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 글에서, 퀴어 페미니스트들이 '젠더 폐지론'을 비판하는 네 가지 주요 주장에 대해 급진주의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답하고자 합니다. 그 네 가지 주장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1. 젠더 폐지론에 의해 젠더를 해체하면, 남는 것은 섹스인데 기존의 분류는 지극히 성기 중심적이다. 이는 불완전하다. 

2. 젠더가 해체된 이후 남는 것은 섹스이며, 이는 젠더 이분법을 강화시키는 방향이다.

3. 젠더를 폐기하는 것은 트랜스/젠더퀴어의 경험을 비가시화하는 폭력이다.

4. 시스젠더는 트랜스젠더보다 강자이며,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다.


1. 젠더 분류는 완전한가? 

  기존 분류의 불완전성에 대해서는 동감합니다. 성기중심적인 분류는 간성(intersex)을 배제하며, 생물학 역시 100%완벽한 기준이 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Y염색체의 유무에 의한 분류는 서양에서는 1950년대까지 유효했습니다. 현재는 Y염색체 위에 존재하는 성결정유전자인 SRY유전자가 발현되느냐/아니냐에 따라서 성기 모양이 결정된다는 것까지 대중들에게 알려졌는데, 그 외에 다른 성결정유전자가 발견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그렇다면, 현 시점 젠더분류체계는 완벽합니까? 아니요, 저는 젠더분류야말로 훨씬 구멍이 많다고 봅니다. 이는 바로 젠더가 '정신적 성별'이라는 특성에서 비롯됩니다. 


젠더분류체계는 나의 경험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습니다. 현재도 워낙 비슷해서 혼동되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젠더 플루이드와 젠더 플럭스, 에이젠더와 젠더리스, 젠더퀴어와 논바이너리 등은 자주 혼용됩니다. 또한 혼용만으로도 부족하여 사람들은 여러 개의 이름을 동시에 사용하기도 하지요. 예를 들어, 제 경우에는 분류에 따르면 논바이너리이며 젠더퀴어란 말도 혼용해서 쓸 수도 있고, 하위분류의 젠더리스와 성별 비순응자란 개념도 같이 사용해야 그나마 좀 커버가 되는 거 같더라고요.(웃음)


하지만 이조차 부족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참고로 기준은 제각기 다릅니다만, 현재 NYC에서는 31개의 젠더를 인정했고(https://www.google.co.kr/amp/s/heatst.com/culture-wars/here-are-the-31-gender-identities-new-york-city-recognizes/amp/) 영국 페이스북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젠더옵션은 71+개라고 하는군요(http://www.telegraph.co.uk/technology/facebook/10930654/Facebooks-71-gender-options-come-to-UK-users.html) 개개인이 경험하는 성별적인 특성이란 정말 각양각색이기 때문에, 젠더는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이름이 생길 때마다 불편함을 감수하고 줄줄이 외워야 하는 것일까요? n개의 이름표는 결국 혼란을 가중시키고, 이름표를 쓰지 않는 사람들을 배제합니다. 


또한, 타인의 젠더를 멋대로 잘못 넘겨짚는 것은(=미스젠더링) 대단한 폭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젠더 정체성이란 개인의 자아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내가 바라보는 나와 타인이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내가 다르듯 젠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타인이 판단해 주는 것이 맞을 때도 있고, 혹은 틀릴 수도 있죠. 간혹 트랜스젠더로 정체화했다가 피크 트랜스*(어떤 사람이 트랜스 커뮤니티에서의 모든 것이 옳지 않다 여기고, 트랜스정치학의 지지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게 되는 순간)를 겪어 다시 자신을 지정성별로 정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자아에 대해 총체적으로 완벽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까?


2. 성별 이분법 고착화에 관해

아니요, 현재의 분류체계 역시 젠더 이분법을 강화시킨다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젠더 분류에는 대체로 바이너리 모델에 기반을 둔 이름들이 많습니다. mtf/ftm이라는 정체성은 이분법을 근간으로 하는 이름이며, 중성이라는 이름 역시 여성/남성의 이분법에 기반을 둔 표현입니다. 논-바이너리라는 이름 역시 바이너리 모델이 존재함을 전제로 하고 사용되는 이름이지요. 


그리고 젠더 이분법을 깨는 것은 젠더를 세밀하게 나누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분법을 깨기 위해 우리는 필연적으로 기존의 젠더규범을 해체해야 합니다. 저를 포함하여 기존의 젠더규범에 들어맞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여성/남성의 이분법에 당연히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설명할 수 없는 용어니까요.

그렇기에 이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탐색하게 되는데, 이 사람들이 자신을 여성 또는 남성이라 부르지 말라면서 기존의 여성/남성 분류에 포함되길 거부한다면 과연 성역할 규범은 어떻게 깰 수 있을까요?


좀더 쉽게 이야기해 볼게요. 지정성별 여성인 A는 화장을 하지 않고, 원피스나 치마보다는 바지를 입길 좋아하며 짧은 머리를 고수합니다. 이 때 A가 자신을 논바이너리 정체성 중 하나로 소개한다면 A는 논바이너리로서 젠더표현을 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리고 A는 자신을 "내가 여자고, 이것이 여자다운 것이다"라고 소개할 수도 있다. 이 때 A는 여성에게 요구되는 젠더규범을 거부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 중 성역할 규범을 깰 수 있는 쪽은 후자입니다. 자신을 여성으로 정의하지 않고 젠더퀴어나 논바이너리 정체성을 사용하게 되면 결국 시스젠더인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성역할을 그대로 수용하고 이들에게 여성성/남성성을 고착화시킵니다. 


그렇다면 시스젠더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기존의 성역할을 그대로 재생산하는 사람들인가요? 젠더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사람들인가요? 아니요. 가부장제 시스템 하에서 지정성별 분류와 젠더규범의 폭력성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개중에는 안드로진이나 젠더플루이드/젠더 플럭스, 젠더리스 등 논바이너리에 해당하는 경험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류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거나, 지식을 접할 기회가 없어서 사용하지 않을 수도 있죠. 


그러면 자신의 젠더 정체성을 커밍아웃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질문할 수도 있겠네요. 글쎄, 정체성을 드러낼지 아니면 젠더 분류를 거부하고 살지는 개개인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다시금 말하건대, 가부장제 시스템 하에서 지정성별 분류와 젠더규범의 폭력성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또한 여성성/남성성의 이분법이란 가부장제의 유지를 위해 만들어진 개념입니다. 남자들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남성성'을 우위에, 그 반대의 특성을 여성성으로 이름붙였어요.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여성복으로 규정되는 옷(치마, 하이힐, 원피스, 스타킹,코르셋 등)은 실용성보다는 활동하기 불편한 옷이지요. 그리고 양육, 가사 등의 돌봄 노동은 여성의 일로 치부되면서 비하되었어요. 그 외에도 수동적일 것, ^예쁜 말^을 쓸 것, 도전하기보다 안정을 추구할 것, 등등 여성성이란 피지배 계급의 행동양식으로서 여성들을 억압해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성/남성성의 이분법을 유지해서는 안 됩니다. 이 젠더 규범은 깨져야만 하고, 이는 앞서 말했듯이 자신의 퀴어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정성별을 드러내고, 그 성역할에 맞지 않는 모습을 의도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가능합니다.


3. 젠더폐지론은 그들의 존재를 지우는가?

오해하고 있습니다. 이름을 없애버리자는 것은 당신의 경험을 삭제하고 입을 틀어막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나의 젠더가 무엇인지 이름표를 붙이지 않고서도 경험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앞서 저는 1에서 젠더분류의 불완전성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같이 젠더리스란 이름표를 쓰고 있다고 해도 당신이 느낀 경험과 나의 경험은, 억압의 정도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퀴어 공동체에서, 그리고 커밍아웃할 때 왜 각자 정체화하게 된 계기,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할까요. 사실은 그 이름만으로는 내가 누군지 설명하기에 부족하기 때문이 아닌가요? 


또한, 젠더 해체가 트랜스/젠더퀴어의 경험을 비가시화한다는 논리 그대로, 나는 여성의 경험을 지운다고 되돌려 줄 수 있습니다. 2에서 말했듯이 나라는 개인을 여성이 아닌 다른 젠더로 라벨링하는 것은 지정성별 여성으로서 당한 경험을 퀴어로서 겪은 경험으로 전환시킵니다. 그러나, 현재 지정성별을 기반으로 한 젠더 이분법이 하나의 장벽처럼 튼튼하므로, 이걸 퀴어로서 겪은 경험으로 전환시키는 것은 여성으로서 겪은 경험을 지워버리는 일이 됩니다.


예를 들어, 여성혐오범죄가 버젓이 존재하는데 내가 '여성으로 패싱되었기 때문에' 당한 성폭행을 젠더퀴어이기 때문에 겪은 경험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겉보기에 흑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나는 나를 백인이라고 생각해요! 쏘지 마세요!" 라고 말하면, 그 사람이 백인에게 총 맞아 죽었을 때 인종차별범죄가 아니게 될까요? 성감별 임신중절로 수많은 여자아이들이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젠더'로 죽지 않았습니다. 여성 할례의 경우 역시 '젠더' 로 인한 차별이 아닙니다. 


우리 개개인이 느끼는 성별 정체성, 경험들은 젠더라는 이름표 '이전에' 실존합니다. 본질은 우리의 경험이지, 이름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개개인이 가부장제라는 거대한 시스템 하에서 어떤 방식의 폭력을 경험했는지 말할 수 있는 분위기이며, 서로의 경험에 공감하는 가운데 이분법과 젠더 규범을 해체하는 것입니다.


4. 시스젠더란 말에 관해

  저는 시스젠더란 표현 자체를 거부합니다. '시스'라는 말은 정확히 정신적 성별과 신체적 성별이 같은 경우를 의미합니다. 실질적으로 '시스젠더'라는 말은 자신을 트랜스젠더 혹은 젠더퀴어로 정체화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붙여집니다. 그렇다면 정신적 성별이란 무엇인가요? 왜 스스로를 여성으로 느낍니까? 


자신이 원해서 여성으로 태어난 사람이 있습니까? 없겠지요. 차별이 존재하는 줄 알았더라면 아무도 여성으로 태어나고 싶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원하는 바는 여성 취급이 아니라, '인간' 취급입니다. 그런데 이 시스젠더라는 표현은 우리가 스스로를 여성으로 느낀다고 말합니다. 대체 그 여성은 누구입니까? 주민등록번호 2로 시작하는 사람들이고, 취업과 승진에서 차별을 받고요, 여성이기 때문에 화장실 몰카를 두려워하고, 여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핑크색을 좋아하고 리본과 레이스를 좋아하고 꾸미는 걸 당연시하게끔 요구되는 사회의 2등 시민입니다.


누가 2등 시민을 하고 싶습니까? 1등 시민이 되기를 원하지요. 그러나 사회에서 나를 그렇게 취급하기 때문에, 그 억압이 존재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여성'이라고 인식합니다. 내가 여성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당하는 각종 차별, 강요되는 여성성은 앞서 말했듯이 다른 젠더로 나를 표현한다고 해서 지워지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시스젠더란 표현은 너무 간단히 이런 맥락을 지워버립니다. 그 사람들은 과연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에 불만이 없을까요? 아니란 겁니다. 제가 하는 말이 여전히 '시스젠더니까' 하는 소리로 들린다면, 첨부된 사진을 보세요.  mtf인 케이트 본스타인이 쓴 <젠더 무법자>에서 저자는 분명히 "모두가 자신의 성별 지위에 불만을 가지며, 그 원인은 성역할, 지정성별, 성별 정체성일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요, 나는 성기를 기준으로 여성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주민등록번호가 2로 시작하고 여성으로 보이기 때문에 여성혐오범죄에 노출되고 차별을 당합니다. 나는 그래서 이 여성이란 이름을 혐오합니다. 그 이름은 차별, 억압, 2등 시민, 인형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름 또한 나에게 강요된 '여자는 어쩌고저쩌고~' 와 같은 성 역할을 혐오합니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를 트랜스젠더/젠더퀴어라 부르지 않습니다. 이유는 위에서 충분히 설명했으니 생략. 


여성성/남성성 규범, 고착화된 성역할은 모두를 억압해요. 그러나, 그 억압에 대해서 급진주의자들은 성역할을 타파하고 젠더 분류 자체가 문제라고 보는 입장이며, 트랜스/젠더퀴어들은 새로운 젠더의 명칭을 쓰고 의료서비스를 구입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 뿐입니다. 결국 트랜스/젠더퀴어들과 급진주의페미는 동일한 문제제기로부터 출발한 엇갈린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저는 스스로를 '시스젠더'라 부르지 않을 것이며, 또한 시스젠더 여성이 강자, 트랜스/젠더퀴어는 약자라는 프레임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원문은 2017년 4월 11일에 페이스북에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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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혜리(Hyeri Nam)

6B radical feminist,lesbian,liberal right-winger, atheist,contents 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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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저자:  Claire Hauchan 

역자:  남혜리

원제: Sex, Gender, and the New Essentialism 

원문 출처: 링크


내가 처음으로 젠더학 수강생이 되었을 때 할아버지는 나를 지지해 주었다. 내가 삶의 방향을 찾고 졸업하는 해 동안 전혀 구체화하지 않았던 가치체계를 계발하는 것에 기뻐하시면서. 하지만 그 과목에 대해선 별 생각이 없으셨다. "뭐 때문에 공부하지?" 할아버지는 물었다. "나는 얼마든지 말해 줄 수 있단다. *남성의 신체를 가졌으면 너는 남성이야. *여성의 신체를 가지면 너는 여성이지. 그 이상 뭐가 더 있을까. 그걸 알기 위해 학위가 필요하지 않단다."(*사회적 합의 때문에 할아버지와 나는 이 대화에서 자지 혹은 보지/외음부란 단어, 혹은 우리가 공유하는 다른 어떤 말도 쓸 수 없었다.) 


맨 처음 느낀 건 충격이었다. 트위터에서 젠더를 둘러싼 양극화된 담론싸움을 하는 데 꽤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소셜 미디어에서 그런 의견을 드러내면 지속적인 괴롭힘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만약 70대인 내 할아버지가 시험삼아 트위터를 시작한다면 그는 거의 항상 여성을 타겟으로 하는 폭력에서 안전할 것 같다. 할아버지는 백인 남성이니까.

다 똑같지만, 정원에 앉아 있는 듯한 편안함 가운데 의견을 듣는 건 온라인 세계의 긴장, 그러니까 여성이 잘못된 길로 들어선 페미니스트로 분류되어 결과적으로 공공의 표적이 되는 공포와는 동떨어진 세계였다. 이런 대화는 나를 젠더의 실체는 물론이요 젠더담론의 맥락을 생각하게 이끌었다. 위협은 강력한 침묵시키기 전략이다. 공포가 지배하는 환경은 비판적 사고, 공적 담론, 의견 개진에 도움이 안 된다.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할아버지는 젠더가 페미니즘 운동에서 만들어져 소위 말하는 TERF전쟁에서 분열되었다는 걸 모르는 행복한 상태이셨다.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덧붙이자면, TERF는 트랜스젠더 배제적인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를 뜻하며 젠더에 비판적이며 위계질서의 철폐를 지지하는 페미니스트 여성을 설명하고자 사용되는 약어이다. 페미니스트와 퀴어 정치학 간에 흐르는 긴장은 아마 틀림없이 젠더에 대한 접근방식의 차이가 주된 원인이다. 


젠더의 위계


가부장제는 젠더 위계와 뗄 수 없는 관계이다. 페미니즘 운동의 핵심적인 목표인 가부장제 해체를 위해선, 젠더 또한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젠더는 남성을 인간의 기본값으로, 여성을 타자로 만든다. 젠더는 여성 섹슈얼리티가 엄격히 제한되는 근원이다. 여성은 남성에게 성관계를 맺도록 허락하면 창녀라고 불리며, 거절하면 순진한 척한다는 소릴 듣는다. 남성 섹슈얼리티는 그런 식으로 판단하는 법이 없다. 젠더는 남성에게 학대당하는 여성이 ‘여자가 원했잖아’ or ‘여자가 꼬리쳤네’라며 비난받고 수치심을 느끼는 근원이다. 반면 가해자인 남성의 행동은 흔히 ‘남자는 커도 애야’ or ‘그는 정말로 좋은 사람이야’라는 말로 정당화된다. 젠더는 소녀들이 보살피고, 수동적이고, 도덕적이며, 소년에게는 권장되지 않는 특성에 가치를 부여하게끔 만든다. 젠더는 소년들이 경쟁하고, 공격적이며, 진취적이고, 소녀에게는 권장하지 않는 특성에 가치를 부여하게끔 만든다. 젠더는 결혼을 통해 아버지로부터 남편에게로 그 소유권을 넘기면서 여성이 소유물로 간주되게끔 한다.젠더는 여성이 가정적이고 감정적인 노동을 제공하도록 기대받는 이유로, 그런 노동은 ‘여자들이나 하는 일’이라 가치폄하되고 비가시화된다.

젠더는 추상적인 문제가 아니다. 영국에서 여성은 3일에 한 명 꼴로 남성에게 살해당한다. 영국과 웨일즈에서는 매년 추산 85000명의 여성이 강간당한다. 영국 여성의 1/4이 남성 파트너에게 폭행을 당했고, 1/3까지 세계적인 규모로 그 건수가 증가하고 있다. 오늘날 여성할례를 당한 20억이 넘는 여성이 살아 있다. 남성 지배질서, 힘의 불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폭력으로부터 여성을 해방시키는 일은 근본적인 페미니즘의 목표다. 페미니즘의 목표는 우리 삶에서 가능한 기준선이랍시고 젠더가 부여한 한계를 받아들이는 일과 양립할 수 없다. 

“젠더는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깨닫는 것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어야만 하는지 규정하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상상해 보세요. 젠더의 요구사항들이 우리를 짓누르지 않을 때 우리가 얼마나 더 행복해지고, 우리 개개인이 진짜 우리 모습으로 살 때 얼마나 더 자유로울까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생물학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사회화는 그 차이를 과장합니다. 그리고 나선 자기충족적인 과정을 시작합니다.” –치아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Chimamanda Ngozi Adichie, We Should All be Feminists)


젠더규범은 감옥이다. 젠더는 남성이란 성별계급의 이득을 위해 여성이라는 성별계급을 억압하려고 사회가 파놓은 함정이며, 최근 젠더를 위계질서가 아닌 정체성으로 재구조화하려는 시도가 있긴 하지만, 생물학적 성별의 중요성은 간과될 수 없습니다. 여성의 신체를 성적으로, 번식을 위해 착취하는 일은 여성억압의 본질적인 기저이다. 억압자인 남성은 지배 수단으로써 생물학을 사용한다. 생물학적 성별 이분법에 들어맞지 않는 소수자들(간성)이 존재하나, 이 사실이 구조적이고 체계적인 여성억압의 본질을 바꿀 수는 없다.


페미니스트들은 수백년 동안 타당한 근거를 바탕으로 젠더 위계를 비판해 왔다. 소저너 트루스(Sojourner Truth)가 여성성을 해체하자고 했을 때, 그녀는 흑인 여성이 규정되는 방식을 만들어내는 여성혐오와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주의를 비판했다. 그 자신의 고유한 신체적 기량과 불굴의 용기를 경험적 증거로 들면서, 트루스는 여성들이 여성성이라 불리는 특성에 의존적이지 않음을 발견했으며, 백인 여성들의 연약함이라 알려진 것을 여성스러움의 표본으로 끌어올리고자 흑인 여성 신체를 타자화하는 경향에 문제를 제기하였다. <나는 여성이 아닌가요?> (Ain’t I a Woman)는 가장 먼저 알려진 젠더 본질주의에 대한 페미니즘 비평 중 하나다. 트루스의 연설은 백인우월주의 가부장제 사회의 맥락에서 인종과 젠더 위계 사이의 상호작용을 인정한 것이다.(hooks, 1981)

시몬 드 보부아르 역시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말로 여성성을 해체하였다. <제 2의 성>(The Second Sex)에서 그녀는 젠더가 타고나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생물학적 성별에 따라 사회화하도록 역할을 부여한다고 말한다. 그녀는 이 역할의 제약, 특히 젠더는 타고난다는 젠더본질주의의 결과로 여성에게 부과된 제약을 강조하였다.  

보부아르가 관찰했듯이, 젠더 본질주의는 수 세기에 걸쳐 여성들이 공적 영역에 출입하지 못하게, 남성지배질서로부터 독립적인 삶을 살지 못하게끔 하려는 일환으로 이용되었다. 여성은 지적으로 열등하며, 날때부터 수동적이고 비이성적이란 주장은, 여성은 집에 있는 게 자연스럽다는 사상을 바탕으로 죄다 여성의 삶을 가정에 예속시키기 위해 사용되었다. 역사는 여자 뇌에 대한 주장이 참정권, 재산권, 신체 해부학, 공교육 기회를 남성들만의 것으로 유지하기 위한 가부장제의 전략이라 서술한다. 과학적으로 참이 아니란 점에 덧붙여, 여자 뇌의 존재성을 전제로 이어진 여성혐오의 긴 역사 탓에 뇌성차별주의(neurosexism)는 페미니즘의 관점과는 모순된다. 

하지만 여자 뇌 개념은 사회적 보수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진보적이라 여겨지는 퀴어/좌파 정치학에서 한번 더 지지를 받고 있다. 위계로서의 젠더에 상반되는 정체성으로서의 젠더 연구는 젠더는 타고난 것( 젠더는“머리에 있으며”사회적으로 구성되지 않는다)이라는 추정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트랜스젠더 정치학의 발전, 그리고 이어지는 여성억압의 본성(그 뿌리에 무엇이 있으며 어떻게 여성이 정의되는가)에 대한 불일치는 페미니즘 운동에서 실패하게 된다.(MacKay, 2015)


페미니즘과 젠더 정체성


트랜스젠더는 개인이 자신의 젠더가 생물학적 성별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이해하는 개인의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말이다. 예를 들어, 여성의 몸으로 태어나 남성으로 자신을 정체화하는 사람은 트랜스남성이라 불린다. 남성의 몸으로 태어나 여성으로 자신을 정체화하는 사람은 트랜스여성이라 불린다. 트랜스젠더가 된다는 건 호르몬 대체 요법과 성별 재지정 수술을 포함해서, 어쩌면 의학의 도움을 필요로 할 수 있는 일이다.그러나 트랜스 하위영역에 포함되는 65만명의 영국인 중 집계상 3만명 남짓만이 수술/의학적 트랜지션을 거친 상태이다.  

트랜스젠더란 단어는 애초에 남성으로 태어나 여성으로 정체화하는 사람들 혹은 그 반대의 경우를 설명했으나, 지금은 젠더 비순응성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정체성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트랜스젠더는 논바이너리 정체성(남성도 여성도 아닌 성으로 정체화하는 사람), 젠더플루이드(한 개인의 정체성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뀔 수 있거나 그 반대), 그리고 젠더퀴어(남성성과 여성성 둘 다로 정체화하거나/정체화하지 않는 개인)을 포괄한다.

트랜스젠더의 반대는 시스젠더로, 생물학적 성별과 부여된 성역할이 일치함을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된다. 퀴어 담론은 시스젠더인 사람들은 억압자, 트랜스젠더인 사람들은 피억압자로 위치시키며 시스젠더를 특권층으로 만든다. 트랜스젠더인 사람들이 소외된 집단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어떻게 소외되는가에 대한 이해에서 시스 남성과 여성 간 일말의 차이도 서술하지 않는다. 트랜스여성 살인자들이 저지르는 남성 폭력은 꾸준히 발생하며, 이러한 남성 폭력은 “…문화적으로 유지된 남성권력과 남성성 규범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남성의 필요”의 산물이라고 주디스 버틀러가 밝힌 하나의 비극적인 양상이다.

퀴어이론의 시각에서 젠더는 성별계급과는 반대로 개인이 정체화하는 것이다. 개개인이 속하는 성별 계급은 개인이 가부장제의 억압으로 소외되는 쪽에 속하는지 혹은 그로 인해 이득을 보는지를 좌우한다. 이 관점에서 퀴어 정치학은 근본적으로 페미니스트 분석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퀴어이론의 틀은 젠더를 마음에 있는 것으로, 그러니까 위계질서가 아니라 스스로 정의한 정체성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둔다.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젠더는 가부장제가 성별 계급 간에 만들어 놓은 구조적인 힘의 불균형을 영속시키는 하나의 방법으로 여겨진다.

“당신이 억압의 축으로서 생물학적 성별의 물질적 실체 혹은 그 중요성을 깨닫지 못한다면, 당신의 정치적 이론은 가부장제에 대한 어떤 분석에도 들어맞지 않는다. 역사적이고 지속적인 여성의 복종은 우리 중 일부가 열등한 사회적 역할로 정체화하길 선택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고 치면 어처구니없는 피해자 비난하기가 된다) 아이를 잉태하고 성적/재생산 노동을 착취하는 게 가능한 인간의 절반을 남성들이 지배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발생했다. 우리는 여성 생물학의 실제와 생물학적 여성 계급의 존재성을 인식하지 않고선, 가부장제의 역사적 발생과 지속적인 성차별, 문화적 여성혐오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 – 레베카 레일리 쿠퍼, <섹스와 젠더에 대한 나의 생각> (Rebecca Reilly-Cooper, What I believe about sex and gender)

퀴어이론은 후기구조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나온 것이기에, 정의에 따르면 체계적 억압에 대해 결합력 있는 구조적 분석을 제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엇보다도, 만약 물질 자신이 개인이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을 임의로 결정한다면, 어떤 정치적 계급으로도 이해할 수 없다. 퀴어이론은 구조적 억압이 어떻게 개개인이 정체화하는지와 관련이 있는지 밝히는 데 실패하였다. 정체성으로서의 젠더는 지배의 매트릭스에서 벡터값이 아니다.(Hill Collins, 2000) 개인이 특정한 성역할로 정체화하는지 아닌지는 가부장제에서 개인이 어떤 위치에 있는가와는 관계가 없다.


'시스'의 문제


시스는 당신이 태어날 때 지정받은 젠더로 정체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별 특성에 기반한 성역할 지정은 여성을 복종시키기 위한 가부장제의 장치이다. 특정한 방향으로 발달하게끔 젠더가 부여한 한계는 가부장제가 가장 처음으로 아동의 삶을 조종하는 방식으로, 특히 소녀에게 해를 끼친다. "여성은 날 때부터 그 억압에 적합하며, 남성은 날 때부터 우리에 대해 권력을 휘두르기 적합하다" 본질주의 뒤에 여성이 억압의 수단으로 자신을 정체화한다는 가정은 이러한 신념에 기반해 있다. 다시 말해, 여성을 '시스'로 분류하는 건 여성혐오다.


성별 계급으로서의 여성억압은 퀴어이론의 포스트모던한 렌즈를 통해 특권으로 재포장되었다. 그러나 여성에게 '시스'가 되는 것은 특권이 아니다. 세계적으로 남성 폭력은 여성이 죽는 주된 원인이다. 페미사이드가 풍토병인 세상, 1/3의 여성이 남성폭력을 경험하는 세상에서 여성으로 태어난다는 건 특권이 아니다. 여성의 몸으로 태어난 사람이 특정한 성역할로 정체화하는지 여부는 그녀가 여성할례의 대상이 되는가, 임신과 출산 문제로 산부인과에 가는가, 월경한다고 추방당하는가와는 관련이 없다.

개인이 정체화하는 방식의 본질적인 기저가 되는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시스젠더란 꼬리표는 여성이 가부장제에서 어떤 위치에 놓이는가와는 거의 관련이 없다. 여성의 몸으로 사는 걸 특권으로 만드는 건 가부장제 사회의 사회정치적 맥락을 완전히 무시하는 일이다.

가부장제에 저항한 사람들이 막대한 비용을 치르면서 성과를 거두었으므로, 여성인권을 위한 투쟁은 길고 어렵다고 알려져 왔다. 그리고 그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2물결 페미니즘이 일궈낸 여성인권 인식의 중요한 진전은 필연적으로 사회정치적인 반동과 마주하게 되었다. (Faludi, 1991) 그 반동은 여성이 합법적으로 임신중단과 다른 재생산 의료복지를 누릴 권리가 유럽과 미국을 가로지르는 주류 보수주의 파시즘 때문에 위기를 맞이함에 따라, 현재 반복되고 있는 패턴이다. 인종, 계급, 장애, 그리고 섹슈얼리티의 교차점 역시 여성에게 가해지는 권력을 구조화하는 방식을 규정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포괄성이라는 이름 하에, 여성은 스스로를 정의하고 여성으로서 경험하는 억압에 도전하기 위해 필요한 언어를 빼앗겼다. 임산부는 임신한 사람으로 바뀌었다. 모유 수유는 수유(chestfeeding)로 바뀌었다. 여성 생물학을 언급하는 일은 일종의 편견적 행위가 되었으며, 이는 도덕률을 깨지 않고 직접적으로 재생산, 출생, 모성의 정치학을 언급할 수 없게 만들었다. 게다가, 생물학적 성에 대한 모든 것을 중립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일은 여성이 성별 계급으로서 억압당한다는 것에 대항할 수 없게끔 한다. 여성의 신체를 지워서는 젠더가 여성을 억압하는 방식을 바꾸지 못한다.

퀴어 이론의 틀은 트랜스젠더로 정체화하는 사람들을 확실하게 젠더 담론의 당사자로 놓는다. 결과적으로 젠더는 여성억압의 근본적인 역할을 하는 위계질서임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스트들이 피하고자 하는 주제가 되었다. 당연하게도, 표백제를 마시라든가 불에 타 죽으라는 도발은 효과적인 침묵시키기 전략이 되었다. 반대의견을 억누르기 위한 수단으로, 여성폭력은 농담인지 위협인지 불분명하게 언급된다. 이런 방식의 가해는 피억압자가 억압자에 대해 분노를 표출하는 “주먹으로 때려”랑 똑같이 취급할 수 없다. 아무리 좋게 쳐줘도 수평적 적대감[각주:1]이고, 최악의 경우 여성에 대한 남성 폭력의 정당화다.(Kennedy, 1970)

퀴어정체성 정치학은 여성이 성별계급으로 억압받는 방법을 설명하지 못했고 때때로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해방의 정치학에 대한 이런 식의 선택적 접근은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다. 젠더를 비정치화하고, 젠더가 만들어내는 힘의 불균형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건 누구에게도, 적어도 모든 여성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젠더의 폐지만이 젠더가 정해놓은 제약으로부터 해방을 가져다줄 것이다. 젠더의 속박은 자유를 추구한다는 미명 하에 다른 목적으로 탈바꿈할 수 없다. 


참고문헌


Simone de Beauvoir. (1952). The Second Sex
Susan Faludi. (1991). Backlash: The Undeclared War Against American Women
Cordelia Fine. (2010). Delusions of Gender
bell hooks. (1981). Ain’t I a Woman?
Florynce Kennedy. (1970). Institutionalized Oppression vs. the Female
Finn MacKay. (2015). Radical Feminism
Chimamanda Ngozi Adichie. (2014). We Should All be Feminists
Rebecca Reilly-Cooper. (2015). Sex and Gender: A Beginner’s Guide
Sojourner Truth. (1851). Ain’t I a Woman?







  1. 수평적 적대감(Horizontal hostility)은 1970년대부터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운동에서 내분과 파벌주의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해 온 용어이다. 소집단들은 협력하기보다는 서로 저격한다. 수평적 적대감의 예시로, 미국에서는 청각 장애인이 미인대회에서 ‘미스 아메리카’에 당선되자 뜻밖에도 청각장애인 활동가들은 ‘미스 아메리카’에 대해 반대하였다. 그녀가 수화를 하지 않고 말을 했기 때문에 '청각장애로 보기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한 피부색이 비교적 옅은 흑인 여성이 미국에서 저명한 대학의 법학교수가 되자 흑인학생회(Black Students Association)에선 충분히 검지 않다고 임용을 반대하였다. -Judith B.White, Ellen J.Langer. (1999) Horizontal Hostility: Relation Between Similar Minority Groups. Journal of Social Issues, Vol.55, No.3, pp 537-55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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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혜리(Hyeri 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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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가 쓴 유명한 페미니즘 고전 <제 2의 성The Second Sex>에 관해 간략하게 소개하는 영상이다. 그녀는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젠더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기 이전에 이미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여성이란 개념을 선취하였다. 보부아르의 여성에 대한 이해는 많은 페미니스트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이후 크게 사회에서 부정적으로 해석해 왔던 여성성을 긍정하고 이를 강조하자는 페미니스트들과 여성성 규범 자체는 억압이고 만들어진 것이므로 이를 해체하자는 페미니스트들로 분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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