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정체화하는 과정을 흔히들 <매트릭스>에 나오는 빨간약을 먹었다고 비유한다. 그 빨간약은 현실을 깨닫게 만드는 약이다. 그 현실은 유토피아가 아니며, 행복함과 동시에 고통, 그 외 여러 감정들을 마주하는 공간이다. 페미니즘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려는 목적으로 페미니스트가 되면 행복하다고 말하는 건 고통을 의도적으로 삭제하는 자기기만이다. 모두가 성공한 삶을 추구하게끔 만들기 위해 성공한 사람의 행복한 일상에만 초점을 맞추고, 이를 위해 힘들게 기울인 노력을 삭제하거나 미화하는 일과 똑같다.


기존의 사고체계를 뒤바꿔놓고 얼마나 뿌리깊은 억압이 존재하는지,얼마나 여성혐오가 만연한지 깨닫는 일을 '행복함'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왜 우리에게 '프로예민러', '프로불편러' 라는 딱지가 붙는데. 나의 욕망과 습관도 가부장제의 체계 하에 구성된 것은 아닌지 자기검열하는 일이 어떻게 쉬운 일일까. 그리고 공론장에 발담근 사람들은 다른 노선과 정치적인 담론 싸움을 지속해나가야 한다. 천성이 토론을 즐기는 사람일지라도, 타협 불가능한 쟁점들을 두고 신명나게 낙인을찍어가면서 싸우는 과정이 행복할 리 없다.


그렇다고 페미니스트들이 항상 불행하냐 하면 그렇지만도 않다. 페미니즘을 하는 과정 역시, 1-2년의 단기간이 아니라 생각한다면 결국 우리 삶 가운데 한 부분이다. 우리 삶은 고통의 연속선으로 이루어져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꽃밭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천진난만하게 뛰어노는 그림에 머물러 있지도 않다. 소소한 행복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주변 사람들의 변화를 목격하며 느끼는 기쁨, 같은 곳을 바라보는 사람들끼리 느끼는 동료의식, 그동안 불편하게 느꼈지만 말할 수 없었던 것을 드디어 말하게 된 해방감, 이런 것들이 곧 소소한 행복이다. 그 소소한 행복은, 앞서 말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이 길을 계속 걸어가게끔 나를 지탱해주는 힘이다.


그렇다면 페미니스트의 삶은 행복과 불행의 혼합물인가? 글쎄,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는 과정,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는 삶이 행복 또는 불행의 이분법으로 간단히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행복과 불행 외에 다양한 감정들 또한 교차하며, 시시각각 변한다. 예를 들어 실친 중 한 명이 내가 쓰는 필명을 알고, 나를 팔로우한다고 말했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은 기쁨과 동시에 내가 그 사람의 눈치를 봐야 할까? 하는 불안함이었다. (그 불안함은 이내 사라졌지만) 함께 열심히 싸우던 사람들이 자쳐서 페이스북을 떠나겠다고 말할 때 나는 아쉬움, 안타까움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져 있으리란 위안을 받는다. 위 사례들은 단순히 행복/불행이라는 카테고리에 분류될 수 없다. 따라서, 페미니즘을 하면 행복하다, 혹은 불행하다고 단정짓는 건 바보같은 일이다. 물론 개개인의 삶에서 행복을 더 크게 느낄 수도 있고, 불행한 감정을 더 많이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로 단정짓는 일이 내가 경험하는 무수한 감정들 중 지극히 일부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임을 나는 여기서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한다. 페미니즘은 내 시각의 창이 된 인생의 한 부분이며, 그 창으로 들어오는 감정들은 고작 한두 가지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원 글은 17년 6월 2일경 필자의 이전 블로그에 게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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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혜리(Hyeri 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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