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2017/11/23 - [페미니즘을 말하다/[자필]올빼미의 시선] - 페미니스트 멘탈케어: 분노와 지침 가운데, 양가감정을 느끼는 당신에게

페미니스트 선언을 하고 난 후, 주변 사람들과 페미니즘에 대해 대화해 본 적이 있나요? 아무리 설명해도 상대방이 알아듣지 못하거나 대화를 피하려고만 해서 실망한 적이 있나요?


  저는 이 글을 그런 경험을 해본 사람들을 위해 바칩니다. 페미니즘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다가 실망과 상처를 경험한 사람들을 위해 바칩니다. 어떤 방법으로 대화를 시도해도 상대방이 알아듣지 않고 피하려고만 할 때, 이 글이 당신께 하나의 제안이자 위로가 될 수 있기를.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는 데는 단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페미니즘에 대한 호감도를 -10부터 +10으로 점수를 매긴다면, 호감도가 -10인 사람을 +10이 아니라 -7,-5 수준으로 끌어올리기만 해도 잘하신 거예요. 그럼 어떻게 +10까지 채우냐고요? 그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통해서, 관련 매체를 통해서 채워질 수도 있는 겁니다. 물론 나로 인해서 역차별 운운하던 사람이 페미니스트로 뿅 하고 바뀐다면 좋겠지만, 사람 일이란 게 항상 뜻대로 되진 않잖아요.


그러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당신은 그저 마음에 담아둔 사람에게 페미니즘이란 씨앗을 뿌리면 되는 거예요. 물론 당신이 그 싹을 틔우면 더할 나위 없이 바람직하겠지만, 싹을 틔우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 상태로 끝까지 싹을 틔우지 못할 수도 있지만, 나중에 어떤 계기로 싹이 틀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물을 주고 꽃을 피워낼 수도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당장 누군가에게 페미니즘이 뭐다, 여성혐오가 뭐다 그런 이야기를 했을 때 그 사람이 거부반응을 보인다고 해서 엄청 실망하고, 그 사람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예요.



물론 거부반응을 보였을 때 당연히 실망하고 상처받을 수 있지요. 이해합니다. 저 또한 무시당했을 때 상처를 많이 받았으니까요. 충분히 노력했고 놓고 싶다면 내려놓아도 괜찮아요. 그걸로 비난할 사람은 없으니까요. 


   현재 페미니즘은 하나의 유행이라고 말할 정도로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 되었습니다. 여성혐오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2015년, 메갈리아는 뜨거운 감자였으며 올해는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연예인이 나타났고 각종 SNS에서, 방송에서, 페미니즘은 중요한 이슈로 다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직은 반발하는 사람들, 무관심한 사람들이 더 많이 보이지요. 하지만 치아만다 응고치 아디치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여자도 온전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정말 우리 문화에 없던 일이라면, 우리는 그것이 우리 문화가 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거듭 반복하면, 결국 그 일이 정상이 됩니다."

-치아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네, 우리는 페미니즘이 상식이 되는 세상을 만들면 됩니다. 그러면, 영영 변하지 않을 것 같던 당신의 지인도 당신이 했던 말을 떠올릴 겁니다. 상식의 기준이 바뀌면, 그 상식에 맞추지 못하는 사람은 구시대적인 사람이 될 뿐이니까요. 


다시 한번 정리합니다. 당신의 지인이 페미니스트가 되길 바라나요? 일단은 대화를 시도하세요. 노력하세요. 그러나 힘들면 내려놓되 그 자체에 죄책감을 가지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당신이 아니더라도 그 사람이 페미 선언을 하는 계기는 얼마든지 생길 수 있으니까요. 그건 당신이 무능하다는 뜻이 아니에요. 그 동안에도 당신은 페미니즘이 상식이 되는 세상을 만들고 있잖아요? 결과적으로, 그 노력의 결실로 세상이 바뀌면, 당신의 주변인들 역시 바뀌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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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혜리(Hyeri Nam)

6B radical feminist,lesbian,liberal right-winger, atheist,contents 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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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미니스트로 살다보면 여러 일이 겹쳐 힘들고 지쳐서 모든 걸 내려놓고 싶단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한편으론 나 살자고 떠나는 것 아닌가, 방관자가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양가감정을 느낀다. 아마 이런 감정은 나만 느끼는 게 아닐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계속 빚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보다 앞서 싸웠던 페미니스트 대장님들에 대해서, 앞장서서 문제를 공론화하는 총대들에 대해서, 신상을 까고 당당하게 활동하는 사람들 등등...

부채감을 느끼는 건 지극히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첫째, 우리는 여성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면 안 된다'고 그건 '이기적'이란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주입당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둘째. 여성 문제는 나의 일이기에, 당신의 일이기에, 그리고 우리의 일이기 때문에.

그러나 당신이 쉬는 것에 대해 굳이 미안해할 이유는 전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임을 깨닫고 페미니스트가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여성대상범죄를 당하지 않을 권리, 여성으로서 목소리를 낼 권리, 직장에서의 생존권 등이 내가 찾아야 할 권리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의 생존 문제로부터 시작한 투쟁이기에, 생존을 보장받을 수 없는 운동은 말이 안 된다. 나의 물질적 자원, 정신적 자원 등을 털어넣는 것도 나의 생존이 보장되었을 때 가능한 일이다. 당장 싸우는 다른 사람들에게 미안해하는 마음은 십분 이해하지만, 당신의 생존이 우선이다.

휴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재충전의 시간이며, 현생을 챙기는 건 당신의 생존을 위한 일이다. 그리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휴식이 필요하며 아무도 그걸 욕하지 않는다. 당신이 잠시 내려놓을 동안에도 다른 이들은 싸우겠지만, 반대로 당신이 싸울 때 누군가는 쉬고 있지 않겠나. 그러니 '쉰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으면 한다. 


기억하자. 개인의 생존이 우선 보장될 때 운동도 할 수 있다. 그리고 본인의 감정을 부채감, 미안함으로 해석하지 말고 차라리 자매애로, 고마움으로 해석하자. 부채감으로 운동하게 되면 의무적인 '일'이 된다. 하지만 우리는 누군가 시켜서 이 일을 시작한 게 아니잖아?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수 차례 차별적인 기사 제목들을 보거나, 시선폭력을 당하거나, 혹은 존나 빻은 말들을 접하면서 분노하겠지. 그 분노로 우리는 행동하지만 그건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이 개돼지들,국산남 다 재기해 욕을 내뱉으면서 감정을 소모하겠지. 그러나 길게 보자. 어찌되었든 우리는 사소하지만 변화를 목격했고, 그 변화의 가능성을 믿기에 이 일을 하는 게 아닌가. 그 과정에서 기력을 다 소모하지 않도록 때로는 쉬면서, 그러나 페미니즘의 시각을 잃지 않고 다시 돌아오길 반복하면서, 어제보다 한 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기를.


P.S. 메갈리아 사이트가 나오고, 넷페미들이 등장한 지 이제 2년입니다. 어쩌면 오래 전부터 활동하신 분들께는 2년이라는 이 기간도 귀엽게 보이고 '벌써 힘들다고 하냐'라고 말을 얹고 싶어지실 수도 있겠네요. 그래요, 서양은 여성운동의 역사가 150여 년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여성차별이 존재하고, 남자들에 의해 여성이 살해당하고, 성산업에서 착취당하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 2년 새에 여초 커뮤니티에서 많은 사람들이 한남이라고(이제는 줄쓰큰이라고) 6.9라고 되받아치는 언어를 사용하고,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도 큰 성과겠지요.

  그러나 본문에서 말했듯이 오늘도 우리는 여성혐오를 피부로 느낍니다. 제도적 차원에서 나아갈 길도 멀고, 인식이 많이 변했다지만 남자들의 반발은 여느때보다도 더 심해졌습니다. 단순히 페미니스트 굿즈를 들고 나가는 것만으로도 몰카의 위협에 노출되기 쉽고, 본인의 신상을 내걸고  페미니즘을 한다는 건 어쩌면 자신의 직장, 사회적 관계마저 위협받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건 성질이 급하고 자시고를 떠나서 실존하는 위협이기 때문에 우리는 분노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면서도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견고한 남성카르텔에 좌절하고 지치기도 합니다. 

  이 글은 제 자신을 포함하여 그렇게 자신의 자리에서 싸우다 지치는 사람들을 위해서 보내는 소소한 위로고 격려입니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자신의 자리에서 타오르는 이들을 위해, 그 불이 다 타서 꺼지지 않기를 바라며 쓰는 글입니다. 지치고 힘들 때 쉬세요. 그것은 방관도 아니고, 나약함도 아니며, 다만 재충전일 뿐입니다. 당신이 없는 그 자리에서 우리는 싸우고 있을 것이며, 회복하거든 당신이 서 있는 그 자리에서 목소리를 내 주세요. 내가, 그리고 이미 싸우는 페미니스트들이 당신과 함께 서겠습니다.

I'm willing to stand with you, in sisterh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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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혜리(Hyeri 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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