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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에밀리 디킨슨의 밤> 을 함께 보고 토크콘서트를 함께하는 자리였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왔다.

- 영화 감상평

작중에서 에밀리와 파트너 수잔의 관계는 겉으로 이성애 제도의 탈을 쓴 채로 유지된다. 학창시절에는 문제되지 않았지만, 망혼적령기에 수잔은 정상으로 보이는 길을 택한 것이다. 에밀리는 비혼여성으로 남았고, 수잔은 에밀리의 오랩충과 형식적으로 결혼해서 관계를 이어나간다. 영화에서는 격렬한 키스신을 통해 둘의 열정을 보여주지만 그 관계는 대외적으로 드러낼 수 없는 것이었다. 에밀리가 수잔에게 쓴 수천 편의 시는 결국 수잔의 이름은 지워진 채로 사후에 출판되었다. 지워진 수잔의 이름은 근래에 와서야 복원되었다고. 영화는 지우개 지우는 소리를 끝으로 하며 크레딧이 올라갔고, 그 결말은 지금의 현실이기도 했기에 가슴 한켠이 저릿해지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영화 상영회 장소를 대관할 때도 종교건물이라 레즈비언이 언급된 포스터를 대외적으로 부착하지 못하게 했다고.

또한 남성 중심적인 문단 역시 작중에서 드러난다. 에밀리가 출판사에 보낸 시는 ‘운이 맞지 않는다’며 퇴짜를 맞고, 수잔 또한 그가 생전에 출판할 수 있게끔 부탁을 해보지만 좀처럼 되지 않았다. 그가 생전에 시인으로서 성공했더라면 생애 끝자락에는 스스로 관계를 밝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일전에 본 <콜레트>와 그를 겹쳐 보기도 했다.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레즈비언 관계성 자체에 초점을 맞춘 나머지 시인으로서 그가 얼마나 훌륭한지에 대해선 많이 다루어지지 않았다고 느꼈다.

영화 총평: 비가시화된 당대 여성 시인/레즈비언의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너무 어둡지 않게 유쾌한 요소들을 적절히 섞어놓은 영화였다. 영상미도 좋았다. 여성의 불행 포르노는 지뢰라서, 에밀리 디킨슨의 삶을 어둡고 비참하게만 그려냈다면 내 성격상 보다 뛰쳐나갔을 것이다.

토크콘서트

그 자리에서 나는 비연애주의자 레즈비언이라고 선뜻 밝히기 어려웠다. 2시부터 시위를 뛰고 와서 내 언어로 엮어내기엔 너무 피곤하기도 했거니와, 대부분 파트너가 있거나 파트너를 만들 사람들인데 내 이야기가 얼마나 잘 전달될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애초에 영화부터가 두 여성의 평생의 로맨틱한 관계를 다뤘는데, 홀로서기를 택한 레즈비언도 있다는 발언이 이 자리에 ‘적절하긴’ 한 걸까. 머리가 복잡해졌고 나는 침묵하기를 택했다. 그러나 온라인 공간에서라도 분명히 말해야겠다.

첫번째 질문, "레즈비언의 역사는 어떻게 왜곡되고 탈취되었는가" 는 영화의 주제와 직접 관련되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학교든 가정이든 직장이든 집단 내에서 배제되지 않기 위해(보수적일수록 더하다) 개개인의 레즈비언들은 커밍아웃을 꺼린다. 완전히 벽장으로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에밀리 디킨슨처럼 사후에라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다면 이들은 그냥 평범한 이성애자 여성쯤으로 기억될 것이다.

또한 레즈비언은 퀴어판에서는 퀴어란 이름으로 포괄적으로 묶이고, 동성애자로 게이와 함께 묶여왔다. 그러나 레즈비언은 여성으로서 특수한 이해관계를 갖는다. 그러나 이는 그동안 무시되어 왔기에 레즈비언들은 독자적인 정치세력화, 가시화를 위해 GettheLout 으로 나왔다.

사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도 않았다. 당연히 뽑아낼 수 있는 주제의식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두번째, 세번째 질문이었다.

- 두번째 질문. 로맨틱한 우정 하에서 누락되는 레즈비언 ? 혹은 그 프레임에서 어떻게 관계성을 확립/보증받나
여자 둘이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고 걸어도 커플이 아닌 친구로 독해되는 것, 소위 말하는 ‘헤녀우정’이 레즈비언 지우기라고들 한다. 예전에, 그러니까 내가 좋아하는 언니가 있었을 때는 그 말에 쉽게 동의했다. 하지만 비연애주의자가 된 지금은 연애지상주의가 녹아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레즈비언 관계는 연애로만 한정되어야 하는 걸까? 당사자들이 레즈비언이어도 ‘연애가 아니라면’ 레즈비언 관계가 아닌 것인가? 연인이냐 친구냐 굳이 따지려 들지 않고 ‘친밀한 두 여성’의 모습 그 자체를 흐뭇하게 바라볼 수는 없는 것일까.

한국 사회에선 비혼 여성들이 늘어나고 있고, 여성들은 자기들의 친밀한 관계를 ‘연인’으로 정의하지 않아도 비혼이기 때문에 이성애가부장제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동거하는 n명의 여성들이 연인이든 친구든 그건 별로 중요치 않다. 사실 혼자 살아도 충분하다. 래디컬 페미니스트로서 던져야 할 질문은 “그래서 이들이 가부장제를 위협하는가?”이며, 내 대답은 “그렇다”. 레즈비언은 파트너가 있을 때만 가부장제를 위협하는 존재가 아니다. 본질은 우리가 이성애 제도에 편입되지 않기 때문에 가부장제에 위협이 되는 것이다.

내가 비혼 친구들에게 느끼는 감정을 로맨틱한 연애감정이 아니라 ‘우정’으로 정의한다 해서 그것이 가부장제에 순응하는 것으로 읽혀야 하는가. 연애감정이 없는 스킨십은 ‘헤녀우정’인가? 그런 해석은 레즈비언을 성애적인 존재로만 국한시키고, 우정을 연애보다 급이 낮은 관계라고 못박으면서 비연애주의 레즈비언들을 레즈비언 커뮤니티 밖으로 밀어낸다.

세 번째 질문. 레즈비언의 정치적 의제 고민하기
레즈비언이 문화컨텐츠 등으로 더 많이 가시화될 필요성, 그리고 불평등한 임금/고용 문제, 생활동반자법 및 동성결혼 등의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나 1인가구 의료법 개정 문제는 나오지 않았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해 좀더 이야기를 보충하고자 한다. 레즈비언은 ‘파트너가 있는 상태’가 디폴트인 것인가? 생활동반자법은 레즈비언이어도 파트너가 없는 여성을 보호해 주지 않는다. 동성결혼 법제화 역시 비혼 혹은 솔로로 남는 레즈비언을 또다시 누락시킨다.

일전에 비혼의제를 생각하며 만든 구호가 있다. “여자 혼자 잘 살면 둘이서도 잘 산다.” 경제력 문제 때문에 동거하는 경우가 제법 많을텐데, 여성빈곤 문제가 해결되면 굳이 ‘파트너’에 연연할 이유가 없다. 스스로 법적 보호자가 되면 굳이 수술할 때 보호자로 싸인해줄 동반자가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여성 혼자서 누릴 수 있다면, 둘이면 더 풍족한 삶을 살 수 있다.

무엇보다도 여성은 일대일 관계로 묶여야 할 필요가 없다. 일대일로 여성을 구속하는 것, 여성이 혼자 살기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은 이성애가부장제의 오래된 관습이다. 이성애가부장제는 자기만의 온전한 삶을 영위하는 여성을 ‘히스테릭한/외로운/선택받지 못한’ 존재로 낙인찍고 여성의 노동력을 평가절하함으로써 남성에게 매이는 선택으로 이끈다. 그 선택의 끝은 망혼과 출산, 그리고 육아와 경력단절이다. 물론 여성 간 일대일관계의 양상은 출산과 육아를 일반적으로 포함하지는 않는다.(입양해서 키우는 레즈비언들도 있다) 그러나 오직 나라는 한 사람에게 정신적, 물질적 자원을 쏟아부으라고 하면서 상대방의 사랑을 의심하고 확인하려 든다는 점에서 구속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또한 ‘영원한 나의 동반자’를 욕망하는 것도 이성애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실제로 보고듣는 현실의 레즈비언 연애썰을 생각하면 이것도 판타지)

종합

영화가 던지는 주제의식에 공감하면서도, 나는 개인적인 위치성 때문에 마냥 편하진 않았던 공간이었다. 레즈비언으로 느슨하게 묶여 있지만 나는 반-성애주의자anti-sexualist이다. (나는 무성애자이기도 하지만, 지금의 무성애는 스펙트럼으로 넓게 정의되기 때문에 반성애라는 표현을 썼다.) 아마도 나는 이 특수성 때문에 이번뿐 아니라 레즈비언 담론에서 지속적으로 위화감을 느낄 것 같다. 레즈비언 연속체라는 개념은 얼마나 유효한지, 레즈비언 재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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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혜리(Hyeri Nam)

6B radical feminist,lesbian,liberal right-winger, atheist,contents 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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