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rls_can_do_anything 슬로건이 일종의 '페미니스트 인증'으로 사용되는 시류에 편승해, 이 문구를 사용한 여러 페미굿즈들이 나오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는 당연한 모습이다. 어떤 사업 아이템이 돈이 된다고 알려지면, 너나 할것없이 이를 이용해 수익을 내고자 한다. 외식업계에서 오만 음식에 치즈를 얹는 것도, 허니버터칩 열풍에 편승해 허니XX 과자들이 인기를 얻었던 것도 다 같은 맥락이다.
나는 그런 일련의 경제활동을 하나로 싸잡아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 영역이 페미니즘이라면 좀 비판하고 넘어가야겠다. 왜냐하면 페미굿즈는 철저히 여성을 타겟으로 하는 상품이며, 여성인권의 슬로건을 표면적으로 내세우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은 굿즈를 소비함으로써 수집/치장 욕구를 충족하는 동시에 여성인권에 기여하는 것 같은 만족감도 얻을 수 있다. 내가 여기서 분명히 지적...하고 싶은 것은 '여성인권에 기여한다는' 부분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그건 여성인권에 사실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굿즈를 사서 착용하거나 붙이는 그 자체만으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이렇게 반론하고 싶을 것이다.
'여성의 목소리가 삭제되는 게 여혐민국의 현실인데, 내가 페미니스트임을 겉으로 드러내는 건 유의미하지 않냐'
그래. 페미니스트 후드티를 입든 에코백을 들든 뱃지를 달고 다니든 인증하는 건 유의미하지. 하지만 굳이 굿즈로 치장하지 않더라도 당신은 페미니스트임을 인증할 수 있다. 더 유의미하고 저항적인 방법으로. 그 방법은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여성혐오적인 발언에 "그건 여성혐오야"라고 분명히 제지하는 것, 주변 사람들에게 페미니즘을 알리는 것. 내가 페미니스트고 메갈이고 워마드라는 선언은 말로도 할 수 있고, SNS에 글로 쓸 수도 있다. 자신을 직접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페미활동으로는 민원 넣기, 국민청원/시위 참여, 페미니스트 스티커 붙이기, (페이스북 페이지 등 익명 플랫폼을 이용해) 페미니즘 컨텐츠 제작 등이 있다.
앞서 말한 활동들은 세상을 변화시킨다. 그런데 페미굿즈를 입는 건 그만한 영향력이 있는가? 내가 볼 땐 아니다. 그나마 회색이나 검은색 티셔츠 입으면 다행이게. 위협적인 느낌을 주지는 못할망정 여성성의 상징으로 쓰이는 핑크색으로 굿즈를 만들지 않나, 페미니스트는 물지 않는다는 문구를 쓰지를 않나. 페미니스트임을 드러내면 욕하고 아예 사회적으로 매장하려 하는 게 여혐민국인데, 기왕 전시할거면 저항적이고 위협적인 느낌을 주어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판매자들의 페미니즘 이해도를 신뢰할 수 없다. 페미니즘이 돈이 된다는 슬로건에 눈독들여 홍보했는데, 그 밑천이 드러나 엎어진 페미굿즈 텀블벅이 몇 개였던가. 이번 GCDA 열풍에서도 마찬가지다. #GirlsCanDoAnything 은 단순히 패션 아이템으로 소비될 문구가 아니다. 그 슬로건을 제대로 실천하려면, 여성 청소년, 여자 아동들이 고정관념을 깰 수 있게끔 가르쳐야지. 굳이 장사를 해야겠다면 정치, 과학, 법률, 의료 등 각 분야에 진출해 있는 여성들에 관한 책과 강연을 파는 게 훨씬 어울리지 않는가.
여성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구호는, 여성인 나와 당신이 남성중심적인 사회의 편견을 깸으로써 비로소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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