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은 수도 없이 이런 메시지를 보고 듣는다. 예쁘게 꾸미라고, 다이어트 하라고, 성형하라고, 얌전히 있으라고, 남자한테 잘 보여야 한다고, 좀 웃고 사근사근하게 사람 대하라고... 

"여자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그 여성성을 열심히 수행했을 때 만들어지는 건 인형의 모습이다. 보기 좋고 순종적이며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않는 인형. 그저, 남자에게 사랑받으면 그만이고 이를 위해 존재하는 인형.


이 사회는 그런 인형들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인형의 집' 안에 살고 있다. 인형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그 인형의 집에서 뛰쳐나와야 한다. 그러나 인형의 집에서 나가는 건 쉽지 않다. 인형의 주인이 붙잡고 다른 인형들이 붙잡기 때문에. 나가려면 그 손을 뿌리치고 문을 박차야 한다.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밖에 나가면 위험할거라고 주인도 경고하고 다른 인형들도 경고한다. 이미 주인은 인형의 집을 자유롭게 들락날락할 수 있지만 밖에 나가려는 인형에게는 꼭 그런 경고를 한다. 주인은 밖이 궁금하다면 시간을 정해 놓고 '함께' 동행하자고 회유하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많은 인형들이 그런 경고에 발길을 돌리고, 타협안을 받아들인다. 애써 경고와 회유를 뿌리치고 나온 인형은 사람이 되고 싶지만 바깥은 그 주인들의 세상인지라 다시 인형의 집으로 돌아가고픈 유혹에 빠진다. 그러나 자신과 같은 인형을 만나면 그 자체만으로 힘을 얻기에, 인형의 집을 나온 인형들은 모여서 자신의 존재를 집 안에 있는 인형들에게 알리기로 했다. 주인이 어떻게 인형들을 속이는지도. 인형의 집은 튼튼한 것처럼 보인다. 이 집이 언제까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밖으로 나온 인형들은 유혹과 싸우면서 인형들을 계속 빼돌리겠지. 집이 무너질 때까지

집 나온 인형은 집 안에 있는 인형에게 희망이 된다. 주인도, 타협한 인형도 온전한 자유를 가져다주지 못하며 오로지 집 나온 인형만이 희망이 된다. 코르셋을 벗은 여성, 코르셋을 거부해온 여성만이 다른 여자들의 코르셋을 풀어줄 수 있다. 

#코르셋
#알을_깨고_나와야_새가_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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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혜리(Hyeri Nam)

6B radical feminist,lesbian,liberal right-winger, atheist,contents 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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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낙태죄'폐지 문구



  1. 포궁은 남성과 구별되는 여성의 신체 일부이다. 정작 퀴어들도 자신이 생물학적 여성임을 설명하고자 피메일바디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가? 왜 포궁에서 일어나는 현상인 임신과 출산 문제를 '여성의 일'로 바라보지 않는가. 남자도 임신을 할 수 있다고? 그건  ftm이 자신의 포궁으로 임신을 한 경우이다. 생물학적 남성이 임신과 출산을 경험했다는 이야기는 아직 들어본 적이 없다.

  2. 그리고 임신과 출산이 여성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임신중단권은 여성의 문제이다. 임신중단권을 보장받지 못해 스스로 낙태하다 죽는 사람도 여성이고,억지로 출산한 후 학습권을 사실상 빼앗기는 학생도 여성이고, 불법시술로 돈 들이고 후유증 경험하는 사람도 여성이고, 법을 어겼다고 처벌받는 사람도 여성이고, 아이를 키울 여력이 안 되어 출산 후 버리고 도망갔을 때 비난받고 처벌받는 사람도 여성이고, 태교를 신경쓰는 사람도 여성이고, 행자부가 애 낳으라고 가임기 지도에 찍어놨던 그 핑크색 점들 다 여성이다. 당신을 낳은 사람의 성별은 여성이다.

   이렇듯 명백히 여성들이 경험하는 문제, 여성의 관심사를 왜 모두를 위한 일이라고 말하나? 그건 여성의 집단서사를 희석시킨다. 임신중단권은 humanism의 의제가 아니라 feminism의 의제다.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건 "Black lives matter"를 "All lives matter"로 말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그러면 임신중단이 누구의 관심사인지 핵심을 흐려놓지 말고, 여성들이 겪는 경험을, 우리의 권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가면 된다. "여성들만의 개인적 경험"으로 비춰질까 염려해서  무리수 쓰지 말고.이미 우리는 "여성의 권리가 인권이다"라는 좋은 구호를 알고 있지 않아? 그동안 남성들의 권리 =인권이었고 여성의 경험이 개인서사로 취급되었으니, 여성의 권리 역시 그만큼 중요하고 그러므로 여성의 목소리에 주목하자는 확실한 구호잖아.

  그리고 포궁을 적출한 여성이나 불임여성은 당사자가 아니라는 소리 하지 말고. 월경을 시작하지 않은 여자아이라도 임신과 출산을 인생 플랜의 한 부분으로 생각한다. 완경을 한 여성은 사회의 결혼 프레임,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하에서 억압당한 여성이다. 포궁을 적출한 여성 역시 임신하지 못한다고 프레임 안에서 억압당한다. 여성들은 임신과 출산에 대해서도 일원화된 경험이 아니라 다원적인 경험을 하고, 그래서 공감하고 이어질 수 있는거라고. 연대의식을 말하면서 왜 여성들 간에 임신과 출산에 대한 경험으로 이어진 자매애를 부정하는가.

원문은 2017년 9월 26일 필자의 페이스북에 게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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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혜리(Hyeri 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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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서는 3물결 페미니즘이 대세이다. 물론 엠마 왓슨 등 유명인사들이 미디어를 통해 홍보하고, 출판시장에 3물결의 관점을 반영하는 책들이 넘쳐나는 등 광고와 미디어의 탓도 있고, 아마 최신의 담론인 탓에 이를 빠르게 따라잡고자 하는 경향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왜 하필 대중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수용된 것이 3물결 페미니즘인지를 서구와는 다른 한국의 특수성으로 설명하고, 이런 과 비평하려고 한다. 그 특수성이란 전체주의에 대한 반동과, 식민지 남성성이 곧 3물결을 대세로 만든 원인이다. 참고로 후자의 경우는 특별히 자유주의 진영의 남성 페미니스트들에 초점을 맞춰 써보도록 하겠다.


개인주의의 확산



  집단의 규모를 막론하고 우리 사회에는 전체주의적인 분위기가 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사회성, 외향적 성격'을 강요당했다. 내향적인 성격은 사회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사회성이 부족하고, 눈치가 부족하단 말은 정상적이지 않음을 의미한다. 직장인 중 1/3이 왕따 경험이 있을 정도로 왕따가 빈번함에도 불구하고, 왕따가 왜 생기는지에 대한 합리적인 의문 없이 "그럴 만하니까 당하겠지" 라면서 서슴없이 2차가해하는 분위기가 있다. 


 의사결정 방식으로는 다수결 외의 의사결정방식을 거의 접해보지 못한 채 집단 내에서 소수인 개인의 목소리가 지워지는 경험을 한다. 이와 같은 분위기는 공동체를 위해 개인의 자율성을 박탈하고, 다른 의견을 수용하지 않는다. 문제제기를 하면 "프로불편러", "예민하다"라고 낙인을 찍는다. "다른 사람들은 상관없다는데 왜 너만 그래?"라면서 입막음을 한다.

  

  수평적인 조직문화보단 위계가 분명한 수직적 조직문화, 군대문화를 모방한 형태가 곳곳에서 드러나며, 또한 내부고발자를 입막음하고 2차가해하는 분위기가 존재한다. "집단의 명예"는 개인의 양심적 선언보다 우선시된다.

  

  이런 분위기를 대체로 수용했던 모부 세대와는 달리, 현재의 10대,20대의 경우에는 폭력적인 전체주의 문화에 대한 반동으로 개인주의가 널리 확산되었다. 또한 개인의 자율권이 강조되면서 취향 존중과 표현의 자유란 말은 정말 많이 사용되고 있다. 즉, 기존의 공동체주의 가면을 쓴 전체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개인의 자유를 확대하려는 분위기가 확산되었고, 이런 사회적 요구는 3물결 페미니즘의 관점과도 겹친다. 


  "개인의 자유를 확대한다는 것". 이 말은 억압되어 있던 여성들에게는 일종의 해방구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너는 화장을 안 해도 되고, 너의 섹스 요구를 거절해도 되고, 여성스럽지 않아도 되고, 다자연애든 연애를 안 하든 자유롭게 사랑하고, BDSM 등의 성적 실천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개인이 자율적으로 욕망을 표현할 권리만을 주장할 뿐, 욕망이 어떠한 사회적 맥락을 가지는지에 대해선 크게 관심이 없다. 여성들에게 "너에겐 더 많은 선택지가 있어"라고 말하며, 그 선택지에 대해선 책임을 묻지 않는다. 


  또한 페미니즘 분야의 베스트셀러이자 입문서로 추천받는 <나쁜 페미니스트>에서 저자는 "페미니스트는 완벽할 필요가 없어.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말한다. 물론 핑크색을 좋아하고, 화장을 좋아할 수도 있다. 수동적인 성격일 수도 있고, 성애화된 아이템을 못 잃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은 개개인이 자신의 성격이나 취향을 구조적인 차원에서 반성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러니까 이게 코르셋이라도 아무도 내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검열하지 않잖아? 뭐가 문제야?" 라고. 


  분명히 이런 자유주의 페미니즘에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한국에서 자유주의적인 노선은 급진주의 계열과 동일하게 "문제제기할 권리"를 이야기했으며, "프로불편러"에 "프로둔감러"라고 맞받아치도록 권장하며 여성의 목소리낼 권리를 응원했다. 또한 우리는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몸의 자기결정권을 이야기하며 "내키는 대로 섹스를 할/거절할 권리"와 "임신중단권"논의를 함께했다. 


  그러나 이런 자율성 추구는 개개인의 자율적인(제재 없는) 페미니즘 실천의 형태로(소위 말하는 100가지의 페미니즘) 이어졌고, 무엇이 페미니즘적이다/아니다란 논의를 검열로 취급하며 막았다. 이는 현재진행형인 로리타 논쟁과 젠더 논쟁의 양상만 관찰해도  확인할 수 있다.


  로리타 논쟁에서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의 욕망(즉, 로리타 스타일링)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표출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논의할 때 욕망을 검열한다며 급진주의 계열의 페미니스트들에게 "성적 보수주의자"라는 낙인을 찍고 "역코르셋"이라 반격했고,  로타, 아이유, 설리의 파급력은 인정하나 개인의 소비가 가져올 수 있는 영향력에 대해 간과, 축소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이와 같은 내로남불은 결국 개인의 "자율적 선택권"만을 최우선시하는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젠더 논쟁 역시 동일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우리는 성기를 중심으로 지정성별이 부과되었고, 그 지정성별로 인한 차별은 (그 양상에는 차이가 있으나)문화와 역사를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유지, 재생산되어 왔다. 또한 여성/남성이라는 이원화된 분류에는 여성성/남성성이 부과되었으며, 이 여성성/남성성이란 신체적으로는 자신의 1,2차성징과 연결되고 정신적으로는 성역할, 성별 고정관념과 연결된다. 


  사실 트랜스/젠더퀴어들이 고통받는 것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지정성별에 부여된 여성성/남성성이란 의미 때문이다. 그러나 젠더 폐지론자들이 "성역할을 재생산하니까 지정성별로부터 여성성/남성성이란 구분을 소거하자!"라고 말한다면, 트랜스/젠더퀴어들은 "지정성별이 여성성/남성성이라는 굴레를 씌우고 이게 나를 설명하지 못하니까 아예 새로운 성별로 나를 정의하자! "라는 차이점이 있다. 따라서, 후자를 지지하는 것은 결국 "개인이 성별을 자유롭게 정의하고 선택할 권리"를 지지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는 결국 로리타 지지자들과 마찬가지로 구조적 맥락이 결여된 채 여성성/남성성과 지정성별의 연결고리를 그대로 남겨두는 일이다.


  자율성 추구라는 말은 좋다. 그러나 개개인의 무제한적인 자유만을 요구하며, 이에 반대하는 일을 무조건 검열로서 낙인찍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욕망을 왜 법이 가로막는가? 살인이 사회적으로 용인된다면 어떤 영향을 미칠지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소아성도착증은 왜 금기시되는가? 성인-아동 간에는 명백히 권력차가 존재하며, 아동이 애정표현과 성희롱, 성폭력을 구분하기 어렵고, 사랑이 어떤 형태인지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았으며, 아동성범죄의 처벌 수위가 약하다는 것이 현실이다. 이를 도외시한 채 "소아성애"가 사회적으로 용인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 개개인은 욕망한다.  그러나 욕망이 어떤 방식으로 표출되어야 하는지, 나의 욕망이 용인될 때 사회적으로 어떠한 영향력을 미칠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며 어느 순간에서는 스스로를 규제해야만 한다. 검열이 불편하게 느껴지는가? 사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이미 우리는 욕망과 도덕적,윤리적 규범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자아에 의해 현실적이며 대개 책임질 수 있는 방식으로 욕망을 표현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책임질 수 없는 자유는 방종이며, 자신을 독립된 개인으로만 바라보는 일은 구조를 무시하는 것이다.


자신을 피해자화하는 남성들


  한국 남자의 남성성은 "식민지 남성성"이다. 역사적으로 한반도는 늘 외국의 침략과 간섭에 왔고, 남성들은 자신의 영토와 자원을 빼앗기고 외국의 지배를 받아 자신의 남성성이 불완전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한남들에게 이 불완전한 남성성은 "마땅히 보완해야 할 것"이 되었고, 이 때 보완해주는 주체는 자국민 여성이다. 즉, 한남에게 한국 여성들은 끊임없이 '기를 세워주고, 가치를 확인받아야 하는 대상'이며, (이성애자의 경우) 성적 욕망을 충족시켜줘야 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남들에게 모자란 남성성을 채워주지 않는 여성들은 '특권층'이며, 자신의 남성성을 위협하는 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벌좋고 능력있는 여성,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여성, 비혼 여성, 그 외 성역할을 거부하는 여성..등등은 후려치기의 대상이 된다. 


  또한 한남들은 남성성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자신을 피해자화하는 경향이 있다. 다들 잘 알겠지만, 이런 경향은 "역차별"과 "군대와 생수통 타령"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더구나 이들은 대체로 집에서 오냐오냐 보호받으며 자랐기 때문에 자기중심적인 성향도 강하게 나타난다. 상당수의 한남이 역차별과 군대 타령에서 그치지 않고 여성들이 당하는 차별에 대해서는 그 정도를 축소하거나, 묵인하고 더 나아가 차별을 정당화하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이런 식민지 남성성과 3물결이 대세가 된 것에는 어떤 연결고리가 있을까? 바로 3물결의 주요 키워드인 "맨 박스"와 "교차성 담론"에서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다. 


  우선 맨 박스가 어떻게 그들의 식민지 남성성과 연결될 수 있는지 살펴보자. 맨 박스란 쉽게 말해 가부장제 하에서  '남성도'피해자가 된다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지금 각광받고 있는데, 실제로,  <맨 박스>라는 이름으로 한 권의 책이 나왔고, 벨 훅스의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역시 맨 박스를 소개하고 있다.  남성 페미니스트들이 남성들을 설득할 때 백이면 백 써먹는 개념이 바로 '맨 박스'이다. 


  확실히, 그동안 가부장제라는 틀 아래 여성만 차별의 대상이 된 것은 아니며 분명히 맨 박스는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 있다. 맨 박스를 만들어낸 건 남성이다. 호모소셜 사회에서 '남성성'을 갖지 못했다고 여겨지는 남성들(ex: 게이 남성)은 여성성/남성성이라는 이분법 하에 '여성적인' 존재로 간주되었다. 기존 남성 사회에서  '여성적인' 남성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여성 억압의 구조를 유지하는 데 방해가 되었으므로 그들은 차별의 대상이 되었고, 이는 곧 지정성별 남성들에게 남자다움을 요구하는 맨 박스로 굳어졌다. 다시 말해, 맨 박스라 함은 여성이란 노예를 지속적으로 착취하기 위해 주인 노릇을 하던 남성 집단이 치르는 기회비용이다. 즉, 맨 박스도 결국 여성혐오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더구나 이 맨 박스라는 개념을 실제로 뜯어보면 "오빠가 허락하는 페미니즘"일 뿐이고,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지 않는 한남들조차 이를 열심히 이용해먹는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남성은 젠더 권력의 가해자이며 기득권자이나, 3물결의 담론에선 자신 역시 피해자이므로 한남들은 페미들에게 당당하게 자신의 밥그릇도 챙겨 달라고 할 수 있게 된다. 한남들은 더 나아가  이를 "진정한 페미니즘"이라 찬양하거나, 여성만 피해자가 아니고 성 평등을 지향하는 거니까 "젠더 이퀄리즘"이라 부르자고 이야기한다. 즉, 이들에게 "맨 박스"란 자신의 식민지 남성성을 교묘하게 실드치면서 스스로의 가해자성을 지워버리기 위한 좋은 수단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한남들이 이용하기 가장 좋은 것은 교차성 이론이다. 본래 교차성 이론은 기존의 여성운동이 서구 중산층 백인 여성들 위주이며, 중층의 약자성을 가진 여성들을 포용하지 못한다는 문제제기로부터 나왔다. 확실히 중층의 약자성을 가진 여성들의 경험은, 그 약자성들을 칼로 무 자르듯이 완벽하게 분할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빈곤하여 직업 교육기회를 누리지 못해 성매매를 하게 된 여성으로부터 계층 문제와 여성성 착취를 각각 따로 분리해낼 수 있을까? 레즈비언의 섹스를 신기해하며 가위충이라 낄낄대는 것은 여성혐오인가, 성소수자 혐오인가? 아마 분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교차성은 "중층의 약자성을 가진 여성의 경험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약자와 연대해야 한다"로 이어지면서, 연대주의로 나가는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3물결에선 남성 역시 가부장제의 피해자란 관점이 깔려 있으므로,  연대의 대상은 생물학적 여성만을 포함하지는 않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남들의 식민지 남성성이 발현된다. 


  한국에서 남성들은 이 교차성 이론을  '고통을 줄세우는'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들은 대체로 자신의 약자성을 이야기하면서(약자성이 없는 경우엔 맨 박스를 사용한다) 스스로를 피해자화한다. 정확히 '여성들보다' 내가 더 피해자라고 이야기하며 여성을 아득바득 기득권자의 위치에 세워두는데, 더 나아가면 자신의 약자성을 이용하여 여성혐오를 정당화하기까지 한다. 


  우선, 자신의 약자성을 말하며 여성을 굳이 기득권자의 위치에 세우려는 풍조에 대해 논의하겠다. 아주 대표적인 예시로, 게이 남성과 이성애자 여성(※둘 다 트랜스가 아닌 경우로 가정)을 놓고 억압배틀을 벌이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겠다. 이 때 게이 남성은 자신이 성별권력에선 여성보다 강자이나 성소수자이므로 동시에 여성보다 약자이며, 종종 여성인권보다 동성애자 인권이 더 낮다고 언급하면서 여성을 권력자로 상정한다. 이는 지극히 무례한 일인데, 두 경우 모두 살아본것도 아니면서 약자성의 서열을 매기는 것은 상대의 경험을 배제할 수 있고, 여성을 기득권자에 위치시키려 할 때 디폴트를 이성애자 여성으로 잡음으로써 성소수자인 여성은 그대로 존재가 지워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무의미하다. 고통을 줄세워서 뭘 얻을 수 있지? 내가 더 약자임을 확인받으면 고통이 없어지나?)


  또한 약자성을 이용해 여성혐오를 정당화하는 케이스, 이 역시 대단히 골치아픈 문제이기도 하다. 


  여성들은 상대적으로 배려라는 이름의 감정노동과, 더 많이 이해할 것을 요구받았고 이들은 그동안 각종 약자 운동에 남자들보다 더 많이 참여하고 연대해 왔다. 그런데, 바로 이런 지점을 알고 여성에게 접근하거나 여성혐오를 하는 남성들이 있다. 이들은 성별 권력에서 자신은 강자일지 모르나, 다른 층위에서는 자신이 약자임을 내세우면서 "약자들끼리의 연대"를 당당히 요구하며 여성혐오를 한다. 그러나 여성은 이를 지적할 수 없으며, 지적해도 "여자도 무슨무슨혐오 하잖아", "그래서 연대 안하겠다는 거야? 우리 혐오하겠다고?"라는 논점흐리기 답변만이 주로 돌아왔을 뿐이다. 


   물론, 여성도 소수자혐오 한다. 이를 부정할 생각은 당연히 없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반응들은 결국 여성혐오에 대해 전혀 반성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한남들이 "남자도 성범죄 당하는데요!"라고 말 돌리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또한 교차성 이론으로 여러 약자성을 가지고 개개인의  경험을 통합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면, 어째서 약자성을 갖는 한남들에게서는 굳이 "약자성"과 "여성혐오"를 분리해내려 하는지. 식민지 남성성이 한남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된다면, 그 한남 호모소셜 가운데서도 더 남성성이 부족하다 취급되었기 때문에 이것이 여성혐오로 이어질 수 있다는 해석은 왜 나오지 않았는가? 답은 정해져 있지 않은가, 이런 해석이 결국 '분리주의'를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남성들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듯 3물결 페미니즘의 일부 담론은 한남들의 식민지 남성성을 교묘히 숨기는, 그러나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맨 박스는 남성들 역시 가부장제의 피해자라 이야기하며 그들이 특권층이라는 위치로부터 책임을 회피할 여지를 주었고, 교차성 이론과의 결합은 이들이 소수자로서 '여성보다' 약자이며, 마땅히 연대해야 할 존재로 만들었다. 3물결의 담론 하에서, 남성은 불편하지 않다. 또한, 불편하지 않기 때문에 지지하기도 한다. 물론 노선을 정하는 데 다른 이유들도 있을 수 있겠으나, 그 '불편함' 이 근본적인 한 가지 이유가 아니라면, 왜 급진주의를 말하는 남성은 사막에서 바늘 찾듯이 안 보일까?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론의 취지는 둘째치고, 이것이 과연 누구를 위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검토해보아야 한다. 한남들이 가해자성을 숨기고, 여성을 외려 기득권자로 올려놓는 페미니즘은 어떻게 가부장제의 체제를 뒤흔들 수 있는가?




원문은 2017년 4월 18일,19일에 페이스북에 두 부분으로 나누어 처음 게시하였습니다. 

1부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198875770615618&id=100014795893804

2부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199633973873131&id=100014795893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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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혜리(Hyeri 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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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미니스트로 살다보면 여러 일이 겹쳐 힘들고 지쳐서 모든 걸 내려놓고 싶단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한편으론 나 살자고 떠나는 것 아닌가, 방관자가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양가감정을 느낀다. 아마 이런 감정은 나만 느끼는 게 아닐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계속 빚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보다 앞서 싸웠던 페미니스트 대장님들에 대해서, 앞장서서 문제를 공론화하는 총대들에 대해서, 신상을 까고 당당하게 활동하는 사람들 등등...

부채감을 느끼는 건 지극히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첫째, 우리는 여성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면 안 된다'고 그건 '이기적'이란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주입당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둘째. 여성 문제는 나의 일이기에, 당신의 일이기에, 그리고 우리의 일이기 때문에.

그러나 당신이 쉬는 것에 대해 굳이 미안해할 이유는 전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임을 깨닫고 페미니스트가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여성대상범죄를 당하지 않을 권리, 여성으로서 목소리를 낼 권리, 직장에서의 생존권 등이 내가 찾아야 할 권리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의 생존 문제로부터 시작한 투쟁이기에, 생존을 보장받을 수 없는 운동은 말이 안 된다. 나의 물질적 자원, 정신적 자원 등을 털어넣는 것도 나의 생존이 보장되었을 때 가능한 일이다. 당장 싸우는 다른 사람들에게 미안해하는 마음은 십분 이해하지만, 당신의 생존이 우선이다.

휴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재충전의 시간이며, 현생을 챙기는 건 당신의 생존을 위한 일이다. 그리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휴식이 필요하며 아무도 그걸 욕하지 않는다. 당신이 잠시 내려놓을 동안에도 다른 이들은 싸우겠지만, 반대로 당신이 싸울 때 누군가는 쉬고 있지 않겠나. 그러니 '쉰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으면 한다. 


기억하자. 개인의 생존이 우선 보장될 때 운동도 할 수 있다. 그리고 본인의 감정을 부채감, 미안함으로 해석하지 말고 차라리 자매애로, 고마움으로 해석하자. 부채감으로 운동하게 되면 의무적인 '일'이 된다. 하지만 우리는 누군가 시켜서 이 일을 시작한 게 아니잖아?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수 차례 차별적인 기사 제목들을 보거나, 시선폭력을 당하거나, 혹은 존나 빻은 말들을 접하면서 분노하겠지. 그 분노로 우리는 행동하지만 그건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이 개돼지들,국산남 다 재기해 욕을 내뱉으면서 감정을 소모하겠지. 그러나 길게 보자. 어찌되었든 우리는 사소하지만 변화를 목격했고, 그 변화의 가능성을 믿기에 이 일을 하는 게 아닌가. 그 과정에서 기력을 다 소모하지 않도록 때로는 쉬면서, 그러나 페미니즘의 시각을 잃지 않고 다시 돌아오길 반복하면서, 어제보다 한 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기를.


P.S. 메갈리아 사이트가 나오고, 넷페미들이 등장한 지 이제 2년입니다. 어쩌면 오래 전부터 활동하신 분들께는 2년이라는 이 기간도 귀엽게 보이고 '벌써 힘들다고 하냐'라고 말을 얹고 싶어지실 수도 있겠네요. 그래요, 서양은 여성운동의 역사가 150여 년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여성차별이 존재하고, 남자들에 의해 여성이 살해당하고, 성산업에서 착취당하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 2년 새에 여초 커뮤니티에서 많은 사람들이 한남이라고(이제는 줄쓰큰이라고) 6.9라고 되받아치는 언어를 사용하고,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도 큰 성과겠지요.

  그러나 본문에서 말했듯이 오늘도 우리는 여성혐오를 피부로 느낍니다. 제도적 차원에서 나아갈 길도 멀고, 인식이 많이 변했다지만 남자들의 반발은 여느때보다도 더 심해졌습니다. 단순히 페미니스트 굿즈를 들고 나가는 것만으로도 몰카의 위협에 노출되기 쉽고, 본인의 신상을 내걸고  페미니즘을 한다는 건 어쩌면 자신의 직장, 사회적 관계마저 위협받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건 성질이 급하고 자시고를 떠나서 실존하는 위협이기 때문에 우리는 분노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면서도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견고한 남성카르텔에 좌절하고 지치기도 합니다. 

  이 글은 제 자신을 포함하여 그렇게 자신의 자리에서 싸우다 지치는 사람들을 위해서 보내는 소소한 위로고 격려입니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자신의 자리에서 타오르는 이들을 위해, 그 불이 다 타서 꺼지지 않기를 바라며 쓰는 글입니다. 지치고 힘들 때 쉬세요. 그것은 방관도 아니고, 나약함도 아니며, 다만 재충전일 뿐입니다. 당신이 없는 그 자리에서 우리는 싸우고 있을 것이며, 회복하거든 당신이 서 있는 그 자리에서 목소리를 내 주세요. 내가, 그리고 이미 싸우는 페미니스트들이 당신과 함께 서겠습니다.

I'm willing to stand with you, in sisterh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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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혜리(Hyeri Nam)

6B radical feminist,lesbian,liberal right-winger, atheist,contents 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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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글에서, 퀴어 페미니스트들이 '젠더 폐지론'을 비판하는 네 가지 주요 주장에 대해 급진주의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답하고자 합니다. 그 네 가지 주장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1. 젠더 폐지론에 의해 젠더를 해체하면, 남는 것은 섹스인데 기존의 분류는 지극히 성기 중심적이다. 이는 불완전하다. 

2. 젠더가 해체된 이후 남는 것은 섹스이며, 이는 젠더 이분법을 강화시키는 방향이다.

3. 젠더를 폐기하는 것은 트랜스/젠더퀴어의 경험을 비가시화하는 폭력이다.

4. 시스젠더는 트랜스젠더보다 강자이며,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다.


1. 젠더 분류는 완전한가? 

  기존 분류의 불완전성에 대해서는 동감합니다. 성기중심적인 분류는 간성(intersex)을 배제하며, 생물학 역시 100%완벽한 기준이 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Y염색체의 유무에 의한 분류는 서양에서는 1950년대까지 유효했습니다. 현재는 Y염색체 위에 존재하는 성결정유전자인 SRY유전자가 발현되느냐/아니냐에 따라서 성기 모양이 결정된다는 것까지 대중들에게 알려졌는데, 그 외에 다른 성결정유전자가 발견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그렇다면, 현 시점 젠더분류체계는 완벽합니까? 아니요, 저는 젠더분류야말로 훨씬 구멍이 많다고 봅니다. 이는 바로 젠더가 '정신적 성별'이라는 특성에서 비롯됩니다. 


젠더분류체계는 나의 경험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습니다. 현재도 워낙 비슷해서 혼동되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젠더 플루이드와 젠더 플럭스, 에이젠더와 젠더리스, 젠더퀴어와 논바이너리 등은 자주 혼용됩니다. 또한 혼용만으로도 부족하여 사람들은 여러 개의 이름을 동시에 사용하기도 하지요. 예를 들어, 제 경우에는 분류에 따르면 논바이너리이며 젠더퀴어란 말도 혼용해서 쓸 수도 있고, 하위분류의 젠더리스와 성별 비순응자란 개념도 같이 사용해야 그나마 좀 커버가 되는 거 같더라고요.(웃음)


하지만 이조차 부족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참고로 기준은 제각기 다릅니다만, 현재 NYC에서는 31개의 젠더를 인정했고(https://www.google.co.kr/amp/s/heatst.com/culture-wars/here-are-the-31-gender-identities-new-york-city-recognizes/amp/) 영국 페이스북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젠더옵션은 71+개라고 하는군요(http://www.telegraph.co.uk/technology/facebook/10930654/Facebooks-71-gender-options-come-to-UK-users.html) 개개인이 경험하는 성별적인 특성이란 정말 각양각색이기 때문에, 젠더는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이름이 생길 때마다 불편함을 감수하고 줄줄이 외워야 하는 것일까요? n개의 이름표는 결국 혼란을 가중시키고, 이름표를 쓰지 않는 사람들을 배제합니다. 


또한, 타인의 젠더를 멋대로 잘못 넘겨짚는 것은(=미스젠더링) 대단한 폭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젠더 정체성이란 개인의 자아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내가 바라보는 나와 타인이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내가 다르듯 젠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타인이 판단해 주는 것이 맞을 때도 있고, 혹은 틀릴 수도 있죠. 간혹 트랜스젠더로 정체화했다가 피크 트랜스*(어떤 사람이 트랜스 커뮤니티에서의 모든 것이 옳지 않다 여기고, 트랜스정치학의 지지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게 되는 순간)를 겪어 다시 자신을 지정성별로 정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자아에 대해 총체적으로 완벽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까?


2. 성별 이분법 고착화에 관해

아니요, 현재의 분류체계 역시 젠더 이분법을 강화시킨다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젠더 분류에는 대체로 바이너리 모델에 기반을 둔 이름들이 많습니다. mtf/ftm이라는 정체성은 이분법을 근간으로 하는 이름이며, 중성이라는 이름 역시 여성/남성의 이분법에 기반을 둔 표현입니다. 논-바이너리라는 이름 역시 바이너리 모델이 존재함을 전제로 하고 사용되는 이름이지요. 


그리고 젠더 이분법을 깨는 것은 젠더를 세밀하게 나누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분법을 깨기 위해 우리는 필연적으로 기존의 젠더규범을 해체해야 합니다. 저를 포함하여 기존의 젠더규범에 들어맞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여성/남성의 이분법에 당연히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설명할 수 없는 용어니까요.

그렇기에 이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탐색하게 되는데, 이 사람들이 자신을 여성 또는 남성이라 부르지 말라면서 기존의 여성/남성 분류에 포함되길 거부한다면 과연 성역할 규범은 어떻게 깰 수 있을까요?


좀더 쉽게 이야기해 볼게요. 지정성별 여성인 A는 화장을 하지 않고, 원피스나 치마보다는 바지를 입길 좋아하며 짧은 머리를 고수합니다. 이 때 A가 자신을 논바이너리 정체성 중 하나로 소개한다면 A는 논바이너리로서 젠더표현을 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리고 A는 자신을 "내가 여자고, 이것이 여자다운 것이다"라고 소개할 수도 있다. 이 때 A는 여성에게 요구되는 젠더규범을 거부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 중 성역할 규범을 깰 수 있는 쪽은 후자입니다. 자신을 여성으로 정의하지 않고 젠더퀴어나 논바이너리 정체성을 사용하게 되면 결국 시스젠더인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성역할을 그대로 수용하고 이들에게 여성성/남성성을 고착화시킵니다. 


그렇다면 시스젠더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기존의 성역할을 그대로 재생산하는 사람들인가요? 젠더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사람들인가요? 아니요. 가부장제 시스템 하에서 지정성별 분류와 젠더규범의 폭력성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개중에는 안드로진이나 젠더플루이드/젠더 플럭스, 젠더리스 등 논바이너리에 해당하는 경험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류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거나, 지식을 접할 기회가 없어서 사용하지 않을 수도 있죠. 


그러면 자신의 젠더 정체성을 커밍아웃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질문할 수도 있겠네요. 글쎄, 정체성을 드러낼지 아니면 젠더 분류를 거부하고 살지는 개개인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다시금 말하건대, 가부장제 시스템 하에서 지정성별 분류와 젠더규범의 폭력성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또한 여성성/남성성의 이분법이란 가부장제의 유지를 위해 만들어진 개념입니다. 남자들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남성성'을 우위에, 그 반대의 특성을 여성성으로 이름붙였어요.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여성복으로 규정되는 옷(치마, 하이힐, 원피스, 스타킹,코르셋 등)은 실용성보다는 활동하기 불편한 옷이지요. 그리고 양육, 가사 등의 돌봄 노동은 여성의 일로 치부되면서 비하되었어요. 그 외에도 수동적일 것, ^예쁜 말^을 쓸 것, 도전하기보다 안정을 추구할 것, 등등 여성성이란 피지배 계급의 행동양식으로서 여성들을 억압해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성/남성성의 이분법을 유지해서는 안 됩니다. 이 젠더 규범은 깨져야만 하고, 이는 앞서 말했듯이 자신의 퀴어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정성별을 드러내고, 그 성역할에 맞지 않는 모습을 의도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가능합니다.


3. 젠더폐지론은 그들의 존재를 지우는가?

오해하고 있습니다. 이름을 없애버리자는 것은 당신의 경험을 삭제하고 입을 틀어막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나의 젠더가 무엇인지 이름표를 붙이지 않고서도 경험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앞서 저는 1에서 젠더분류의 불완전성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같이 젠더리스란 이름표를 쓰고 있다고 해도 당신이 느낀 경험과 나의 경험은, 억압의 정도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퀴어 공동체에서, 그리고 커밍아웃할 때 왜 각자 정체화하게 된 계기,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할까요. 사실은 그 이름만으로는 내가 누군지 설명하기에 부족하기 때문이 아닌가요? 


또한, 젠더 해체가 트랜스/젠더퀴어의 경험을 비가시화한다는 논리 그대로, 나는 여성의 경험을 지운다고 되돌려 줄 수 있습니다. 2에서 말했듯이 나라는 개인을 여성이 아닌 다른 젠더로 라벨링하는 것은 지정성별 여성으로서 당한 경험을 퀴어로서 겪은 경험으로 전환시킵니다. 그러나, 현재 지정성별을 기반으로 한 젠더 이분법이 하나의 장벽처럼 튼튼하므로, 이걸 퀴어로서 겪은 경험으로 전환시키는 것은 여성으로서 겪은 경험을 지워버리는 일이 됩니다.


예를 들어, 여성혐오범죄가 버젓이 존재하는데 내가 '여성으로 패싱되었기 때문에' 당한 성폭행을 젠더퀴어이기 때문에 겪은 경험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겉보기에 흑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나는 나를 백인이라고 생각해요! 쏘지 마세요!" 라고 말하면, 그 사람이 백인에게 총 맞아 죽었을 때 인종차별범죄가 아니게 될까요? 성감별 임신중절로 수많은 여자아이들이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젠더'로 죽지 않았습니다. 여성 할례의 경우 역시 '젠더' 로 인한 차별이 아닙니다. 


우리 개개인이 느끼는 성별 정체성, 경험들은 젠더라는 이름표 '이전에' 실존합니다. 본질은 우리의 경험이지, 이름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개개인이 가부장제라는 거대한 시스템 하에서 어떤 방식의 폭력을 경험했는지 말할 수 있는 분위기이며, 서로의 경험에 공감하는 가운데 이분법과 젠더 규범을 해체하는 것입니다.


4. 시스젠더란 말에 관해

  저는 시스젠더란 표현 자체를 거부합니다. '시스'라는 말은 정확히 정신적 성별과 신체적 성별이 같은 경우를 의미합니다. 실질적으로 '시스젠더'라는 말은 자신을 트랜스젠더 혹은 젠더퀴어로 정체화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붙여집니다. 그렇다면 정신적 성별이란 무엇인가요? 왜 스스로를 여성으로 느낍니까? 


자신이 원해서 여성으로 태어난 사람이 있습니까? 없겠지요. 차별이 존재하는 줄 알았더라면 아무도 여성으로 태어나고 싶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원하는 바는 여성 취급이 아니라, '인간' 취급입니다. 그런데 이 시스젠더라는 표현은 우리가 스스로를 여성으로 느낀다고 말합니다. 대체 그 여성은 누구입니까? 주민등록번호 2로 시작하는 사람들이고, 취업과 승진에서 차별을 받고요, 여성이기 때문에 화장실 몰카를 두려워하고, 여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핑크색을 좋아하고 리본과 레이스를 좋아하고 꾸미는 걸 당연시하게끔 요구되는 사회의 2등 시민입니다.


누가 2등 시민을 하고 싶습니까? 1등 시민이 되기를 원하지요. 그러나 사회에서 나를 그렇게 취급하기 때문에, 그 억압이 존재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여성'이라고 인식합니다. 내가 여성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당하는 각종 차별, 강요되는 여성성은 앞서 말했듯이 다른 젠더로 나를 표현한다고 해서 지워지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시스젠더란 표현은 너무 간단히 이런 맥락을 지워버립니다. 그 사람들은 과연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에 불만이 없을까요? 아니란 겁니다. 제가 하는 말이 여전히 '시스젠더니까' 하는 소리로 들린다면, 첨부된 사진을 보세요.  mtf인 케이트 본스타인이 쓴 <젠더 무법자>에서 저자는 분명히 "모두가 자신의 성별 지위에 불만을 가지며, 그 원인은 성역할, 지정성별, 성별 정체성일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요, 나는 성기를 기준으로 여성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주민등록번호가 2로 시작하고 여성으로 보이기 때문에 여성혐오범죄에 노출되고 차별을 당합니다. 나는 그래서 이 여성이란 이름을 혐오합니다. 그 이름은 차별, 억압, 2등 시민, 인형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름 또한 나에게 강요된 '여자는 어쩌고저쩌고~' 와 같은 성 역할을 혐오합니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를 트랜스젠더/젠더퀴어라 부르지 않습니다. 이유는 위에서 충분히 설명했으니 생략. 


여성성/남성성 규범, 고착화된 성역할은 모두를 억압해요. 그러나, 그 억압에 대해서 급진주의자들은 성역할을 타파하고 젠더 분류 자체가 문제라고 보는 입장이며, 트랜스/젠더퀴어들은 새로운 젠더의 명칭을 쓰고 의료서비스를 구입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 뿐입니다. 결국 트랜스/젠더퀴어들과 급진주의페미는 동일한 문제제기로부터 출발한 엇갈린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저는 스스로를 '시스젠더'라 부르지 않을 것이며, 또한 시스젠더 여성이 강자, 트랜스/젠더퀴어는 약자라는 프레임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원문은 2017년 4월 11일에 페이스북에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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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혜리(Hyeri 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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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의 의미


정발남: 정상발언남의 준말. 여기서 정상발언이란 곧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발언이다. 
시계남: 정발남이라는 표현도 너무 남성을 띄워줬다며 문제가 제기된 이후, 누군가 고장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시간이 맞는다는 뜻에서 시계남이라는 용어를 제안하였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시계남'이 대체용어로 자리잡았다. 


용어의 변화

메르스 갤러리~메갈리아 초반까지 개념남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개념남은 김치녀-개념녀 프레임에 대한 미러링으로 나왔으며, '개념녀'에 대응하는 용어이다. 이후 메갈리안들은 너무 추켜세웠다며 '개념남'은 없으며 탈치남은 재기한 한남뿐이라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여전히 옳은 말을 하는 남성을 지칭할 단어가 필요하였기에 '정상남'이 대체 용어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워마드로 분화된 이후 '정상남'이 사용되다가 '옳은 발언만 먹고 버리자' 라는 의견이 나와 '정발남'이 만들어졌다. 그러다가 원래 여성혐오하던 인물이 맞는 말을 할 때도 있어 '간헐적 정발남'이 사용되다가 남자는 고장난 시계와 같다 하여 '시계남'이 파생된 것.
(단, 시계남은 아직 많이 알려진 표현이 아니다.)


용어에 담긴 함의


  우선, 정발남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정상'이라는 표현에는 '비정상'도 존재한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정상적인 말에 주목하지 않는다. 뉴스에서 누군가의 선행보다는 살인, 강간, 방화, 사기 등의 범죄를 더 많이 접할 수 있는 것은 도덕적 규범에 어긋나는 '비정상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그렇다.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는 듣다 보면 지루할 뿐이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정발남/정상남이 사용되는 건 역설적이게도 페미니즘이 그만큼 이 사회에서 비정상적으로 취급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시계남이라는 표현은 어떨까. 하루에 두 번 맞는 시계라면, 나머지 시간대는 전혀 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시계남은 어쩌다 가끔 페미발언을 하고 다른 때에는 여성혐오를 하는 남성이다. 
그런데 우리는 알고 있다. 여성혐오적인 발언을 하고 자기와 다른 여성을 프레임에 가두는 여성은 '흉자'이고 그 행위는 '자지짓'이지만, 이 행위를 하는 남성은 '씹치남, 한남충'일 뿐이다. 따라서 기존 젠더권력을 그대로 누려 오면서 어쩌다 한번 페미발언을 하는 남성을 '시계남'이라 부르는 건 페미발언에만 선택적으로 주목하여 숭배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남성 숭배는 실효성 있는 전략이었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숭배 대신 흔히들 '자르셋을 씌운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남성에게 외모 프레임을 씌울 때나 효과적인 전략이며, 페미니즘 운동을 하게끔 만드는 데 효과적이지 않다. 정반대의 결과가 나오는 이유는, 결국 '여성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심리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외모 프레임은 연애를 강요하는 풍토와 결합되어 이성애자 남성들이 여성을 필요로 하게끔 만든다. '연애를 못하면 비정상적이다', '연애를 못하면 루저다' 와 같은 표현을 재생산하고, X년차 모태솔로라고 자조하는 문화는 남성들에게 필연적으로 여성과 연애할 것을 강요한다. 따라서 이성의 호감을 얻게끔 언행을 제약하게 만드는데, 바로 이런 배경이 있어 외모 프레임으로 자르셋을 채울 수 있는 것.

그러면, 페미니스트로서 활동하게끔 하는 데 효과적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여성에게 잘 보이기 위한' 페미니즘 선언이란 결국 페미니즘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보는 시각이다. 즉, 여성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면 수단인 페미니즘은 쓸모가 없게 되는 것이다. 페미니즘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생각한다면, 칭찬의 유무 따위는 운동을 하는 데 크게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여성에게 잘 보이고 싶다' 라는 심리를 이용한다는 건 이성애자 남성에게만 해당되는 점도 '숭배'의 한계이다.  

그리고,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숭배는 미러링 전략이 될 수 없다. 가장 대표적으로 여성 숭배가 드러나는 성녀-창녀 프레임을 생각해 보자. 이분법에서 나타나는 여성 숭배는 여성이 스스로를 '창녀'가 아니라 부정하고 언행을 제약함으로써 '성녀'를 지향하게 만든다. 반면, 남성의 경우에는 이미 자신의 성별 때문에 주목받고 성별이 곧 가산점이 된다.


대등하지 않은 발화권력


  여성은 당사자로서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게 당연시되지만, 남페미들은 비당사자이고 페미니즘 몰라도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젠더권력 누리고 사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리고 동일한 패턴으로 여성혐오를 재생산하는 남성들에게 질렸기 때문에 여성의 입장에서는 생존을 위해 운동하는 여성 당사자보다, 비당사자인 남성의 페미니즘 지지 발언을 더 특별하게 느끼기 마련이다. 남성 역시 남성들 특유의 유대(=호모소셜)로 인해 여성보다는 남페미에게 주목한다. 

그렇다면 페미니스트가 아닌 사람들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 중 하나로, 여성의 발언을 남성의 발언보다 하등한 것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페미니즘을 지지하지 않을 경우에는 내면화된 여성혐오로 인해 남페미의 말을 더 설득력 있게 받아들이는 것. (특히 강약약강이 몸에 밴 씹치놈들의 경우, 여성은 자신보다 지위가 낮으므로 그 말을 무시하고 맨스플레인하기 일쑤다)

따라서,남페미는 발화권력이 더 강한 것이 맞으므로, 정발남이나 시계남이니 이름붙이는 것은 모성 숭배와 같은 효과를 발휘할 수 없다. 오히려 이러한 워딩으로 인해 당사자로서 운동하는 여성 페미니스트들의 발언을 놓치게 될 우려가 있다.


결론

 

  위에서 '정발남', '시계남'의 용어를 분석하고 그 실효성을 남성 숭배와 관련하여 분석하였다. '개념' '정상', '시계' 가 아니라 어떤 단어를 ~남 앞에 붙여 사용하더라도, 남성 페미니스트 개개인에 대해 주목하게 된다는 점은 변하지 읺으며, 기울어진 운동장 하에서 숭배는 적절하지 않은 전략이다. 따라서 나는 숭배의 의미로 쓰는 'xx남' 워딩에 반대한다. (단, 과거 여성을 대상화하는 데 사용되었던 각종 XX녀의 미러링 표현은 적극 동의한다.) 대신에 페미니스트가 아닌 사람에게 차별주의자라 낙인찍듯이, 혐오발언을 하는 남성에게 낙인을 찍는 데 주목해라. 

앞서 설명했음에도 미러링을 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차라리 발언을 무시하는 편이 낫다. 그동안 여성은 학문적 영역에서도, 정치적 영역에서도, 직장과 가정 등 여러 공동체에서도 무시당해 왔다.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되어 목소리가 지워졌다. 이러한 역사를 생각할 때, 숭배보다는 차라리 목소리를 조명하지 않는 것이 훨씬 적합한 미러링이 아닌지.



본 글의 원문은 2017.1.8일경 페이스북 계정에 먼저 게시되었습니다.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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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혜리(Hyeri Nam)

6B radical feminist,lesbian,liberal right-winger, atheist,contents 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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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시스젠더란 표현 자체를 거부합니다. '시스'라는 말은 정확히 정신적 성별과 신체적 성별이 같은 경우를 의미합니다. 실질적으로 '시스젠더'라는 말은 자신을 트랜스젠더 혹은 젠더퀴어로 정체화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붙여집니다. 그렇다면 정신적 성별이란 무엇인가요? 왜 스스로를 여성으로 느낍니까? 

  자신이 원해서 여성으로 태어난 사람이 있습니까? 없겠지요. 차별이 존재하는 줄 알았더라면 아무도 여성으로 태어나고 싶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원하는 바는 여성 취급이 아니라, '인간' 취급입니다. 그런데 이 시스젠더라는 표현은 우리가 스스로를 여성으로 느낀다고 말합니다. 대체 그 여성은 누구입니까? 주민등록번호 2로 시작하는 사람들이고, 취업과 승진에서 차별을 받고요, 여성이기 때문에 화장실 몰카를 두려워하고, 여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핑크색을 좋아하고 리본과 레이스를 좋아하고 꾸미는 걸 당연시하게끔 요구되는 사회의 2등 시민입니다. 

  누가 2등 시민을 하고 싶습니까? 1등 시민이 되기를 원하지요. 그러나 사회에서 나를 그렇게 취급하기 때문에, 그 억압이 존재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여성'이라고 인식합니다. 내가 여성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당하는 각종 차별, 강요되는 여성성은 다른 젠더로 나를 표현한다고 해서 지워지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시스젠더란 표현은 너무 간단히 이런 맥락을 지워버립니다. 그 사람들은 과연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에 불만이 없을까요? 아니란 겁니다. 우리는 좆같은 성역할에 거부감을 느끼는 여성들이고, 우리 중 자신의 몸에 혐오감을 느끼는 여성들은 의외로 많아요. 매달 생리할 때마다 불쾌함과 생리통 때문에 포궁을 들어내고 싶은 기분을 느끼고, 내 가슴을 쳐다보는 한남들의 시선폭력이 싫어서 유방이 없어졌으면 하고 바라는(혹은 바랐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요, 나는 성기를 기준으로 여성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주민등록번호가 2로 시작하고 여성으로 보이기 때문에 여성혐오범죄에 노출되고 차별을 당합니다. 나는 그래서 이 여성이란 이름을 혐오합니다. 그 이름은 차별, 억압, 2등 시민, 인형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름 또한 나에게 강요된 '여자는 어쩌고저쩌고~' 와 같은 성 역할을 혐오합니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를 트랜스젠더/젠더퀴어라 부르지 않습니다. 다른 이름으로 정체화하는 것으로 내가 겪어왔던 차별을 없앨 수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내 신체를 굳이 부정할 게 아니라 생각을 전환해야 하는 문제가 아닐까요. 가슴이 있다는 걸 부끄러워할 게 아니라 시선폭력하는 한남들한테 따지면 되고, 생리가 너무나 좆같지만 그건 생리에 대한 연구가 미비했기 때문에 해결방법을 모르고 있는 것이라고. 내가 억압적인 신체를 절단한다면, 개인적으로는 해결할 수 있겠지만 결국 시선폭력과 같은 여성의 몸에 대한 억압이 사라지지는 않으니까요. 

   여성성/남성성 규범, 고착화된 성역할은 모두를 억압해요. 그러나, 그 억압에 대해서 급진주의자들은 성역할을 타파하고 젠더 분류 자체가 문제라고 보는 입장이며, 트랜스젠더/퀴어들은 새로운 젠더의 명칭을 쓰고 의료서비스를 구입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 뿐입니다. 결국 트랜스젠더/퀴어들과 급진주의페미는 동일한 문제제기로부터 출발한 엇갈린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저는 스스로를 '시스젠더'라 부르지 않을 것이며, 또한 시스젠더 여성이 강자, 트랜스젠더/퀴어는 약자라는 프레임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원문은 2017년 8월 2일 페이스북에 게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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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혜리(Hyeri 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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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라니_가해자인줄

11월 2일 가정폭력 피해자 보호시설인 쉼터에 가해자가 찾아왔다고 한다. 경찰은 주거침입한 가해자에게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고 방관했으며 도리어 피해자와 보호시설을 비난하기까지 하는 등 보호시설의 의미도 모르고 가해자에게 감정이입을 했다고. (자세한 내용은 여기서 https://hotline.or.kr:41759/news/35057)

가장 사적인 공간이자 흔히 안식처로 묘사되는 공간인 가정. 그 공간에서도 폭력은 일상적으로 발생하며, 그 피해자는 주로 여성이다. 우리는 대개 함구할 것을 강요받고 또 스스로 입을 다문다. 왜냐하면 가정의 불화는 개인의 치부로 인식되고 흔히들 "참고 살아" "우리 집도 그래"라는 말로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그렇게 묻힌다. 자신이 당한 일이 가정폭력인줄도 모르거나 알아도 적당히 참으면서 사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첨부된 사진을 보자. 2016년에 여성가족부에서 낸 통계자료다. 그러면 이런 가정폭력은 얼마나 자주 발생하냐고요? 1/2. 두 집 중에 한 집 꼴이래요. 이렇게 많이 발생하는데 정작 가정폭력 감수성은 부재하다.  실제로, 피해자를 입막음한 사례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각주:1]

이와 같은 사례들은 그나마 피해를 신고한 케이스 중에서 기사가 난 경우이며 실제 신고율은 1.3%에 그친다고 하니 얼마나 가정폭력은 비가시화되어 있는지. 경찰은   가정폭력 인식 및 대응방침에 대한 교육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피해자를 구제해야 할 경찰마저도 사적인 일로 치부하고 피해자를 불신하면, 대체 피해자들은 어떻게 자신의 피해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1. 경향신문, <가정폭력 신고했는데…가해 남편 말만 믿은 경찰>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708101557001&code=940202 오마이뉴스, <가정폭력 여성들이 두 번 신고하지 않는 이유>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0155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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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 보면 '여대생들이 돈벌려고 성매매한다'라는 식의 글들이 참 많이 보인다. 주로 이런 발언을 하는 건 남성들이다.

우선, 성매매 여성들 대부분이 고학력자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실제 통계를 살펴보면, 성매매 여성의 학력은 중졸이하가 전체의 56.8%로 가장 많았고, 고졸이하가 39.8%로 나타났으며 대학 중퇴이상은 3.4%에 그친다. 이 발언은 '사치스러운 창녀'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며, 성매매 여성들을 구조적 피해자로 보지 않고 개인적 차원으로 끌어내려 몸을 상품화하는 것처럼 호도하며 성매수하는 남성 자신의 죄책감을 덜게끔 한다. 그러나 사실, 돈 잘 버는 성매매 여성은 극히 일부일 뿐인데다가 대부분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가진 것이 없는 사회 취약계층이다.

물론 성매매하는 대학생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성산업에 뛰어들게 된 이유도 등록금 등 학비를 벌고 싶은데 마땅히 고수익 알바가 없었다는 것이 대부분. 또한 상대적으로 취업에 있어서도 차별받는 상황에 취업난까지 겹친 현실이니, 결국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고수익 알바인 과외조차도 과잉 공급이 일어나 물가는 올랐으나 과외비는 몇 년째 올라가지 않고 있다. 그리고 과외시장에서는 아직까지 학벌주의의 잔재가 남아 있어, 소위 '명문대'가 아니면 구하기 힘들다. 더구나 명문대 출신이어도 지인이 소개해주는 등 친분이 있지 않는 한 과외자리를 구하기는 그렇게 쉽지 않다. 

참고로, 하루 평균 성매매 업소를 찾는 한남은 평균 ^10만 6532명^(출처: 젠더와 사회) 이고, 10회 이상 상습 성 구매자 대상 분석 결과 미혼과 기혼 간 차이가 없어 성관계 파트너가 없는 남성의 성욕 해소를 위해 성매매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부족한 것으로 드러났다. (참고: http://m.womennews.co.kr/news_detail.asp?num=75945#.WK4zR0HV_qA) 사치스러운 건 어느 쪽?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2389648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8&aid=0003661670

http://m.ilyoseoul.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6233


*원문은 2017년 2월 22일에 페이스북 계정에 게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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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 네이트판에 글이 하나 올라왔다.[각주:1] 사회 초년생인데 정식으로 입사하고 나서 몰카 피해를 입고 성폭행을 당했다는 피해자의 호소글이었다.  그 피해를 알리자 회사측에서 돌아온 반응은 오히려 감봉과 풍기문란이라는 징계였다.네이트판에 올라간 글은 확산되고, 회사 측에서는 인사팀장을 해고했다. (참고로 몰카범은 이미 올해 초에 구속되었다.) 그러나 교육담당자의 경우에는  그러지 않았다.[각주:2]  

언론은 늘 그랬지만, 피해자의 편을 들지 않았다. 얼핏 단순 사실만 전달하고자 뽑은 듯한 "한샘 여직원 피해 주장 논란"이라는 헤드라인. 그러나 이는 철저히 피해자를 소외시키는 표현이다. 피해자의 성별은 그대로 드러냈고,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는데)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처럼 "논란"을 붙였기 때문이다. 중앙일보 트위터 공식계정의 경우엔 아예 피해자에게 트라우마가 될 수 있는 사진을 올렸다. 글과 함께 첨부된 사진을 보면 한 장은 핸드폰을 든 손, 한 장은 탈의중인 여성의 뒷모습. 그렇게 관음하는 시선을 연출해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데도, 회사 측에서 이에 대처하는 태도는 지극히 가관이었다.  그 와중에 매출이 걱정되었는지 각종 언론을 통해 세일하겠다는 기사를 내놓았다.  더욱이 웃기는 건, 이런 사건이 일어나고도 제대로 처리하지 않는 회사가 무려 여성친화적 기업으로 선정되었다는 점이다. 기술,생산직과 임원에 여성은 몇 명이었나. [각주:3]그리고 그 여성친화적 기업에서는 왜 이미 전과가 있던 몰카범을 직원으로 쓰고 있었나?[각주:4]



가해자 남성으로 지목된 교육담당자는 피해자와의 친밀한 관계였음을 주장했고 카톡 내용을 올렸다. [각주:5]피해자가 상처 부위 등을 찍어 증거로 제출한 마당에 반박할 증거자료로 제시하는 게 "피해자가 내게 호감이 있는 줄 알았다"라니. 뻔한 가해자들의 변명이었다. 아주 사소한 친절조차도 나를 좋아해서 그런 것이라 머리로 망상하고 일단 갖다붙이기.


그러나 사람들은 피해자에게 돌을 던졌다. 특히 각종 남초커뮤니티와 기사 댓글에서 남성들은 돌을 던지며 피해자의 진정성을 의심했다. 

"고소취하한 거 보니 꽃뱀이네"
"어떻게 다음날 저렇게 태연하게 말해"
"카톡 연애소설도 아니고" 

기껏해야 "양쪽 다 입장 들어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양비론적인 입장이 있을 뿐, 아예 관심없는 "그래서 피해자 예쁘냐"는 반응마저도 보였다.


 고소취하하고 무혐의를 판정받은 그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자. 과연 피해자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었다. (관련 링크: 네이트판에 올라온 글) 법무팀에서도 피해자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식으로 2차 가해를 했고, 지속적으로 고소를 취하하라고 말하며 '살해협박'까지 하는 상황에서 얼마나 감당할 수 있었을까?

다음날 어떻게 저리 태연하게 말할 수 있느냐는 말에 답해 보겠다.  강간, 성폭행 피해자의 경우에는 그 당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모르며, 이는 흔히 피해자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전형적인 2차가해 발언이다. (어떤 말들이 2차가해에 해당하는지는 이 기사를 참조하자.) 우리는 아무도 성폭행을 당했을 때 실질적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제대로 배우지 않았다. 학교 성교육 시간 때 배우는 것은 고작 여성이 조심해야 한다는 내용뿐이었으니까. 또한 심리적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이 이후에 그 일을 부정하려고 하는 것은 흔한 방어기제 중 하나이다. 더욱이 취업이 쉬운 것도 아닌데 처음 들어간 직장에서 자신보다 직급이 높은 사람과 굳이 마찰을 일으키고 싶었을까?

또한, 가해자와 얼마나 친밀한지와 가해여부는 관련이 없다. 연인 사이, 부부 사이에도 강간과 폭행은 발생한다. 오히려 모르는 남보다 아는 사람에게 아이가 유괴당하는 일이 많이 발생하는 것처럼 친밀한 관계이기 때문에 그런 폭력은 더 일어나기 쉽고 입막음당하기도 쉽다.


여기까지, 현재진행형인 한샘 사건에 대해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나는 이 사건에서 여혐민국이 피해자의 목소리를 어떻게 지우고 성폭행을 하찮은 것으로 취급하는지 뼈저리게 느낀다. 회사, 중립적인 양 보도하거나 피해자를 부각시키는 이미지를 사용하는 언론, 성범죄로 파면된 경찰의 복직 비율과 낮은 성범죄 형량만으로도 알 수 있는 남성 중심적 사법체계, 그리고 이 사건을 지켜보고 피해자의 진정성만을 비난하는 남성들. 이 모든 것들은 가부장제에서 깊게 뿌리내린 강간 문화(rape culture)와 연결되며, 가해자에 이입하는 남성들 간의 결속은 안드로소셜[각주:6], 즉 남성카르텔 더 쉽게 말하자면 남근연대이다. 

남성카르텔 사회에서 남성들은 피해여성에 공감하지 않으며, 공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공감하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게 살 수 있기 때문에 공감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행위가 여성에 대한 폭력이며, 어떤 발언이 2차 가해가 되는 줄 모른다. 당사자성을 갖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하는 이들이 공감할 때는 오로지 그들의 딸/여친/어머니/아내를 언급할 때뿐인데, 그마저도 자신과 친밀한 관계 혹은 자신의 소유이기 때문일 뿐, 여성 일반으로 확장하여 생각하지 않는다.


한샘 사건은 사실 여성들에게는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니다. 직장 내에서 여성들은 흔히 권력관계에 의해 성희롱, 성추행을 경험하고, 화장실이나 탈의실 등 공간에 몰카가 있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힘겹게 피해자가 성범죄를 고발하면 집단에서는 자신들의 이미지를 위해 피해자를 입막음하고 퇴출한다. 회사가 되었든, 교회가 되었든, 병원이 되었든, 군대가 되었든 위계가 존재하는 그 어떤 곳에서나 말이다.  어렵게 호소한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며 비난하는 일 역시 항상 일어나 왔다.

그렇게 늘상 경험하는 일이기에, 지겹도록 경험하는 일이기에 우리는 분노한다. 동시에 여전히 남성 카르텔과 강간문화, 전체주의가 굳건하다는 걸 느끼면서 아파한다. 가슴이 찢어지도록  답답해한다. 이 빌어먹을 여혐민국은 언제야 변하지. 언제쯤 여성이 스스로의 피해를 눈치보지 않고 말할 수 있을까, 언제쯤 피해자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이 사라질까,  다 떠나서 근본적으로 피해가 발생하지 않는 세상은 대체 언제쯤 올까. 내가 죽기 전에는 볼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답함으로, 분노로 우리는 일어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의 가능성을 믿으며 해결책을 강구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우선, 이 사건에 대해 공정한 수사를 촉구하는 일. (청원 링크) 나아가 성범죄 자체의 처벌 수위를 강화하는 일. (청원 링) 그리고 1,2차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No means no"와 어떤 발언이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가 될 수 있는지를 의무교육과정에서 가르치는 일.

   우리는 싸울 것이다. 3일에 한 명 꼴로 여성이 죽는 사회에서, 강간을 강간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에서, 피해자의 목소리가 지워지고 도리어 비난받는 세상에서 그 여성혐오에 저항할 것이다. 생존 자체가 정치적인 여혐민국에서 여성혐오를  직면하며 살아가는 헬페미니스트이기 때문이다. 

  



 


  1. 현재 해당 글은 삭제되었으나, 이를 그대로 복원하고 내부 문건을 추가한 글이 재차 네이트판에 올라왔다. 링크는 http://m.pann.nate.com/talk/339307677 [본문으로]
  2. http://www.kookje.co.kr/mobile/view.asp?gbn=v&code=0300&key=20171104.99099001697#cb [본문으로]
  3. https://notice.gov3.org/notice.php?id=20161114002228&page=98 [본문으로]
  4. http://mnews.joins.com/article/22084222#home [본문으로]
  5. 현 시각 네이트판에 올라갔던 글은 삭제된 상태이므로 다른 사이트에 복사된 글을 첨부한다. http://www.inven.co.kr/mobile/board/powerbbs.php?come_idx=2097&my=chu&l=840759 [본문으로]
  6. 본래 남성 간 유대를 호모소셜이라 하나, 필자는 호모소셜 대신 안드로소셜을 사용하였다. 그 이유는 일전에 쓴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도록 하자.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femi-nyanng&logNo=22100781796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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