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에 사용되던 감정노동보다는 공감노동이 적확한 표현이라 생각하여 감정노동을 공감노동으로 대체하였다.

 

타인은 내게 완전히 공감할 수 있는가


없다. 내가 직면한 문제를 가장 잘 아는 건 내 자신이고, 어떤 감정이 드는지 가장 잘 아는 것도 내 자신이다. 타인의 공감이란, 나의 문제를 타인의 사고로 해석하고 사회화한 공감노동을 수행하며 내 감정을 흉내내는 일이다. 자기의 시각에서 내 문제를 이해하고, 내 감정을 추측해서 그 상태를 흉내내기 때문에 완전한 공감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예시를 하나 들어 보겠다. 내가 칼에 손가락을 베였다고 하자.  고통의 강도는 나만 알 수 있다. 이 때 타인이 "괜찮아?어떡해 아프겠다" 라고 하는 건 자기가 겪은 비슷한 경험을 토대로 나오는 반응이다. 사실 내가 얼마나 아픈지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다. 다만 타인은 자신의 비슷한 경험에 비추어 그 당시의 감각을 떠올리고  '아프겠다'고 반응하는 것뿐이다. 또 하나의 예시를 들어보겠다. 친구들에게 남충과의 관계가 해결되지 않는다며 혐애1상담을 한다고 치자. 이 때 둘이 잘 해결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헤어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똑같은 문제에 다른 반응이 나오는 이유는 나의 문제를 나의 시각이 아니라 타인의 시각에서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인의 시각은 나의 시각과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렇듯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 감정의 이해에 대한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완전한 공감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내 문제에 가장 잘 공감할 수 있는 건 바로 나 자신이다. 완전한 공감이란 불가능하고, 타인에게 공감을 요구하는 건 도리어 상처만 안고 돌아오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사실, 여기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경험적/직관적으로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타인이 진정으로 자신의 상황을 이해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사람들은 타인이 자기 말에 동조해주면서 공감노동을 하길 바란다. 어째서일까?

 

 타인에게 공감노동을 요구하는 것은 사회적 인정욕구와 관련이 있다.  내가 직면한 문제가 있는데 이 문제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게 맞는지 타인으로부터 확인받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정투쟁은 공감노동을 요구하는 사람과 수행하는 사람의 계급에 따라서 양상이 달라지며, 같은 성별계급sex caste이더라도 여/남 집단은 다른 양상을 보인다.


권력과 공감노동


  우선, 권력차가 존재하는 경우에 대해 생각해 보자. 실제로 권력관계에서 공감노동을 요구하는 쪽은 대개 지배계급이다. 남성은 여성에게, 상사는 부하직원에게, 모부는 그 아이들에게[특히 딸에게], 부자는 빈자에게 공감노동을 요구한다. 물론 반대로 약자가 강자에게 공감노동을 요구할 수도 있으나, 양측이 공감노동을 수행하는 방식은 분명히 평등하지 않다. 사회적 약자가 강자에게 공감노동을 요구하는 경우는 숨 좀 쉬게 해달라, 먹고 살게 해달라는 아우성에 가까우며 그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눈치를 봐야' 한다는 점에서 분명히 차이가 있다.


  또한 권력관계에서 약자가 공감노동을 하지 않으면 비난과 불이익이 따라온다. 왜냐하면 공감노동을 수행하지 않는 것은 지배자의 서열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여성이 남성을 인정하지 않을 때 남자들은 서열이 떨어지는 불안감을 느낀다. 그래서 남자들 중에서도 서열 최하위의 남자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여성, 대개 가장 만만한 아내와 딸에게 위협과 폭력을 가해서라도 인정받고자 한다.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폭력앱충의 흔한 멘트가 6지금 나 무시하는 거야9인 것 역시 이런 맥락에 있다. 중간~상위 서열의 남자들은 물리적 폭력을 사용하는 대신, 공감노동을 수행하지 않는 여자나 아랫사람에게 사회성이 떨어지고 (특히 여성의 경우)귀여운 맛이 없다고 하거나, 인생의 값비싼 조언을 해주는 양 비위를 맞춰달라고 요구한다. 그래야 자신의 서열이 다른 남자들 앞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은 공감노동을 하지 않는 남자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프레임을 씌울 수 없는데, 사회에서 여성의 공감능력이 남성보다 우수하며, 이를 돌봄노동과 연결해 남성의 공감능력이 낮은 것도 6이해하라고9 강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표면적으로 공감노동을 수행하지만 공감을 요구하는 쪽에 동일시하지 않는 건 강자만 가능하다. 연장자는 연소자의 입장을 듣고 공감하는 척 가스라이팅을 할 수 있는 반면(예:  힘들지? 그래도 노오오오력하면 다 돼!) 연소자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남성폭력male violence을 당했을 때 “진짜 안됐다...근데 그 날 무슨 옷 입고 있었어?” 따위의 말로 위로하는 척 2차 가해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자지거나 흉자다. 그러나 여성이 가해자가 될 때 피해자남에게 공감하지 않는 여자를 이들은 맹렬히 비난한다.


성별에 따른 공감노동의 양상


  그렇다면 동일한 성별계급에서 공감노동을 요구하는 건 어떤 방식일까. 우선 여성 집단을 먼저 생각해 보자. 여초 커뮤니티에 가면 이런 글을 쉽게 접할 수 있다. "남친이 ~했는데 나 화내도 되는 거겠지?", "~ 내가 소심한 걸까?"라고 감정을 확인받는 글들. 사실 나의 감정은 온전히 내가 통제하는 영역이다. 그러나 많은 여성들은 내가 느끼는 감정들조차도 '이게 과연 이 상황에서 적절한 감정인지' 확인받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분노와 질투처럼 부정적인 감정을 타인에게 확인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여성은 감정적이라 쉽게 화낸다는 여성혐오적 편견 때문이다. 우리는 그남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분노와 질투 같은 자연스러운 감정조차도 빼앗겼던 것이다. 여성은 판단능력이 떨어지고 감정적이라는 세뇌는 우리의 감정조차 검열 대상으로 만들었으며, 자신의 판단능력과 감정을 신뢰하지 못하는 여성은 가족, 친구, 익명의 커뮤니티 등에 이야기함으로써 공감노동을 요구하게 되었다. 사실 문제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임에도 '네 생각, 감정이 틀린게 아니야' 라는 반응에 집착하게 된 것이다.


  반면 남성의 경우 자신의 생각에 대해 조언을 구하기는 하지만, 감정을 확인받고자 하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 그남들은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는 편이며, 타인의 인정을 받는 것도 생각의 타당성보다는 자기가 처한 문제의 중요성, 문제를 해결한 자신의 유능함을 인정받고 싶어한다. 일부러 과장된 이야기를 하면서 유능하다, 훌륭하다는 반응을 기대하는 것이 그남들의 인정욕구다. 즉, 인정투쟁이 유능함을 자랑하는 방식으로 나타나므로 그남들은 이를 자신보다 서열이 낮은 사람을 지배하는 데에도 효과적으로 사용해 왔다. 6나는 유능하므로 네가 나를 떠받드는 것은 당연하고, 이렇게 능력있는 주인님을 모시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9라고 여성을 세뇌시켰고 위에서 설명했듯이 공감노동을 수행하지 않는 여성에게는 불이익을 주었다. 그러나 여성에게 공감노동을 요구하는 것은 서열 상승이 아니라, 여성을 지배하는 현상 유지에 가깝다. 실제로 그남들이 서열을 올리기 위해 인정투쟁의 준거집단으로 삼는 것은 같은 남자들이다. 그남들끼리 부랄탕[각주:1]을 끓일 때 허세가 심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자기 여친에게 쓰는 돈은 아까워하고 여성을 김치녀네 된장녀네 후려치면서, 남자들끼리 있을 때 한턱 쏜다고 보여주는 이중성 역시 인정투쟁의 준거집단이 남성이라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공감노동에 관해 취해야 할 태도


  첫째. 자신의 감정과 판단능력을 신뢰하고 스스로 사고해라. 특히 나의 감정에 대해 옳은지 틀린지 묻지 말 것. 나의 생각과 감정은 온전히 나의 것이고, 그렇게 느낀 데에는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 자신의 느낌, 예상 해결책 등을 적고 사고과정을 기록하자. 이 문제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믿음을 가져라. 나를 가장 잘 달랠 수 있는 것도 나 자신이라는 믿음을 가져라. 그리고 정보를 구하되 자기 의견을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말에 휩쓸리기가 쉽고, 공감을 빙자한 가스라이팅에 넘어가기도 쉽다.


  둘째. 아무에게나 공감노동을 수행해 주지 않는다. 공감노동을 요구하는 쪽이 원하는 반응을 해주지 않았을 때 관계에 리스크가 생길 수 있으므로 친밀한 관계에서 잘 모르겠거든 적당히 회피하는 쪽이 나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기존의 서열질서를 재생산하므로 자지를 위해서 공감노동을 수행하지 말 것. 어쩔 수 없이 눈치를 볼 경우 공감하는 척하며 은근슬쩍 자지의 능력을 폄하하거다 기억력, 판단능력을 의심하게 만드는 가스라이팅을 시도하자. 어차피 그남들은 당신이 여성이라서 겪는 차별과 억압에 공감하지 않으니, 그남들을 위한 6진심어린 공감9은 정말이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누누이 말하지만 정신적 자원에도 한계가 있다. 상담사들은 직업적으로 공감노동을 수행하지만 그 사람들도 스트레스를 받고 자원이 고갈되기 때문에 상담이 필요하다. 그래서 아무에게나 공감노동을 수행해 주지 말라는 것. 같은 여성이라도 당신에게 일방적인 공감을 요구한다면 그건 착취다.


셋째로, 타인을 감정 쓰레기통으로 쓰지 않고, 감정 쓰레기통으로 쓰일 경우 그 관계를 피하라.

어떤 관계가 감정 쓰레기통으로 쓰는 관계인가요?
- 폭력앱충의 예: 자기를 인정하지 않는 약자에게 물리적 폭력 행사
- 혐애/망혼 흉자의 예: 자기가 처한 상황의 좆같음을 끊임없이 토로하지만 상황을 근본적으로 벗어날 생각이 없음. 그리고 공감해주지 않으면 뒷담하면서 평판을 떨어뜨림

 

감정 쓰레기통에 대한 정의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나는 부정적인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쏟아버리는 것뿐만 아니라 '그래도 되는 존재'로 대상화하는 일을 감정 쓰레기통 삼는다고 말한다. 즉 공감노동에서 착취하는 사람-착취당하는 사람이 있으면 착취하는 사람이 착취당하는 사람을 감정 쓰레기통으로 쓰고 있는 셈이다. 이와 같이 사람을 감정 쓰레기통으로 이용하는 것은 타인의 정신적 자원을 고갈시키며, 인간관계를 망친다. 만약 당신이 감정쓰레기통으로 쓰인다 싶을 경우 그 관계를 끊어내야 한다. 6위로도 못해주냐 싸이코패스야9 같이 가스라이팅을 동반하는 경우 결과적으로 자존감도 낮아지고, 피해자임에도 도리어 당신이 사회성 빻은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 aka 알탕연대, 남성 호모소셜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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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혜리(Hyeri Nam)

6B radical feminist,lesbian,liberal right-winger, atheist,contents 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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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2016년 4월경 다음카페 레디즘(http://cafe.daum.net/ladism/dK4L/1694)에 쓴 글을 백업한 것입니다.


당신이 예민한 것이 아니다. 불편한 것을 불편하다고 말하는 것에 왜 진지충, 예민충, 프로불편러 소리를 들어야 하는가.

내가 불편하다는데 왜 남이 불편해야 하는지 마는지를 정해주는가?
그리고, 주관적인 감정으로 불편하다고 말하는 것과
당신이 주관적인 판단으로 예민하다 말하는 것은 같지 않다.
나는 그 불편한 상황에 의해서 직접 혹은 정신적으로 불쾌함을 느낀 당사자이다.
당신은 그 상황을 직접 겪지 않았다. 제 3자이다. 거기에 대해서 쉽게 님이 예민하신 거라고, 사회생활 어떻게 하냐고 말하는 것은 전혀 '나'의 입장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고 간단히 치부하는 행위이다. 
다시 말해, 대단히 '무례하고 공감능력이 빻은' 말이다. 또한 나는 당신의 발언권을 무시하지 않았으나, 당신은 예민하다는 한 마디로 나의 목소리를 죽이고 논의를 중단시켰다. 

그러므로 부디, 스스로 불편한 것에 불편하다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말자. 
제가 예민한건가요? 묻지도 말자.
당신이 예민한 것이 아니라, 예민충으로 몰아가는 사람이 둔감한 것이며, 무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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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혜리(Hyeri 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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