해야 1년 가량 앞섰을 '메르스 갤러리 활동멤버'들을 추앙하는 데까지 사용하는 등 용어를 남발하고 있어서 자칫하면 특정 페미에 대한 지나친 숭배와 함께 '머모님' 소리를 못 듣는 사람들은 서열화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이미 한 세기를 앞서서 활동한 페미니스트들, 혹은 현재 은퇴한 분들에 대해서는 그분들의 업적과 성과에 대해 지속적으로 발굴하고 띄워줄 필요가 있다고 보지만, 동시대 페미들에 대해서 함부로 숭배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것에는 대단히 회의적이다. 그렇게 숭배하던 인물도 사람인 이상 잘못된 언행을 할 수 있는데, 숭배로 인해 판단력이 흐려져 도리어 피의 쉴드를 칠 수 있기 때문.
실제로, 레진코믹스의 모 작가가 속시원하게 발언한다는 이유로 페미니스트들(특히 여초 커뮤니티 중심)은 '대모님'이라는 호칭을 붙여가며 그 작품을 찬양하기 바빴다. 그런데 #문화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열풍이 불며 그 작가가 과거 부적절한 언행을 했다는 것이 피해자에 의해 폭로되었고,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적잖이 충격받고 회의감을 느꼈다. 받아들이기 어려웠는지, 폭로한 피해자에게 잘못이 있다는 반응까지도 나올 정도였다.
- 모성 숭배적이다.
근대 문학의 어머니, 음악의 아버지... 이런 표현 한 번씩은 들어 봤으리라 생각한다. 대체로 특정한 분야에서 '어머니' 또는 '아버지'라는 표현이 붙을 때는 그 개인의 업적이 높이 평가되는 동시에, 그 사람의 '경향성을 잇는 후손들' 이 나와야 한다. 그것도 존나 많이 나와야 한다.
'머모님(대모님)'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는 이해한다. 본래는 한 세기~한 세대를 앞서 운동했던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사용되는 표현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의 어머니라는 표현은 그 뒤를 잇는 후손들이 많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게 왜 문제가 되는지 설명해 볼게. 남자에게 있어 후손이 많다는 것은 곧 자신의 성씨를 이어받은 사람이 많아 계보가 탄탄하다는 의미가 된다. 하지만 여성은 자신의 성씨를 물려줄 수가 없었고, 호주제가 폐지된 지금까지도 어머니의 성을 따르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여성에게 있어 후손이 많다는 것은 여성의 몸이 재생산의 도구로 취급받았다는 걸 감안했을 때, '자손을 많이 낳은' 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즉, '~의 어머니'라고 이름붙이는 건 사회문화적인 배경을 고려했을 때, '다산'에 가치를 두는 모성 숭배하고 연결된다. 그동안 xx학의 아버지 또는 어머니라는 표현은 있었는데, '페미니즘/여성학의 어머니'라는 표현이 없었던 이유는 왜였을까.
'페미니즘을 말하다 > [자필]올빼미의 시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GCDA 슬로건으로 본 페미니즘 굿즈 열풍에 대한 비판 (0) | 2018.02.25 |
---|---|
여성의 거절은 거절이다, No means no (0) | 2018.02.02 |
나는 앞으로 꾸밈노동이라는 말을 쓰지 않을 것이다 (0) | 2018.01.24 |
왜 우리는 게이의 사기결혼에 분노하는가 (0) | 2018.01.24 |
이공계 여성차별 OUT (0) | 2018.0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