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제도에서, 비교적 인도적으로 노비를 대하는 주인이 있을 수 있고, 혹사시키는 주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간에 주인과 노비 사이에 어떤 계급이 존재한다는 점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섬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거기에 만족하는 사람이 있었을 수는 있겠으나, 노비의 신분으로서는 결코 주인과 동일한 권리를 누릴 수 없다. 


  노비문서를 불태웠음에도 다시 노비로 돌아갔던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이 노비로 살아온 생활에 이미 익숙해졌고, 다른 직업을 가질 교육기회를 갖지 못해 무엇을 해야 할지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다시 노비로 돌아간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노비들이 해방된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기본적으로 노예 제도가 차별과 억압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성매매 담론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진상 손님이든 그나마 좀 나은 손님이든 간에 성구매자와 판매자라는 위치가 변화하지는 않는다. 돈을 받는 대가로 여성은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여 남성을 만족시켜야 하며, 이 시스템 내에서 외모, 나이 등의 요소로 값어치가 매겨지는 상품이 되며, 주기적으로 성병 검사를 받는 등 상품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관리'가 요구된다. 


   활동가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아도 결국 다시 돌아가는 여성들이 있다고 한다. 당장 수입이 적어지는 것도 있고, 그 생활에 익숙해져서 굳이 빠져나올 필요성을 못 느껴서도 있다. 어쩌면 직장을 구해도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진 않을까, 하고 사회적 시선을 두려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현실적인 어려움에도 반성매매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결국 이들을 성매매로부터 구출해내야 한다고 믿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노예제도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상품화시키는 억압이기 때문이다. 젠더와 빈곤이 겹쳐져 있는 억압. 


   현재 반성매매 진영에서도 이러한 성매매 여성들의 문제를 모르는 것이 아니다. 교육기회 및 재정적인 지원이 더 확대되어야 하고, 꽃뱀, 걸레, 된장녀, 가정의 파괴자로 낙인찍는 현재의 사회적인 인식은 앞으로도 꾸준히 개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성매매 여성에게 너 때문에 여성인권이 낮아진다고 책임을 묻지 않는다, 그건 마치 탄압받은 흑인 노예들에게 인권이 낮아진 책임을 묻는 것과 똑같으니까. 


   나는 성노동론자들에게 묻고 싶다. 구조적인 억압을 은폐하고 이를 '노동'으로 치환하는 것은 누구의 욕망을 합리화시키나. 성매매가 완전히 비범죄화된다면 결국 누가 웃는가, 권력을 가진 남성들이다. 성노동론은 남성의 욕망에 부합함으로써 남성들이 여성을 소유하려 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자유롭게 섹스하는 여성을 걸레로, 창녀로 낙인찍는 일은 지속될 것이다. 결국 성노동론은 여성을 지배하는 방식으로 오랫동안 작동되었던 성녀- 창녀의 이분법을 해체시킬 수 없으며 상품으로 착취당하는 여성들을 기만한다.


*본 글은 2017년 6월 9일 필자의 페이스북에 1차로 게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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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혜리(Hyeri 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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